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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Sep 06. 2023

·사진가의 카메라

사진에서 카메라의 역할과 지위를 바라보는 관점

그는 카메라를 앞세웠지만, 나는 나를 앞에 내 세우려고 기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앞에 나설수록 사진의 본질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는 걸 나는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그는 나와 너무 달랐지만, 덕분에 나는 결국... 진부하고 케케묵은 그 질문을 다시 끄집어내고 말았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나는 ‘멋진 그림을 그려내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진에서 내가 나서서 그리는 그림은 크게 의미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을 다시 해야만 할 터였다.


사진가의 카메라는 작가의 만년필이나 화가의 붓과 다르고, 연주자의 악기와도 같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할 뿐 아니라, 너무나 능동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도구의 역할을 훨씬 뛰어 넘는 무엇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


만약 사진에 기여한 공헌도(貢獻度)로 다툴 일이 생긴다면,

사진의 이미지 그 자체는 ‘카메라의 공’으로 판정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솔직하지 못한 사진가는 카메라의 존재감을 애써 약화시키고 싶어 할 것이다.


‘카메라는 그저 도구일 뿐이야.’


자기가 부각되려면 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명동거리


그는 만날 때마다 다른 카메라나 렌즈를 들고 나타났다. 신제품 출시만 기다리는 얼리어댑터는 아니었다. 제품이 시중에 풀리고 시간이 충분히 지나서 세간의 평이 정리되고 가격이 안정된 뒤에 구입했다. 그 보다 그는 명품 장비를 중고로 사는 일이 더 잦았다. 카메라 숍을 한 군데 단골로 정해 놓고, 중고제품을 사서 얼마간 써 보고 바꿔 치기 하는 식이었다. 돈이 많이 들지도 않고 도리어 돈을 벌 때도 있다고 그가 말했다. 특히 운이 좋아서, 희소성이 있는 렌즈를 싸게 사면, 몇 개월 사용한 뒤에 오히려 더 비싼 가격에 되파는 일도 종종 있다는 것이었다.


렌즈는 주로 오랜 세월 검증되어 명기(名器)로 알려진 물건들을 구입했다. 그 중에는 AF(자동초점기능)가 안 되거나, 노출 값이 나타나지 않는 수동렌즈도 있었다. 그런 렌즈는 그 렌즈만이 가진 고유한 표현력이 있거나 화각과 성능에 비해 작고 가볍다는 등의 장점이 있었다. 그는 주로 (나로서는 잘 느낄 수도 없는) 렌즈마다 다른, 그 광학적 표현력에 매료되어 렌즈를 샀고 바꿈질을 자주했다. 때로는 카메라 셔터소리에 예민하게 굴면서, 오직 셔터소리 때문에 카메라를 선택할 때도 있었다. 빠르고 정확하지만, 조용하고 부드럽게 작동하는 명품의 기능을 흠모(?)하는 한편, 오래된 골동품 같은, 고전적인 외형에 매혹되기도 했다.


[ 사진찍는 도구의 기능을 넘은 오감충족의 만듦새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정교한 기계의 외형에 가린 메커니즘의 정밀함도 빼 놓을 수 없다. 혹한의 기온에도 라이카는 부드럽게 작동된다. 금속이 맞물리는 기어 연결부위와 레버 축 렌즈 회전부와 바디에 연동되는 굴대에 칠해진 고성능 윤활유 때문이다. 추운 지방에서 사는 순록의 목덜미 부위 기름을 사용하기도 하고, 작동부에 따라 고체 윤활제인 흑연이 사용되기도 했다. 카메라의 오작동으로 인한 실패를 방지하기 위한 완벽지향의 제품철학이 깔려 있다. (윤광준. 내가 갖고 싶은 카메라 p33) ]


그는 카메라와 렌즈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서 새로 구입한 장비의 놀라운 특성을 자랑스럽게 설명해 주곤 했다. 나는 사진장비를 구입할 때 그의 조언을 듣고 참고했지만, 평소 그가 하는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렌즈가 가진 표현력이나 카메라 셔터소리를 포함해서, 작동 시 느껴지는 감각적인 부분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런 것뿐 아니라, 나는 ‘색감’이니 ‘보케’니 조리개 날의 개수에 따라 달라진다는 ‘흐려지는 느낌’ 같은 것에 조차 크게 관심이 없었다. 카메라의 빠르고 정확한 기계적 성능은 필요했지만 절실하지는 않았고, 특히 셔터 소리나 조작감 따위에 관심을 가져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사진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내가 고심해서 찍어낸 아름다운 사진(그림으로서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뭘 제대로 볼 줄 몰라서 그런 것인지 무감각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고, 그가 자기 견해를 언급한 적도 없었다. 그냥 관심이 다른 곳에 가있는 것이지 싶다. 한편 카메라가 렌즈 앞의 장면을 '그냥 찍어 놓았을 뿐'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사진을 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거기 내가 사진에서 기대하는 아름다운 빛이나 색과 톤으로 사람의 미감을 현혹하는 회화적 구성미 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 함께 찍은 사진 두 장을 나란히 놓고 일부러 비교하지 않는 한, 그가 주장하는 '장치의 특성'도 나는 구별하지 못했다.


특히 그는 (내가 그토록 예민하게 구는) ‘좋은 빛’에도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촬영하러 나갈 때, 그날의 날씨에 민감하게 굴지 않았던 걸로 봐서 그런 것 같다. 그와 반대로 나는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는 촬영방향과 촬영장소를 결정했다. 맑은 날은 시내 길거리에 가서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구성미에 치중해서 사진을 찍었고, 흐린 날은 공원이나 교외로 나가서 묘사 위주의 풍경사진을 주로 찍었다. 좋은 빛을 고르는 데 까다로웠던 탓에 날씨에 따라 자주 희비가 엇갈렸다.


사진활동의 중심에 빛이 있었던 나와 달리, 그는 그런 부분에 크게 구애 받지 않았다. 뿐 아니라 패턴을 포착한다거나 명암의 대비를 통한 단순한 프레임 구성, 피사체가 지닌 질감과 아름다운 컬러 등은, 사진에서 회화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런 부분을 중시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런 게 사진에서 대체 왜 중요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면서 의아해 하기까지 했다. 빛과 구성미가 아니라면, 사진에서 그가 즐기고 있는 게 대체 무엇인지 나는 의아하기만 했다.


그는 필름 카메라도 사용했다.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시내로 길거리촬영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DP점에 들릴 때가 있었다. 전에 맡긴 사진을 찾고 그 날 찍은 필름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인터넷 사진동호회에 가입했지만, 그는 좀처럼 게시판에 사진을 올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때가 아니면 그의 사진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사진을 찾은 뒤에 같이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 때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봉투 속 사진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내가 보기에, 그 사진들은 사진가가 개입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 그야말로 '카메라가 찍어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의도 같은 것은 사진에 거의 보이지 않았고 구성미를 위한 사진기법이나 트릭 같은 게 작용한 자취가 없었으며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서 빛과 피사체를 고른 흔적마저 볼 수 없었다. 사진속 장면은 특별하지 않았고, 사진 그 자체에서도 미적인 요소를 발견하기 어려웠으며, 거기 있는 것은 거의 눈에 보이는 실제현실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지금 내가 사진에서 중시하고 있는 것들이 전혀 중요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단숨에 알아챘다. 예를 들어, 나는 낮에 카메라를 들고 길거리에 나가면 주로 명암이 대비되는 단순한 구성을 얻으려고 애를 썼고 그런 조건을 갖춘 대상과 장소를 찾느라 고심했다. 컬러가 세련되고 좋은 빛이 깃들어 있는 피사체를 탐색했으며 매혹적인 패턴을 찾아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역동적인 사진을 찍기 위해 앵글을 바꾸었고, 사진의 아름다움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프레임에서 빼내기 위해 앞으로 다가가서 프레임을 좁히거나 뒤로 물러서서 넓게 담아 보기도 했다. 걸음을 옆으로 옮겨서 앞의 물체로 뒤에 있는 물체를 가려보기도 하고, 햇빛을 등지고 촬영하다가는 뒤로 돌아서서 역광에서 바라보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물론 전부 '구성미의 관점'에서 취하는 행동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진에서는 그렇게 (사진의 구성미를 위해서) 애를 쓴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에 만났던, 실제현실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찍혀 있을 뿐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사진은 한 마디로, 그저 '카메라가 해놓은 일'일 뿐이었다. 아마 그도 사진에 표현되는 아름다움에는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도 역시 아마추어였고 보도사진이나 다큐멘터리 분야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단지 그는 장치의 표현력에 집중했고, 내가 중점을 두었던, 구성미나 회화적 표현 같은 인위적인 부분은 도외시했거나 (최소한) 경시했던 것 같다.


장비가 가진 능력(?)을 ‘존중했다’는 점에서 그는 나와 달랐던 셈이다. 실제로 그는 오직 카메라가, 혹은 렌즈가 사진을 얼마나 잘 찍어내는 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피사체를 선택하거나 촬영조건을 바라볼 때도 항상 그런 관점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좋아할만한(?) 대상에만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예를 들어, 명암의 대비가 극단적으로 강하다거나 반사광이 번쩍거리는 물체 등은 피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광경을 발견하면 환장하고 달려 들었다.


나는 장치의 기능에 대해 무관심했고, 그가 찍은 사진을 보았을 때 요점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진이 찍히는 과정에서 카메라가 특별한 어떤 공헌을 했을 지도 모르고, 거기 그 렌즈의 고유한 특성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도대체 카메라가 어떤 특별한 역할을 했고, 사진에 사용된 렌즈의 표현이 실패인지 성공인지조차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나는 오로지 ‘사람의 역할’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아무튼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카메라가 곧 사진이다.'




[ 릴리즈의 느낌, 셔터소리의 여운, 되감기 레버가 없어도 라이카 M-E는 틀림없는 M시리즈 라이카이다. 거리계에 따른 포커싱은 디지털에서도 확실히 촬영의욕을 높여주며 그레이 컬러의 상판은 실용기 다운 인상을 보여준다. (이나카키 노리후미. 죽기 전에 꼭 한 번 써보고 싶은 최고의 카메라 100. 에이출판사 편역) ]


그에게 있어서 카메라는 그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명작(名作)은 반드시 명기(名器)로부터 나온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성능 좋은 장비가 무엇인지 알았고, 그 특성을 파악해서 거기 맞춰서 물건을 사용할 줄도 알았다. 그에게 있어서, 사진찍기는 명백히 카메라의 순발력과 빠르고 정밀하고 정확한 작동기능을 즐기고 렌즈의 묘사력을 탐구하는 과정이었다. 그게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주된 부분이고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사진은 카메라가 찍는 것이고 사진가란 장치가 자기(?) 고유의 표현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옆에서 거드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단지 촬영장소까지 카메라를 들어 날랐고, 사진찍기 좋은 위치에 세웠고, 렌즈가 피사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카메라를 손에 쥐고 '그 위대한 자동 그림제작 공정'이 작동될 수 있게 셔터를 눌러 주었던 것뿐인 셈이 되었다. 그리고는 카메라가 만들어낸 작품을 (넋을 잃고)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사진가의 표현능력이나 솜씨 따위는 다만 ‘카메라 장치의 활용이란 명제 안에 포함된, 부수적인 문제일 뿐’인 게 틀림 없었다. 사진에서 핵심은 카메라와 렌즈라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하긴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진표현의 아름다움'은 일반적인 그림솜씨와는 분명히 다른 '사진 고유의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비록 그의 사진에서 요점을 알아 내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나는 그와 그의 사진을 약간 이해할 수는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자, 나는 왠지 그 사진들이 나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오직 '거기서 배제된 것들에만 집착해서 사진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진을 보면, 평소에 내가 사진에서 ‘가치’나 ‘의미‘라고 생각했던 것들 혹은 사진가의 ’기량‘이나 ’실력‘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우습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와 그의 사진은 그런데 쏟아 붓는 나의 열정과 노력들을 전부 '하찮은 짓'이라며 나를 몰아 붙이는 것만 같았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진짜로 중요한 게 아니며, 사진에서 정작 중요한 건 '너의 표현력'이 아니라 '카메라나 렌즈의 표현력'이라는 식으로 주장했다. 예술성이니 작품성이니 하는 관점은 물론 입 밖에 꺼낼 가치조차 없는 개념이었다. 한심하다는 투로,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가 틀린 주장을 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반박하려면...

이미 오래 전에 접어두었던 그 질문을 도로 꺼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그건 정말이지, 지겹고도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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