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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Aug 23. 2023

·다시 그림이 된 사진

회화주의 사진과 CG(Computer Graphic)

이사 온 첫날에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26층 아파트 방에 누워 밤새 뒤척였다.

새벽에 잠이 깨어 창밖을 내다보고 깜짝 놀랐다.

눈 앞에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운해로 흐려진 먼 산위로 해가 막 떠오르고, 하천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흐르는 하천 물에 햇빛이 내려앉아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게 1년 전이었고, 며칠 뒤면 다른 데로 이사를 가게 된다.

다시는 볼 수 없을 풍경이기에, 새벽에 창문을 열고 사진을 몇 장 찍어 보았다.

내친 김에 가방에 카메라를 챙겨 넣고 밖으로 나가 하천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아침풍경을 찍은 사진은 그대로도 좋았지만, 포토샵을 열어서 후보정을 가했다.

‘화이트밸런스'를 맞추고 '토닝분할’로 전체 색상을 조절했다.

‘포토필터’를 사용해서 색을 약간 가미했다.

‘선택색상’ 메뉴를 열어서 적색의 색조를 약간 수정했다.

나는 ‘색칠공부’라는 제목이 적힌 공책을 펼쳐서,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밑그림 위에 색칠을 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완성된 사진을 걸어 놓고, 내 그림솜씨에 반해서 마음이 뿌듯해졌다.

포토샵에는 어떤 회화주의 사진가가 즐겨 사용했던 ‘고무인화법’과 꼭 같은 효과를 주는 필터도 들어있다.

클릭만 하면 사진은 단숨에 유화그림처럼 변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파격적인 효과는 쓰지 않고,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사진을 수정했다.



[로베르 드마시]는 1860년부터 1900년 사이에 유행한 픽토레알리즘(회화주의) 사진가다. 그는 ‘고무인화법’을 이용해서 마치 그림 같은 사진을 제작했다. 고무인화법은 은염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사진인화방식과 달리, 고무와 중크롬산칼륨을 섞은 감광유제를 썼다. 감광유제에 물감을 섞어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자유롭게 색과 명암 톤을 조절할 수 있었고, 그렇게 인화된 사진은 사진 본연의 정확한 묘사적 특성이 사라지면서 수채화나 유화그림처럼 보였다. 아마 그는 사진가가 되어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었지만,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건 '단순 복제행위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예술작품'이 될 수 없고 (찍는 것 외에) 뭔가를 '더 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 예술작품의 특성은 무엇인가? 예술작업은 자연의 모사가 아닌 필기이어야 한다. 자연에 있어서 미의 모티브는 예술작업을 형성하는 특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 같은 특질은 예술가의 표현방식에 의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외관에도 예술의 분자는 없다. 예술은 인간 고유의 것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다. 손으로 그렸든 연필이든 또는 사진기 렌즈를 통해서 이건 자연을 복제했다면 지고의 예술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술작품으로 불릴 수는 없다. (로베르 드마시. 순수사진에 대하여(On the straight print) ]


글의 요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복제한 ‘순수 네가티브‘는 예술작품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예술작품'에서 힘이 실린 부분은 단연 '작품'이다. 카메라에 찍힌 사진이 아무리 예술품처럼 훌륭하다 해도 사진이 그대로 찍은 사람의 '작품'인 건 아니라는 뜻이다. 이어서 그는 '순수 네가티브에 어떤 효과를 가미하는 사진가의 역할이 들어가야만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 외에, 사람이 (예술작품을 만드는 작업다운)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는 원본사진을 수정하고 변형을 가해서 자기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컴퓨터 앞에 앉아 포토샵으로 열심히 사진을 수정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끔 내가 그 100년 전 사진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찍어 와서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후보정작업을 하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원본사진을 포토샵 작업창에 띄워서 명암 톤을 조절하고 색상을 변화시킬 때는 사진을 그림의 관점에서 보면서 미적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드마시>는 사진을 현상/인화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을 써서, 사진에 자기 예술적 표현을 가미하려고 노력했다. 요즘 디지털 사진으로 치자면, 후보정과 편집과정을 통해서,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탄생시키려는 시도와 비슷하다. 원본사진은 별 것 아니었고 그의 손을 거치면서 비로소 '작품'으로 변신하는 셈이다.


<드마시>가 가졌던 회화주의의 관점은 현대에 와서 거의 부정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했던 것은 ’사진’이라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한 방편으로 카메라를 사용한 것’이다. 사진을 밑그림으로 이용해서 그 위에 색을 칠하고 질감을 표현하여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는 식이다. 그러나 현대 사진가들은 사진이 회화와는 다른 길을 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마 그쪽으로 가면 사진이 회화의 일부가 되어, 독자적인 사진으로서는 더 이상 길이 없다는 걸 눈치 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런 회화적인 수법보다는 좀 더 사진적인 수법에 눈을 돌리고 그 부분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사진적 수법'이란 '주관적인 바라보기' 처럼,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카메라로 '찍는 과정'에서 사진가가 자기 개성을 드러내고 창의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특별한 대상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독특한 앵글과 프레임을 구사하는 등 사진 고유의 방식으로 남들과 다른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래야만 회화와 차별화되어, 사진 고유의 영역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사진가란 지위도 유지할 수 있을 터이다.


그 이후 사진의 역사를 보면, 그런 아이디어를 통해서 사진은 어느 정도 (독자적인 지위를 얻는 데) 성공을 거둔 걸로 보인다. 또한 그 때문인지, 요즘도 사진가들 사이에서는 회화적인 수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있고, 사진적인 수법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진에 사람이 직접 손을 대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 즉, 회화적인 방법은 저급하고, 때로 기만적이며, 비겁한 수법이기 때문에 되도록 피해야 하고, 피치 못할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만 사용하되, 가능한 한 숨기는 게 낫다는 식의 인식이 사진가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회화를 사진의 전범(典範)으로 생각한 잘못이 있다 해도, 회화주의의 논리에도 타당성은 있다. <드마시>의 말처럼 예술작품은 사람이 만든 것이어야 하고, 자연이나 대상 자체가 지닌 요소를 그대로 복제한 것만으로 예술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진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작가의 솜씨가 개입되지 않고 현실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베껴 담았다면, 복제품 이상의 가치를 인정할 수는 없다. 물론 이런 의문을 가질 수는 있겠다.


' 사진 촬영 행위를 전적으로 ‘복제’ 라고 치부해 버려도 되는 걸까?'


<드마시>는 카메라에서 출력된 순수 네가티브를 ‘복제품’이라고 했으니, 그는 사진촬영을 단순 복제행위라고 생각했던 셈이다. 사진가들은 이렇게 항변할 수 있을 것 같다.


‘카메라는 나에게 붓이나 연필 같은 도구일 뿐이다.’

‘나는 복제한 게 아니라, 단지 ‘도구’를 이용해서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은 붓과 연필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전혀 차이가 없다. 붓이나 연필을 휘두르듯이, 카메라를 조작해서 사진을 제작하는 것이다. 다만 발달한 도구 덕분에 제작할 때 파격적인 편의를 제공받았으며, 도구가 대신 맡아 처리해 준 부분이 좀 많았던 것뿐이다. 따라서 사진은 사진가의 작품이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당신은 사진이 ‘카메라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싶은가?




하지만 핏대를 세워 자기주장을 펼치면서도 왠지 찜찜한 느낌을 떨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가들은 사진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카메라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물론 그 때 자기 자신이 했던 역할에 대해서도 (그게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일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마 사진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대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를 '약간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고 느낀다. 그 자리에서 당장 카메라를 넘겨주기만 하면, 그 사람들도 자기만큼이나 멋진 사진작품을 찍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런 부정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다.


'사진이 특별하다고 해서, 내가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사진이 아름다운게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사실 스스로도 사진이 제작되는 과정에 자기 솜씨가 얼마나 많이 개입했고 어떻게 기여했는지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사진은 너무 순간적으로 만들어지고, 작업과정의 많은 부분이 자동화되어, 도무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자기가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개입했는지, 찬찬히 따져 보기로 한다.




사진제작에 사진가가 개입하는 과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전, 말하자면 순수 네가티브를 만들기 전의 과정과 그 이후, 즉 카메라에서 나온 필름이나 원본사진을 가지고 최종적인 사진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전자는 ‘대상 선택’, ‘앵글과 프레임 선택’, ‘렌즈나 장비 선택과 카메라 조작’등이다. 사진가는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이런 수단들을 이용해서 사진 결과물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이 얼마나 자기 의도대로 되었고 원하는 표현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는지, 그래서 그런 그의 역할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말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는지 또는 남들은 하기 어려운 일을, 갈고 닦은 기술을 사용해서 구현한 부분이 있는지 등에 대해 검토해 볼 수 있다.


후자는 셔터를 누른 뒤, 즉 카메라가 필름(혹은 디지털 원본)을 만들어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사진가는 촬영과정에서 자기 의도가 잘 반영된 원본을 골라서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서 명암의 농도를 조절하거나 수정할 수 있고, 인화지와 인화방법을 선택하는 등 최종사진에 일정한 변화나 효과를 줄 수 있다. 물론 디지털 사진인 경우는 컴퓨터 앞에서 후보정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셔터를 누른 뒤에 일어나는 일들은 '다분히 회화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현상과 인화과정에서 사진가가 하는 작업들은 그림을 그릴 때 화가가 하는 방식과 크게 차이가 없다. 더욱이 디지털 사진에서는 '거의 같아졌다'고도 할 수 있다. 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지만, 디지털에서는 한계가 허물어지면서, 수정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진 것이다. 그것은 원본사진을 밑그림으로 놓고, 그 위에 색을 입히고 수정하고 변형해서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과 같다.


그에 비하면 셔터를 누르기 전의 행위들은 좀 더 '사진적'인 것으로 보인다. 피사체를 선택하고, 앵글과 프레임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카메라 다이얼을 조절하는 일은 분명히 회화활동과 차별화 된다. 그래서 회화의 범주를 벗어나고 싶었던 현대 사진가들은 ‘사진적인 방법'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촬영 이전에 벌어지는 과정에 주목하고, 거기서 '사진고유의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야만 사진이 ‘사진다워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순수 네가티브‘에 대한 (지나친) 변형은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미술 솜씨를 발휘해서, 사진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보다 필름에 손을 대지 않는 방식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이다. 피사체를 바라보는 사진가의 관점이 중시되고, 그림으로서의 조형미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시각에 더 많은 가치를 인정했다. 사진가들은 저마다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독특한 자기 관점을 사진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들은 관심있게 보지 않는 것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세상에 드러내고,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 보았다.


필름을 전혀 수정하거나 조작하지 않고 오로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만으로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사진을 찍었던 어떤 사진가의 솜씨가 전설처럼 전해지면서 사진가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눈을 가린 채 화살을 쏴서 사과를 맞히는 <로빈 후드>의 활솜씨에 열광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로 작동했다. 눈을 가림으로써 활솜씨가 더 돋보이는 것처럼, 따로 손을 대지 않고도 (회화작품에 버금가는) 멋진 사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 그 사진가의 솜씨를 더욱 빛나게 만든 것이다.


아마도 사진을 회화와 차별화하고 싶었던 그 사진가들의 노력을 통해서, 현대에 와서, 사진이 고유한 표현방식을 인정받는 매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 회화주의가 다시 부활한 것 같다. 디지털 사진이 성행하면서, 나와 같은 아마추어사진가들이 나타난 것이다. 마냥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그 사람들이 애초부터 관심 있었던 건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림을 원했고, 사진이 ‘그림을 그리는 손쉬운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카메라를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촬영 이후 편집하는 과정에서, 사진의 수정과 변형이 간편해지면서, 손에 딱 맞는 무기까지 갖춘 셈이 되었다. 사진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CG(Computer Graphic)가 사진을 대체했다.


사진은 CG를 이길 수 없다. 사진은 어차피 관객 앞에 그림의 형태로 내 보일 수밖에 없는 한편 ‘찍는 사진’에는 일정한 현실적 제약과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CG로 그려진 화려하고 웅장한 그림 앞에서 초라하고 조촐한 사진은 외면당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 CG전문가들은, 필요하다면, 심지어 사진적 수단을 이용한 효과조차 CG로 표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효과를 간편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컴퓨터그래픽 툴들이 그들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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