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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Sep 10. 2023

·사진가의 능력

사진가가 가진 특별한 눈에 대한 이야기

사진만큼 철학적 질문을 쉽게 유발하는 매체가 또 있을까?

남들이 예술작품을 제작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사진가는 일을 끝내고 생각에 빠지게 된다.

셔터만 누르면 '제작'이 거의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흔히 긴 수련 끝에 터득한 기술과 어렵게 체득한 미적 감각을 동원해서 하는 일을 카메라가 대신해준 것이다.

뭔가 대단해 보이고 정교한 그림이 그려졌는데, 힘도 들이지 않고, 너무 쉽게 손에 쥐여졌다.

너무 쉽게...

질문은 거기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술품은 화가의 솜씨가 만들어낸 작품인 게 분명하다.

그가 아니면 아무도 그런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

서툰 화가의 손에서는 서툰 그림이, 능숙한 화가에게서는 멋진 그림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화가는 남들은 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한데 사진가도 그럴까?


“내가 찍은 사진과 남의 사진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같은 대상을, 같은 구도로 그린 그림이라도 화가에 따라 그림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찍은 사진이 사진가에 따라 다를 수 있을까?

카메라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진가들이라면, 아마 의미 있는 차이를 발견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렇다면 훌륭한 사진가와 그렇지 못한 사진가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러니까, 좋은 장비를 가졌다거나, 좋은 피사체와 좋은 조건을 찾아서 열심히 돌아다닌다는 것 외에,

그 사람의 내면에 배인, 사진가의 능력이란 대체 뭘까?


“내가 사진가가 되어 갖게 된, 남다른 능력은 무엇일까?”


그런 게 있기는 할까?


인사동

화가의 능력, 사진가의 능력


앞에 앉은 손님의 얼굴 특징을 뽑아내서 몇 개의 선으로 간단하게 표현하는 캐리커처 화가의 숙련된 솜씨를 볼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나도 이 화가처럼 숙련된 능력 같은 걸 가진 게 있을까? 물론 사진가로서의 능력 말이다. 그가 화판 앞에서 보낸 시간 못지않게 나도 사진에 긴 시간을 보냈다. 아마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은 길거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이 젊은 캐리커처 화가의 그것에 비해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돈을 들였고 상당한 노동력도 투자했으니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운동을 하면, 전에는 못했던 동작을 할 수 있게 되고, 민첩해지고 힘도 생긴다. 악기 연주법을 배우면, 의식적으로 더듬더듬 하던 동작을 무의식 중에 부드럽게 할 수 있게 된다. 공부를 하면 몰랐던 걸 알게 되고, 전에는 풀지 못했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도 풀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뭔가를 배우거나 익히면 사람은 변한다. 더듬더듬 했던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고, 몰랐던 걸 알게 되고,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도 할 수 있게 된다. 학문이나 예체능뿐 아니라 모든 경험이나 배움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새로 능력이 생긴 것이다.


과학에 의하면, 뇌에 변화가 생겨서 그렇게 된다고 한다. 뇌세포(뉴런)가 생성되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배선(시냅스망)이 신설/강화되어, 정보처리 능력이 확장되고 효율화된 덕분이라는 것이다. 단어를 떠올리고 문법을 생각할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외국어를 말할 수 있게 되는 이유도 뇌에 그런 처리를 할 수 있는 회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일에 익숙해지기 전과 숙련이 된 뒤의 뇌는 물리적으로 변하고, 뇌가 변하면 사람도 변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 물론 그와 동시에, 필요하다면, 신체 근육 역시 강해지거나 그 일을 수행하기 적합하게 다듬어질 것이다.


사진은...?


사진가가 되어 얻게 된 능력은 무엇일까?


사진을 열심히 찍으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전거를 타지 못하던 사람이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외국어를 못하던 사람이 외국인과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전에는 하지 못했던 걸 사진을 찍으면서 할 수 있게 된 새로운 능력 같은 게 있을까? 또는 전에는 서툴게 하던 것을 이제는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된 기능은 어떤 걸까? 사진도 인간의 경험이니, 그걸 익힌 사진가도 뭔가 체득한 게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가 새로이 익히게 된 능력은 무엇일까? 그의 뇌세포에는 어떤 기능을 하는 시냅스 망이 추가되었을까? 그건 아마 일반인의 뇌에는 없고, 열심히 사진을 찍은 사진가의 뇌에만 있는 어떤 기능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내 생각을 한 가지 말해 보면, 사진가의 능력은 ‘잘 찍은 사진’이 아니라, 언제라도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사진 결과물은 상당부분 사진가의 근면성과 운에 따라 좌우될 수 있어서, 당장 눈에 보이는 사진 몇 장이 그의 능력을 알려주는 정확하면서도 공정한 측정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운 좋게 좋은 사진을 찍어왔던 사진가는 그런 대상과 그런 조건을 다시 만나지 못하면 더 이상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중요한 건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화가의 손이듯이, 사진에서도 사진가 내부에 뭔가 탁월한 기능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캐리커처 화가가 손님(대상)이 바뀌어도 개의치 않고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것처럼, 사진가인 나도 어떤 대상을 만나든지, 어떤 조건을 맞이해서든지 늘 일관되게 좋은 사진을 찍어낼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체득한 바 있을 것 같다. 장치나 외부조건이 아니라 내 손을 통해서 뭔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 같은 것 말이다. 혹은 (지금은 미흡해도) 앞으로 그런 능력을 더 깊이 있게 습득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눈앞의 사진 몇 장보다, 바로 그게 사진 활동의 성과를 측정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고, 그렇다면 사진가의 경우 그런 능력에 해당하는 게 무엇일지 나는 몹시 궁금했다.




“ 무엇이 사진가에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줄까? ”


그 능력의 실체가 카메라에 달린 노출보정 다이얼을 재빨리 돌리거나 AF포인트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솜씨는 아닐 것 같다. 또한 사진에서 대상을 만났을 때 그것을 선점하려는 강한 집착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치열한 행동력이 필요하고, 조명장치와 같은 보조장비를 잘 다루거나 구도를 떠올리고 앵글과 프레임을 결정하는 능력 같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런 것들은 사진 현상을 설명하기에 너무 간단하고 기초적인 사항들이다. 좋은 사진의 정수가 단지 그런 요인들뿐이라고 말하면 다른 사진가들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사진가의 솜씨에 대한 논의는 최소한 그런 것을 뛰어 넘은 뒤에야 비로소 고려해 볼 수 있는 이야기 아닐까?


사실 사진가의 능력을 측정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그림에서처럼, 한두 점의 결과물만으로는 솜씨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말했듯이, 어떤 사진가가 좋은 사진을 몇 장 찍었다고 해서, 다시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세계를 감동시킨 놀라운 사진을 찍어서 퓰리처 상을 받은 그 사진가도 그의 사진 솜씨 덕분에 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그 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고 아마 누구라도 그 때 거기에 있었다면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그 순간에 거기 있게 된 것이 '그의 능력 덕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약간 더 본질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다.


설사 일관되게 좋은 사진을 발표하고 있는 사진가라 해도, 그가 자기가 찍은 대부분의 사진을 발표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만일 그 사진들이 단지 그가 찍었던 수많은 사진들 중 극히 일부일 뿐이라면, 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확률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남들보다 훨씬 더 자주 촬영을 다니고, 항상 좋은 시간대에 좋은(?) 장소로만 찾아 다닌다. 그러다 보니 좋은 사진을 찍는 확률이 높아지고, 그 결과 좋은 사진을 많이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가하는 것은 그의 솜씨가 아니라, 그의 근면성이나 빠른 소식통 또는 남아도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얼마나 유능한 사진가일까? “


사실 나는 그 점이 궁금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제법 오랜 시간 사진을 찍었지만, 그로 인해 내가 가지게 된 사진가로서의 능력이 무엇인지, 나 스스로도,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빛이 비치는 상황을 파악해서 카메라 다이얼을 돌려 노출을 맞추는 속도가 약간 빨라졌고, 전에 비해 삼각대를 더 빨리 펼치거나 접을 수 있게 된 것 같기는 하다. 렌즈를 비롯한 사진장치에 대한 지식이 늘었고, 어디로 가야 사진 찍을 거리가 있는 지, 어디를 바라봐야 할 지 등에 대한 정보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포토샵 등의 이미지 편집프로그램에 익숙해져서 사진을 보정하는 솜씨도 약간 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능력들은 사진의 본질적인 부분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것 같다. 대부분 사진을 시작한 초기에 잠깐 관심을 기울였던 기술적 요소들이고, 자백하자면, 사진가로서 남들 앞에 내세울 만큼 대단한 능력도 아니다. 처음 (세탁기나 전기밥솥같은) 가전제품을 사서 설명서를 읽고 사용법을 배우고 익숙해졌던 일에 비해 크게 더 어려웠던 것 같지도 않다. 스마트-폰을 처음 접했을 때도 아마 그 정도의 노력은 투입하지 않았을까.  설마하니 사진을 통해 내가 얻게 된 능력이 그것 뿐일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정말 그것뿐이라면, 나는 사진을 시작한 초기 1~2년 이후로 시간을 헛되게 보낸 셈이 된다. 너무 억울하기에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다.


그 보다 좀 더 가치 있는 뭔가가 있을 것만 같다. 틀림없이 내 몸 어느 부분엔가 오랜 시간 사진을 찍으면서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어떤 능력이 녹아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건 (셔터를 누르고 다이얼을 돌리는) 내 손이 아니라, 좀 더 깊숙한 곳에 숨어 있을 것만 같다. 내가 그걸 잘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손재주는 겉으로 쉽게 알아 볼 수 있지만, 머릿속 지식이나 몸에 밴 능력 같은 건 원래 그냥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니까.


양수리


오래 전 일이 하나 떠올랐다.


어떤 모임에서 식사를 하러 야외로 나갔다가 아내와 함께 들판을 걷게 되었다. 평소 내 취미활동에 관심이 없었던 아내는 원래 시각(視覺)적인 면에는 다소 무딘 편이었다. 특히 꽃이나 아름다운 자연풍경 같은 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계절은 봄을 지나서 막 여름에 접어 들고 있었다. 그날 날씨가 흐렸지만 밖이 어둡지는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마음이 잔뜩 들떠있는 나와 달리, 아내는 옆에서 심심한 표정을 지으면서 걷고 있었다. 그 때 내가 말했다. 멋진 풍경을 앞에 두고도 무심하기만 한 아내를 보고 답답했던 것 같다.


요 앞 들판을 좀 봐.

짧은 풀이 자라고 있는 게 보이지?

그리고 곳곳에 낮은 관목 덤불들이 불쑥불쑥 솟아있고, 들꽃도 여기저기 피었네.

저기 보라색 엉겅퀴와 하얀 개망초 꽃도 피었고, 자세히 보면, 기다란 풀잎이 들판 전체에 깔려 있어.

풀들은 봄에 새싹일 때는 연두 빛이었지만, 지금은 진한 청록색으로 바뀌고 있네.

군데군데 검푸른 녹색을 띤 덩어리들은 관목 덤불이야.

나무 이름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그 안을 잘 살펴보면 갈색 나뭇가지에 타원형의 이파리가 달린 걸 볼 수 있을 거야.

까만 열매 같은 것도 잔뜩 붙어 있네.


나는 마치 책상 앞 모니터에 떠 있는 사진을 읽듯이, 눈앞의 풍경을 자세히 설명했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풍경이 세세하게 잘 보이는 편이야.

만일 날이 맑아서 햇빛이 너무 강하게 비치면 오히려 자세하게 볼 수가 없어.

그런 날씨에는 사물의 질감과 세부형태들은 잘 보이지 않아.

그늘진 곳은 너무 어둡고 해가 드는 부분은 너무 밝아서 명암의 대비가 강해지기 때문이지.

세세한 부분들이 밝은 빛과 함께 지워지거나 어두운 그늘에 묻혀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야.

하지만 그 때는,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없는 대신, 명암의 대비가 강조되어 풍경의 구조를 큰 덩어리로 볼 수 있게 되지.

그러면 전체적으로 형태가 뚜렷하고 강렬해서, 마치 전혀 다른 풍경처럼 보여.

같은 장소가, 빛이 바뀌면서, 새로운 풍경으로 다시 태어나는 셈이지.


무료했던 탓인지, 아내가 눈앞의 풍경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서 저 멀리있는 산을 한번 봐.

요 앞에서 시작된 들판이 끝나는 곳에 보면, 좌우로 흐르는 하얀 강줄기가 있지.

강가에는 키가 크고 줄기가 흰 나무들이 서있고. 뒤에 나지막한 산들이 양 옆으로 길게 펼쳐져 있어.

그리고 그 너머로도 산봉우리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게 보이네.

가까운 산은 흐릿한 청록색이지만 먼 산은 거의 푸른색에 가까워.

그건 아마 우리와 저 산 사이에 있는 공기 층의 영향 때문 일거야.

마치 무늬가 얼룩덜룩한 벨벳을 뒤집어 쓴 것처럼 평평하게만 보이네.

그러나 저 산에도 요 앞의 들처럼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을 거야.

단지 우리가 거기 있는 사물들을 하나하나 구분해서 볼 수 없을 뿐이야.

거리가 너무 멀다 보니 세부가 잘 안 보이는 거지.

윤곽선만 남아서 산봉우리 하나하나가 매끄럽고 부드러운 덩어리처럼 보이네.

마치 해무가 잔뜩 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같지?


“아~!”


듣고 있던 아내가 나직하게 탄성을 질렀다.


“신기하게도 설명을 들으니 보이기 시작하네. 그러고 보니 여기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


양수리 어디쯤이었다.




사진가의 눈


사진가의 눈은 화가의 눈과 사뭇 다르다. 화가는 언제라도 모델에서 눈을 돌려 자기내면을 향할 수 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자기표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가에게 중요한 건 오직 피사체뿐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의 공간에 놓여 있는 피사체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셔터를 누르자마자 빛은 동시에 확산되어 순식간에 사진을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속수무책’의 순간에, 사진가는 빛이 비치는 상태와 피사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여러 조건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카메라는 사람의 눈보다 예민하게 반응한다. 미세한 변화에도 사진은 크게 달라진다. 사진의 묘사에서는, 빛이 약간 모자라면 상(像)이 새까맣게 묻히고, 조금 과하면 하얗게 지워진다. 초점은 거의 성패를 가를 정도로 민감한 문제다. 선택은 돌이킬 수 없다. 뒤에 잘못을 알아도, 고치거나 지울 수 없고, 덧칠을 해서 덮어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사진가의 시선은 예민하고, 판단은 긴박하며, 매 순간 ‘결정적’이다. 시선에 빈틈이나 여유는 있을 수 없다.


사진가는 빠르게 보면서도 실수 없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남들은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고, 남들은 볼 수 없는 방식으로 볼 줄도 안다. 그의 눈은 분명히, 일반인들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 사진가의 솜씨가 담겨있고 그의 전문성도 필시 거기 있을 것이다. 만약 그의 뇌를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면, 틀림없이, ‘보는 능력’과 관련된 부위에 수많은 뇌세포가 밀집되어 있을 것이다. 시냅스망 역시, 그런 기능과 관련해서, 남달리 발달해 있을 것이다.


버들강아지

누군가 영어회화가 도무지 늘지 않아 고민하는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들을 수만 있다면 말하는 건 시간문제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은 단지 성의문제일 뿐이다.‘


사진가의 능력은 필시 세상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눈 속에 담겨있을 것이다.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 조금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에이미 E. 허먼 . 우아한 관찰주의자 - 눈으로 차이를 만든다)]


사진가도 비슷한 입장인 것 같다. 놀라운 사진을 찍은 사진가에게 ‘솜씨가 좋다’고 칭찬하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앞에서 셔터를 눌렀을 뿐입니다.” 그가 유난히 겸손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한 것이다. 새로운 걸 찍었기에 참신한 사진이 나왔고 아름다운 걸 찍었기에 아름다운 사진이 찍혔을 것이다. 물론 그런 걸 봤기에 카메라를 겨누고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본 것뿐’이고, 그의 탁월함도 거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자기가 ‘한 일이 별로 없다’고 믿는 것 같다. 자기는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사실이겠지만, ‘본다’는 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이 참 좋은가봐!”


사진동무가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감탄했다. 카메라에 매크로렌즈를 끼우고 함께 숲을 뒤졌지만 내가 찍은 것들을 그는 전혀 못 봤다는 것이다. 어디에 그런 털 복숭이 깡충거미가 있었는지 파리매는 또 언제 마주쳤는지, 자기는 코빼기도 못 봤다고 했다. 한데 원래 그런 것들은 그냥 봐선 좀처럼 보이지 않는 법이다.


어린 시절 나는 벌레잡기에 일가견이 있었다. 친구들이 빈손으로 돌아올 때도 나는 채집통을 가득 채웠고, 희귀한 종을 잡아 우쭐대는 일도 잦았다. 곤충을 좋아해서, 숙제가 아니라도, 여름방학 때는 거의 숲에서 살았다. 숲은 익숙한 공간이었고 그 안의 생태를 나는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보는 눈도 남달랐던 것 같다. 숲 모양과 숲을 이루고 있는 식물들을 보면 거기 어떤 동물과 어떤 종류의 벌레가 사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림을 감상하듯 주변 상황을 세심히 살피면서 미묘한 차이를 분석하고, 전경과 배경을 모두 살펴 미세하게 어긋나 보이는 부분에서 의미를 찾아내려했다. (에이미 E. 허먼 . 우아한 관찰주의자 - 눈으로 차이를 만든다)]


자연이 내가 아는 자연과 달리 부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느낄 때, 나는 거기 뭔가 다른 게 있다는 걸 알아채고 주의를 기울여서 보았다. 풀잎 하나가 부자연스럽게 접혀있다거나 나뭇가지가 약간 어색하게 벋어있으면 금세 그리 눈길이 갔던 것이다. 그래서 자벌레가 제아무리 나뭇가지인척해도 내 눈은 속이지 못했고, 사마귀가 풀잎과 꼭 같은 색을 하고 꼼짝 않고 있어도 나는 다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막연히 '그저 관심이 없을 뿐 다들 나와 같이 볼 수 있을 거'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각은 특별한 능력이고, 공짜로 생긴 것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눈의 수정체에 비쳤다고 해서 전부 다 ‘본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뇌가 개입해서 ‘시각적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볼 수 있다.


[시력은 수동적인 작용으로 여겨지기 쉽지만 사실은 해석능력을 요하는 능동적인 과정을 거친다. 시각은 인간의 지배적인 감각이지만 세상이 제공하는 엄청난 양의 시각정보를 모두 분석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정보 중에 상당수는 모호하고 복잡하며 순간적이다. 언어와 문화 같은 외적 요인을 통해 우리는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배운다. 그리고 감각 계통에도 잡음 속에서 신호를 걸러내 주는 신경기전이 있다. (카라 플라토니, 감각의 미래) ]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매우 ‘과학적’이다. 보는 데는 ‘시각적 해석’이 필요하고, 사람마다 해석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해석과는 다르겠지만, 뭘 볼 때도 해석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얘기다. 그리고 해석의 결과에 따라, 엄연히 있는 것을 못 볼 수도 있고 같은 것이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믿기지 않겠지만, 같은 걸 보고 있어도 모두 똑 같이 보고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해주거나 열심히 생각을 해봐야 비로소 보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아예 못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남들은 나와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주장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개념이긴 하다. 그러나 같은 사안을 두고 사람마다 생각과 관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전혀 못 믿을 바는 아닌 것 같다. 나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고 논리로 설명하면, 사람들이 잘못된 (내가 잘못되었다고 믿는) 자기생각을 바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미 신념이 굳어버린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설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확증편향’은 매우 감정적인 영역의 일이어서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방식으로는 남을 설득할 수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항상 감정적으로 믿음을 정하고 나중에 합당한 근거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면 일부러 외면하고, 근거가 부족하면 필사적으로 만들어내서라도 편향된 자기 믿음을 강화하려고 들 뿐, 좀처럼 설득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띠며 핏대를 세워 하는 말들은, 그의 귓전에서 튕겨나가고, 그는 하나도 듣지 않는 것이다.


관념적인 분야에 비하면 시각적 확증편향은 그리 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특히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 간에는 그럴 것 같다. 다들 같은 걸 보며 살았을 뿐아니라, 시각적 문제인 탓에, 타인의 주장에 설득을 당할 일도 별로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같은 경험을 했으니 시각중추에 각인된 양상도 비슷비슷할 것이라는 추측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사람들은 대체로 같은 것을 보며, 거의 같은 방식으로 볼 것 같다. 그러나 그건 생존이나 생활에 필요한, ‘일반적인 시각’에서나 그럴 뿐이다.


더 세부적으로 보고, 더 예민하게 보고, 더 전문적으로 봐야만 하는, 어떤 영역에서는 사람마다 보는 능력에서 많은 차이가 날 것이다. 내 생각에, 사진적 시각에도 그런 ‘전문성’이 있는 것 같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경험은 특별하고, 네모난 뷰파인더를 통해서 보는 세상 역시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기만의 편향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각자 제 나름의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사진에 나타나는 그 사람의 시각이 특별하고 전문성이 보인다면 그는 사진가일 것이고, 그 부분이 바로 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사진이 그 사람의 ‘시각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건 글이 그 사람의 생각에 대해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남이 보고 있는 것을 내가 그대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 사람의 사진을 보면 ‘그가 본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사진이 곧 그 사람의 ‘시각’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주된 기능이 바로 거기에 있다. 눈높이를 맞추고 나란히 서서 뺨을 맞댄 다음,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해주는 것이다.


"저기 지금 당신이 못 보고 있는 뭔가가 있다."


그러면 내가 보는 것을 그 사람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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