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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Sep 09. 2023

·사진, 장비유혹에서 벗어나는 방법

만년필과 카메라

열정에 들떠있을 때는 누구나 좀처럼 ‘열정이 사라진다’는 생각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김이 새겠지만) 열정은 반드시 사라진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줄어드는 건 거의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봐야 된다.

지금은 들떠서 간절히 원하지만, 그 간절한 마음은 조만간 가라앉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니 그 때를 대비해서 빠져나갈 퇴로도 미리 생각해 놔야 한다.

깨끗하게 끝내고 싶지만, (투자한 게 아까워서) 질질 끌려 다니는 처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르는 데,

별로 즐겁지도 않고, 더 이상 의미도 느낄 수 없는 일을 계속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주변에서 그런 분을 많이 봤고, 내 사진생활에도 어느 정도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것저것 집적대느라 보유하게 되었던 장비들 중, 몇 해나 손도 대지 않은 잔재가 너무 많다.

눈곱만한 회의도 없이, 오랜 시간 꿋꿋하게, 확신에 찬 얼굴로 자기 일을 해 나가는 분들이 나는 몹시 부럽다.

아무튼, 그러자면, 먼저 ‘영원한 건 뭘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겠다.


용설란

한 때 만년필에 집착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심각한 악필이다. 요즘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지만, 남들에게 글을 써 보일 때마다 미안함을 느낀다. '악필'이라고 해도, 읽기에 힘들 뿐, 나름대로 세련되고 멋이 있는 필체를 가진 사람들도 많다. 그런 분들의 악필에서 나는 일종의 (늙은 의사가 손으로 갈겨 쓴 처방전처럼) 짓궂은 자부심마저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 글씨는 읽기 힘들 뿐 아니라, 세련미가 전혀 없이 미숙한 티가 났고, 난잡하고 조잡스럽기만 했다. 같은 문장 안에서도 글자마다 필체가 달라지는 등 일관성도 없었다.


글씨는 아무리 연습하고 오래 써도 좀처럼 몸에 배지 않는 것 같다. 처음 키보드를 칠 때, 자판 위치를 의식하며 더듬더듬 치는 것처럼, 매번 ‘글씨를 어떻게 쓸까?’ 생각하며 쓰는 지도 모른다. 급한 성격 탓이거나 아니면 손과 손가락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거라며, 내 나름대로 진단도 해보았다. 아니면 뇌에서 자율신경을 조절하는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겠다. 몸에 익혀서 자동화된 행동을 하는 중에도, 의식이 수시로 개입해서 각성을 유도하는 바람에, 익힌 대로 발휘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이었던지, 나는 유난히도 필기구에 집착했다. 연장 탓을 했다기보다, ‘좋은 필기구를 마련한 다음, 이제부터 심기일전해서 글씨를 잘 써보겠다’는 식의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필기구 중에서도 ‘좋은 만년필’을 찾는 일로 한 동안 몸살을 앓았었다. 아마 만년필이 필기구 중에서도 가장 값이 비싼 물건이고, 필기구의 ‘대표 격’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좋은 물건을 사서 손에 익힌 다음, 애정을 갖고 오래도록 사용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명칭 그대로, ‘오래 쓰는 물건’이라, 익숙해지면, 더 잘 쓸 수 있고, 애착이 생길 것도 같았다. 아무튼 허영심 때문이라든지, 장식용이나 소장하려고 좋은 만년필을 찾은 건 아니었다. 스타일도 '손에 쥐기에 편한지'와 같이 기능적인 면만을 고려했다. 중요한 건 기능이었고, 그 핵심은 역시 ‘필기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물감 없이 종이 위를 내달리면서 멋지게 글씨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만년필의 ‘필기감’은 원칙적으로 펜촉에 의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펜촉의 재질이나 굵기나 모양이 전부는 아니다. 필기감은 종이와도 관계가 깊어서 종이 재질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펜촉이 종이 위를 긁을 때, 너무 뻑뻑해도 문제지만, 마찰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매끄러워도 쓰는 느낌은 좋지 않다. 무엇보다 종이 재질에 따라 펜촉에서 흘러나오는 잉크 양이 잘 조절되어야만 좋은 필기감을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분 흡수가 적은 매끄러운 종이에 쓸 때는 잉크가 조금만 흘러나와도 글씨가 부드럽게 써진다. 그러나 수분을 많이 흡수하는 종이에 쓸 때는 흘러나오는 잉크 양이 모자라면 뻑뻑해서 펜이 잘 나가지 않는다. 따라서 쓰는 동안 적당한 마찰력을 유지하려면, 종이의 수분 흡수력에 맞게, 적당량의 잉크가 계속해서 공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만년필은 글을 빨리 쓰면 잉크 공급이 따라오지 못하는 반면, 천천히 쓰면 잉크가 너무 많이 흘러나와서 질척거리는 바람에 적당한 필기감을 제공하지 못했다. 나는 특히 그 부분에 집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종이부터 제대로 선택해야 옳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고, 만년필 탓만 했던 것 같다.


글을 쓰다가 (뭘 읽거나 생각에 잠기는 바람에) 너무 오래 쓰지 않으면 펜촉의 잉크가 마르는 현상도 문제였다. 그런 현상은 품질이 좋지 않은 잉크를 쓸 때 더 심했고, 촉이 노출된 형태에 따라서도 약간 차이가 있었다. ‘파카45’는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만년필이었지만, 펜촉이 드러나 있어서 잉크가 쉽게 말랐다. 그런 점을 보완해서, 촉의 대부분이 감춰지고 끄트머리만 뾰족하게 나온 모양을 한 물건이 ‘파카21’이었다. 그러나 잉크가 덜 마르는 효과가 별로 신통치는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펜촉이 종이 위를 긁고 지나가는 그 감촉에 점점 예민해져 갔다. 물건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서 강박증세로까지 발전했다. 글을 쓸 때 필기감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본연의 일에는 집중을 잘 못했다. 심지어 펜촉을 빼서, 그 한가운데 갈라진 틈의 넓이를 조절해서 다시 써보는 등 엉뚱한 짓도 자주했다. 다양한 잉크를 사서 농도와 마르는 속도를 재고 지꺼기가 남는 정도를 비교하는 등, 여러 가지 실험도 해보았다.


만년필을 자주 바꿨고, 값이 비싼 명품 만년필도 여러 자루 구입했다. 원활한 잉크공급, 쓰지 않는 동안 잉크가 마르는 문제, 펜촉의 이상적인 굵기와 유연성 등을 따지면서, 불과 1~2년 사이에 안 써본 명품 만년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값이 싼 보급형 만년필들은 대부분 새것을 샀지만, 비싼 것은 중고로 사서 썼다. 중고 만년필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사용하는 문자에 따라서 만년필 촉의 형태가 달라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몽블랑이나 쉐퍼, 워터맨, 파카 같은 서구 제품들은 영문을 필기체로 쓰기 적합하게 펜 끝이 넓적하게 둥글고 굵은 편에 속했다. 그런 만년필은 획이 많고 각진 모양을 한, 한글이나 한문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서양인의 체격에 맞춰져 있어서 펜대가 너무 굵은 것도 문제였다. 당시에는 국산물건이 요즘 같지 않아서, 한글을 쓰기에 적합한 만년필은 대만제나 일본제였다. 하지만 미제와 독일제 등 서구의 공산품이 압도적으로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나는 ‘명품’이라는 이유로 그 제품들을 대부분 사서 써봤지만, 완벽한 물건은 없었다. 특히 어떤 종이에나 두루 잘 맞는 '만능 만년필'은 없었다. 많은 시간과 돈을 소모했지만, 나는 결국 마음에 드는 만년필을 찾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적인 만년필은 현실에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중요한 건 명품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물건'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내가 세상의 모든 만년필을 전부 다 써보고 비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적인 필기구‘를 만년필에서 찾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종이재질이 달라지면 필기구도 바뀌는 게 옳았고, 글을 쓰는 상황에 따라서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필기구가 있을 터였다. 예를 들어, 쓰는 시간보다 펜을 들고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 때는 아무래도 만년필은 적당한 필기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쓰려고 할 때마다 펜촉의 잉크가 말라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는 볼펜이 더 낫다. 물론 당시에는 요즘처럼 볼펜의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 집착으로 인해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보고 정신적으로는 지친 나머지, 나는 결국 만년필을 전부 버리고, 1회용 펜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로는 볼펜이 쓰기에 좋았고, 상황에 따라 수성펜이나 사인펜이 유용한 경우도 많았다.


만년필에 집착했던 그 기간은 엄청나게 소모적이었다. 돈과 시간만 버린 게 아니었다. 학생 때여서, 필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리포트도 써야 하는 데, 만년필에 신경 쓰느라 도대체 뭘 집중해서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은 게 있다면, 내가 물건에 쉽게 집착하는 성격이고, 그런 집착이 완전히 소모적일 뿐 아니라 매우 불합리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분인 것 같다.


옥잠화


디지털 카메라


오디오 마니아들이 ‘소리에 예민하다’는 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그분들은 내가 구별하지 못하는 미세한 음향 차이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좋은 음향'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아주 높을 것 같다. 마치 공연장에서 듣는 듯한 생생한 음향에, 나는 혼이 빠지고 눈이 휘둥그래져도, 그 사람들은 흠을 지적하면서 하찮아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리에 대한 감각의 민감도를 높여서 고도화된 감각을 충족시키려는 오디오 마니아들의 노력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좋은 오디오 장치에 집착할 뿐 아니라, 그 밖에도 다양한 노력들을 하는 것 같았다.


오디오 시스템에 안정적인 전압을 공급하려고, 집에 들어오는 전선에 따로 변압기를 설치하고, (외국의 경우지만) 심지어 집 옆의 전신주를 바꾸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또한 마니아들은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진공관 앰프에 지금도 열광한다고 한다. 그건 2차 세계대전 당시, 잠수함에서 음파를 분석할 목적으로 개발된 기술을 요즘도 따라가지 못해서라고 누군가(사진을 찍다가 오디오에 심취한 내 사진동무다) 내게 말해주었다. 아마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고 디지털 화가 진행되면서 진공관에 대한 연구/개발이 미진하거나 중단된 탓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막연한 그 ‘아날로그의 맛‘ 때문일 지도 모른다.


사진 분야에도 비슷한 일이 있는 것 같다.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듣다가 오디오에 심취하듯이, 사진을 시작했지만 어느새 카메라에 심취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일이든지, 발전의 밑바탕에는 감각이 있고, 감각이 뒤처지면 남들보다 잘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감각을 따라 가다 보면, 자연히 발길이 그 쪽으로 향할 수도 있는 문제다. 기량이 높아지면 값이 더 비싸고 좋은 장비를 원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한편 요즘도 여전히 필름사진에 집착하는 그 쪽 마니아들도 있다. 나는 그 이유가, (한계가 분명한) 디지털의 속성이 못 마땅해서인지 혹은 아날로그에 대한 막연한 향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날로그가 좋은 건 다른 무엇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실물)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디지털 사진은 장치 속에서 전기신호로만 존재한다. 그러다가 (컴퓨터 알고리즘에 의해) 때로는 모니터에 나타나고 때로는 프린트 되어 종이 위에 나타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실체를 감각하거나 정의하기에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다.


나는 그 동안 카메라를 여러 대 써왔고, 카메라 메이커도 제법 여러 차례 바꿔왔던 것 같다. 케논과 펜탁스와 올림푸스와 니콘과 후지필름을 거쳐서, 다시 한 동안 니콘을 쓰다가 지금은 시그마와 소니社의 카메라들을 쓰고 있다. 현재 SLR카메라 1대와 미러리스 1대 그리고 콤팩트 카메라를 두 대 가지고 있다. 물론 화각별로 다양한 렌즈들도 갖고 있다. 지금 이렇게 목록을 훑어 가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카메라 마니아’로 비쳐지지 않을까? 아니면 지독한 변덕쟁이로 보이거나.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카메라에 대한 이 정도 이력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무려 20여 년 전의 일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일반에게 상용화되기 전부터 써왔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없이 그 물건의 발전과정에서 일종의 ‘과도기’를 거치게 되었다. 카메라가 전자제품으로 변하면서, 산업이 발전하는 속도에 맞춰서, 본의 아니게, 기기를 업그레이드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렌즈를 전부 새로 마련해야 한다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메이커도 계속해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케논은 2000년도 초에 300만 화소짜리 디지털SLR카메라인 ‘케논D30’을 출시했다. 그리고 1~2년쯤 뒤에 니콘이 600만 화소짜리 ‘니콘D100‘을 출시했다. 그밖에 다른 메이커들도 비슷한 시기에 대중성이 있는 보급형 물건들을 내 놓았다. 니콘D100이 내가 가졌던 최초의 디지털SLR카메라였다. 그 전에 나는 이미 콤팩트형 디지털카메라를 여러 대 쓰고 있었다. 코닥 등 몇몇 업체에서 디지털 SLR카메라를 출시했지만,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서 대중화 되지는 못했다. 아마 합리적인 가격으로 디지털 SLR카메라가 출시되기 시작한 건 그 때였을 것이다. 나도 그랬듯이, 많은 사진애호가들이 당시에 처음으로 디지털 SLR카메라를 구입했다.


이후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신제품이 출시되었고, 나도 계속해서 카메라를 바꾸었다. 변덕 때문이거나 취향이나 유행이 바뀌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관심 있는 사진 분야가 바뀌어서 다른 카메라가 필요했던 것도 물론 아니다. 오로지 옛날 물건은 금세 구닥다리 신세가 되어, 도저히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기능의 핵심이 되는 디지털 센서와 전자적 기능들이 맹렬하게 발전해 가던 시절이었다. 메모리와 같은 주변기기는 물론 디지털 환경 자체가 빠르게 변해서 일종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 때였다.


설사 어떤 제품이, 비록 한 때 ‘명기’라고 알려졌다고 해도, 느려터진 300만 화소짜리 디지털SLR카메라를 계속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훨씬 빠릿빠릿한 1200만 화소짜리 카메라가 더 싼 값에 출시되었던 것이다. ‘명기’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도 없었다. 디지털카메라는 ‘컴퓨터 화’되었고, 윈도우가 나왔는데 도스만 고집할 수는 없는 식으로, 먼저 나온 것들은 계속 도태되어, 빠르게, 과거 역사 속 골동품 신세가 되어갔다. 성능은 말도 안 되게 높아지는 한편 가격은 터무니없이 싸져서, 물건을 바꾸는데 거의 망설일 이유가 없기도 했다.


디지털 카메라 발전의 역사가 어느 정도 완숙기에 접어든 뒤에도, 나는 계속해서 카메라와 제조사를 바꾸기는 했다. 아마 그건 주로 사진 품질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던 것 같다.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나는 늘 사진품질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디지털스럽다‘고나 할까? ‘너무 명확하고, 경계가 분명해서 날카로운 느낌과 왠지 가벼워 보이는, 그런 분위기‘였다. 좀 더 연구개발이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부분이 디지털 사진이 지닌 특성이자 한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디지털사진의 물질적 성분은 ‘디지털 방식으로 기록된 전하(電荷)’이다. 렌즈를 통과해서 사진기 안으로 들어온 빛에는 외부세계의 모습이 반영된 시각정보가 담겨있다. 빛이 센서에 닿으면, 빛 에너지가 전기에너지로 변환되고(광전변환(光電變換)이라 한다) 명암과 색채정보가 전하 형태로 기록된다. 디지털센서는 축적된 신호전하를 읽어서 자기적 성질을 띤 디지털 정보로 바꾸어 메모리에 담는다. 컴퓨터는 그것을 읽어 들여, 아날로그 형태의 시각이미지로 전환해서 모니터나 종이(혹은 프린터)로 내보낸다. 그게 바로 (디지털)사진이다.


숫자로 표현하는 방식에는 시작과 끝이 정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면, 흰 종이 위에 쓴 검은 글씨는 명암의 단계가 두 개뿐이다. 흑과 백, 두 단계의 명암만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간단한 만화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회색을 추가한다면 3단계로 늘어나서 그림을 더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디지털사진은 물론 명암을 충분한 단계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값을 숫자로 정의하기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 비록 수백 단계 또는 수만 단계여서, 인간의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어서 아무 문제가 없기는 하지만, 화학반응이나 물리법칙이 작용하는 이른바 ‘물질’은 아닌 것이다.


한편, 어떤 문제에 예민해져서 끝없이 집착하는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 한계를 감지하게 되는 것 같다. 촬영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양상이 달라서, 그 차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겠지만, 감각은 알아 챌 수는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기분문제일 뿐’일 수도 있겠고 그게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불만을 느끼기 시작하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핑계를 대면서 카메라 바꿈질을 계속하려고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디지털기기를 사용하는 한, 그런 의심은 계속될 것이고, 새로운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욕구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나는 카메라(바디)에는 그다지 심하게 집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라이카와 같은 명품카메라에 꽂히지 않았고, 한때 중/대형카메라에 잠깐 관심을 가졌지만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필름 포맷이 클수록 스케일이 크고, 집중력이 좋고 실감나는 영상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걸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자동화 기능이 강력하고 기계적 성능이 뛰어난 소위 플래그쉽 제품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나는 카메라에서 주로 화질(사진의 품질) 문제에 집착했지만, 카메라를 고르는 이유가 비단 화질에만 있는 건 아니다. 기회에 관한 문제도 있다. 그러니까 성능 좋은 카메라는 사진가가 실수 없이 기회를 잡을 수 있게 해준다. 기계적 전자적 성능이 높을수록 더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장비를 필요로 하는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장치가 뭘 해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뭘 할 수 있을지에 더 관심이 많았고, 성능이 좋은 장비는 그만큼 크고 무겁기도 했다. 어쩌면 기질적으로, 나는 거창하게 뭘 하는 것처럼 티를 내면서 사진을 찍고 싶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노랑어리연의 새싹


카메라 렌즈


뭐니 뭐니 해도 사진장비의 핵심은 역시 카메라 렌즈다. 사진은 렌즈로 비춰본 세상의 모습이고 좋은 렌즈라야 품질이 좋은 사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지센서를 빼면, 카메라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셔터장치가 달린 ‘깡통’에 불과하다. 게다가 요즘은 그 붙박이 반도체 센서덕분에, 디지털 카메라 바디는 거의 소모품처럼 되어버렸다. 더 발전된 센서가 나오면 (전에는 필름을 바꿔 끼우면 되었지만) 이제 카메라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렌즈는 지금도 거의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물건이다.


그래서 ‘기왕이면 렌즈는 좋은 물건으로 마련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는 타당성이 있다. 오래 쓸 물건이고 어차피 업그레이드할 거라면 처음부터 ‘쓸 만한 물건’으로 시작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은 별 필요가 없다 해도, 사 두면 나중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렌즈만은 그런 관점에서 물건을 고르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값이 너무 비싸거나 덩치가 큰 렌즈는 거의 사지 않았다. 그런 렌즈는 대부분 일정한 촬영용도에 특화된 물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인물사진을 좋아했더라면 밝은 단렌즈에 집착했을 것이고, 새 사진이나 스포츠 경기 촬영에 빠졌다면 대물렌즈 쪽의 구경이 큰 망원렌즈를 마련했을 것이다. 그런 사진들은 대부분 렌즈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렌즈 표현력은 사람의 촬영기술이나 포토샵 실력으로 흉내를 낼 수도 없다.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면 반드시 좋은 렌즈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류의 사진을 전혀 찍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나는 다행히 흉내나 내는 정도였고 심하게 빠져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 때, 달리는 경주마를 촬영하러 과천경마공원에 드나들었을 때, 최대 화각이 200mm인 줌렌즈에 2배 컨버터를 끼워서 400mm 화각을 흉내내보는 선에서 멈췄던 건,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남들이 대구경 망원 단렌즈(천만 원이 넘었다)로 찍은 기막힌 사진들을 눈으로 보고 감탄하면서도 거기 혹하지 않았던 건, 내가 경마사진이나 개 경주 사진 같은 데 그리 오래 관심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진은 장치에 매우 의존적이어서, 일단 발을 들여 놓으면 누구라도 극심한 장비병을 앓게 될 것이다. 나는 자주 함께 어울리던 그 사진가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했고 발을 들이기 전에 그 세계에서 빠져 나왔다.




렌즈는 빛을 포착해서 필름이나 센서에 그 정보를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 한데 그 과정에서 다양한 기술적인 문제들이 발생한다. 기본적으로는 착란원의 문제를 비롯해서, 색수차, 구면수차, 비네팅, 코마수차, 비점수차, 상면만곡 등이 해결과제들이다. 고급렌즈는 그런 문제들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해결해서, 깨끗하고 정확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물론 완벽에 가까워질수록 경통 안에 들어가는 렌즈 매수가 늘어나고, 구경이 커지고, 사용되는 렌즈의 재질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어떤 왜곡현상을 하나 해결하기 위해 매수를 늘리면 렌즈를 통과하는 빛이 부족한 현상이 생기고, 그래서 빛을 잘 투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렌즈 구경을 크게 하고 투명한 재질의 렌즈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로인해 점점 늘어나는 무게와 부피에 대해서는 그다지 효과적인 대책이 없어 보인다. 렌즈는 근본적으로 아날로그적 물질이고 광학이라는 물리법칙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극단적인 소형화는 거의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가능하게 되었지만 렌즈 자체를 디지털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측정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왠지 디지털 시대인 요즘 나오는 렌즈들은 과거 필름시절에 쓰던 렌즈들에 비해 훨씬 더 크고 무거워진 것 같다. 아마 카메라의 자동화 기능이 발전하면서 사용된 부품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다. 디지털 사진은 사진 품질을 컴퓨터 모니터 상에서 즉시, 그리고 상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을 실제크기로 펼쳐서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과거 필름시절에는 루뻬로 필름을 관찰하거나 대형인화를 하는 경우에나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다소 전문적인 영역이라 일반인들은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고 아마 대부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실제크기로 눈에 보이는 상태는 곧 그 사진이미지가 가진 품질상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누구라도 품질관리자가 되어 사진품질을 바로 볼 수 있는 셈이다. 그 때문에 렌즈 성능은 더 발전했을 것이다. 아마도 더 정밀해지고 기능이 더 강력해졌을 것 같다. 흔들린 상태나 낮은 해상도로 인한 열악한 화질 등이 눈에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수록 무게는 더 무거워지고, 덩치가 점점 커지고, 값도 더 비싸진 것이다. 앞으로도 디지털 센서가 발전해서 사진의 해상도가 더 높아지면 렌즈의 해상력도 따라서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값이 싼 렌즈는 물론, 앞에서 들먹였던 여러 광학적 문제들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 물건들일 것이다. 조리개를 조이지 않으면, 일정 수준의 해상도가 나오지 않아서, 하는 수없이 최대개방 조리개 값을 작게 만들었을 것이다. 때로 사진에 색수차가 생길 수도 있으며, 색감이 마음에 안 들거나 보케 모양이 예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렌즈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 중 상당수는 외부조건에 따라 생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부분이다. 심지어 어떤 왜곡현상은 사진 쓰임새에 따라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렌즈를 구매할 때 그런 측면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주로 조리개를 조여서 사용할 것이라면, 굳이 최대개방조리개 값이 큰 렌즈를 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마 빛이 풍부하고 부드럽게 확산되는 이상적인 조건에서 촬영한다면, 어떤 렌즈를 써도 좋은 사진이 찍힐 것이다. 성능과 화질만 생각하기 쉽지만, 가격과 편의성도 중요한 변수다. 특히 인터넷에 올려서 모니터로 보여주는 사진이 대부분이고, 크게 인화해서 벽에 걸어두고 볼일이 많지 않다면 뛰어난 해상력을 가진 비싼 렌즈는 ‘과잉이나 낭비’가 될 수도 있다.




설득과 회유


때로는 좋은 장치를 가진다는 게 곧바로 유능한 사진가가 되는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 나는 사진의 그런 면이 다소 부조리한 것 같았다. 대구경 망원렌즈로 촬영한 매혹적인 인물사진을 보면 부럽기는 하지만, 부러운 건 그의 재력이지, 솜씨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장치가 만들어낸 '과학적 현상'들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경탄할 수는 있겠지만, 그 부분을 자기 솜씨나 감성이 실린 표현력과 결부시키면서 자부심까지 느낀다면, 그건 조금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실제로 사진에서는, 장치의 기능이나 성능에 따라 성과가 좌우되는 일이 분명히 있었고, 나는 특별한 장치를 가졌다고 해서 특별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인정받는 현상에 반감을 가졌것 같다. 한데 이런 부분은 ‘지위’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다. 특별한 지위에 있기에 특별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면(그 뿐이라면), 그런 부분 역시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우쭐댈 일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여행사진가나 보도사진가가 놀라운 사진을 찍었다면, 그 분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뿐'이라는 식의 의심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변변치 않았지만, 당시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부분이 영향을 줬던 것 같다. 나는 그림(繪畫)이 잘 맞지 않아서 사진을 선택했거나 아니면 사진의 방식이 좋아서 사진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이 회화의 방식을 차용해서, 그림과 유사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달갑지 않았다. 또한 그와 함께, 장치를 이용해서 묘한 그림을 그리려고 드는, 그런 사고방식 역시 탐탁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나는 사진은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을 굳혀갔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진은 세상을 담는 일이지, 뭘 만들어내는 일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세상을 담는 일에 굳이 특수한 장치를 써서, 왜곡하거나 과장을 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그래서,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데 뛰어난 고성능 렌즈들이 내 장바구니에서 저절로 제외되었다. 또한 세상을 담으려면 자주 다녀야 하고 간편하고 몸이 가벼워야 집중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 사진에는 작고 간편한 렌즈가 유용했으며, 고맙게도 그런 렌즈는 대부분 값이 쌌다.


중요한 건 ‘내가 눈으로 본 것’이고 ‘본 것을 초월하는 것’에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러다 보니 저절로 ‘순수 스트레이트 사진’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사진의 아름다움은 '세상의 아름다움'이어야지 '만들어진 아름다움'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그래서 현실에서 체험할 수도 없는 것을, 오직 미(美)의 관점에서 만들어낸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거기서 어떤 의미도 생각해내기 어려웠다. 그럴 거라면 나는 그냥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판다누스


그러나 완전히 다 까놓고, 진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순수사진을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고급스런 사진장비에 달린 가격표를 보고 기가 질렸고, ‘판단을 잘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열정이 사라져서 (사진 또는 어떤 종류의 사진에서) 발을 뺄 때를 예상하고, 본능적으로 대비했을 것이다. 만년필에 흥미를 잃었을 때 그랬고, 그림을 포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변심해서 포기해도, 물건은 그대로 남았다. 변덕이 생길 때마다, 열정이 남긴 찌꺼기가 쌓였고, 매번 처치하느라 골치가 아팠고 손실도 컸다.


그 때 너무 큰 대가를 치르지 않고 빠져나가려면, 가볍고 단출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고, 그런 자세를 지켜나갈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로, 뭘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성가신 작업과정이 요구되고, 특별한 장치도 필요하다. 그러나 '눈으로 본 세상을 카메라로 담는 일'에는 특별한 장치도 거추장스러운 작업과정도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하긴 원래 열의가 모자란 사람은, 그 때문에 일을 게을리 할 뿐이지만, 이렇게 그럴듯한 구실을 다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어쨌거나, 지금은 그 부분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사진을 그만 둔 건 아니지만, 지금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는 데는, 현재 가진 장비 만으로 충분하다.


아무리 절제를 잘 한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열정이 남긴 찌꺼기는 쌓이기 마련이고, 나는 물건에 집착하는 장비수집가는 아니어서, 장롱 속의 쓰레기를 최대한 줄이는 게 관건이다. 지금 카메라 4대와 렌즈 십여 개 그리고 플래시를 3개 가지고 있다. 그리고 벽장 안에 크고 작은 삼각대가 너 댓 개 있고, 세어보지 않았지만, 배낭과 숄더백 형태의 카메라 가방이 일고여덟 개는 굴러다니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자주 쓰는 물건은 거의 붙박이 렌즈가 달린 똑딱이 두 대뿐이다. 절제를 잘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찌꺼기가 많이 쌓였다. 새 장비를 살 때마다 쓰던 걸 처분했지만, (너무 낡거나 해서) 남의 손에 넘기기에 애매한 물건들도 있었던 것이다.


본질적으로, 사진은 피사체를 담지만, ‘사람의 관점이나 시각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주로 '무엇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고, 사진가도 (다른 사진가와) 구별된다. 따라서 사진가가 일반인이나 다른 사진가와 차별화될 수 있으려면, '좋은 장치' 보다는 ‘좋은 눈'을 가져야 한다. 같은 세상을 보고 있지만, 관심을 갖고 의미를 느끼는 대상은 각자 다르다. 또한 세상은 다양한 모습(View)을 지니고 있으며, 그 중 어떤 면은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촬영과정이 단순해지고 장비에서 자유로워지면, 보는 문제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돈이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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