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는 한 순간도 버벅대면 안 되고 (셔터를 누르기 전에) 다른 동작이 끼어들어도 안 된다.
피사체가 움직일 때, 셔터 누르는 순간은 긴박하다.
그래서 주로 초점과 노출은 미리 맞춰놓고 시작한다.
카메라의 반응이 늦거나 아니면 내 손이 늦을 것이다.
눈으로 보고 나면 이미 늦다.
원칙적으로는...
움직임에 따른 구성상의 변화를 관찰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셔터를 눌러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음 순간 만들어질 그림을 예측해서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피사체의 움직임을 예측해서 사진을 찍어주는 카메라는 없고,
손이 시각(視覺)처럼 빠르게 반응하게 훈련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황학동
내가 아는 어떤 사진가는 거대한 삼각대 위에 대형 뷰카메라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는다.
그는 크고 무거운 장비를 잔뜩 짊어지고 야외로 나가서 미리 봐둔 위치에 삼각대를 세운다. 촬영을 위한 모든 과정은 수동으로 진행된다. 카메라를 삼각대위에 올린 다음 렌즈를 장착한다. 따로 챙겨온 노출계로 노출을 재서 조리개 값과 셔터속도를 세팅한다. 검은 천을 둘러쓰고 루뻬를 대서 간유리에 맺힌 상을 일일이 확인해가며 초점을 맞춘다. 필름홀더를 카메라에 삽입하고 차광판을 제거한 다음, 릴리즈를 눌러 사진을 찍는다.
그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이젤과 캔버스를 지고 다니면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던 인상주의 화가가 떠올랐다. 과장을 좀 하면, 사진 한 컷 찍는데 걸리는 시간은 화가가 스케치나 간단한 그림을 한 장 그리는 시간과 맞먹을 것 같았다. 들고 다니는 장비도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장비만큼이나 많고 거추장스러웠다. 나는 속으로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빛’이었다.
사물의 형태보다, 그 표면에서 산란하는 빛과 빛의 변화에 주목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미술에서 형태보다 빛을 더 중시한다는 건 상당히 합리적인 태도였다. 사물이 (시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건 빛 때문이고 빛이 비치는 상태에 따라 모습이 다양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상주의의 탄생은 ‘아는 대로 그려왔던 그림을 비로소 보이는 대로 그리기 시작했다’는 데서 의미가크다. 지식보다 시각이 또는 관념보다 감각이 강조된 것이다.
아무튼 그 결과, 사물은 빛의 관점에서 재구성되어, 독특한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견고했던 형체가 다소 느슨하게 풀어지면서, 색을 띤 무수히 많은 점이나 선이 병치된 (당시로서는) 참신한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밖으로 나가야만 다양한 빛을 관찰할 수 있었기에 인상주의 화가들은 대부분 야외로 나가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간단한 스케치 정도라면 모르지만, 유화나 수채화 그림을 야외에서 그리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짐이 너무 많고 무거웠을 것이다.
화판과 이젤 그리고 캔버스와 팔레트 등을 가져가야 하고, 물감과 붓을 챙겨가야 한다. 물이나 유화용 기름이 필요할 것이고, 붓을 빨 물통과 기름통도 필수다. 만약 장시간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양산과 야외용 의자를 가져가야 할 것이다. 바람이 불거나 갑자기 비가 올 수도 있으니 그런 상황에 대비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유화를 그렸다면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캔버스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빛이 중심이 되자 그림의 소재도 바뀌게 된다. 인상주의 이전까지 그림으로 그려지는 대상은 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 이었다. 신화나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주된 주제가 되었고, 인물화는 대부분 누군가의 초상화였다.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들까지 그림으로 그렸다. 논에 쌓아둔 짚더미를 비롯해서 이름 모를 산과 들판과 일렁대는 강물과 파도 치는 바다 등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빛은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의 의미나 내용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중요한 건 빛이고, 무엇인지, 어디인지, 누구인지,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지 등은 화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평범한 건물이라든지 일상적인 장면이나 그저 남자나 여자도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림 속 사물이나 사건이 갖는 사회적 의미나 내용은 약화되거나 거의 사라진 것이다. 어떤 화가들은 어쩌면, 빛을 부각시키려고, 일부러 존재감 없는 것들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건이나 사물의 존재감이 부각되면 빛의 존재감은 아무래도 약화될 테니까.
결과적으로, 그림에서 '시각(視覺)만 남고 의미는 사라지게 되었다. 인물화는 더이상 모모 씨나 모모 양의 초상화가 아니었고 풍경화는 일정한 장소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림은 화가의 눈에 비친 그저 인물이나 풍경이었고 누구인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림의 의미는 더 이상 그려진 사물이나 사건 속에 있지 않았고, 굳이 의미를 원한다면, 그것은 빛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았던 화가의 시각적 해석에서 찾아야 할 터였다.
내가 아는 그 사진가가 피사체를 고르는 태도도 인상파 화가들과 비슷했다. 그도 사건사고를 쫓아다니지 않았으며, 굳이 의미 있고 중요한 것들을 사진의 피사체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주로 공원에 설치된 거대한 물탱크나 교외에 지어진 건물 등을 촬영했고, 가끔은 차를 타고 멀리 나가 풍경사진도 찍었다. 사진의 피사체는 특별히 의미가 있거나 중요한 게 아니었고, 풍경도 유명한 장소나 알려진 사진촬영지가 아니었다. 그는 필시 대형카메라의 엄청난 묘사력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그 자신이 먼저 거기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야외에서 대형 필름카메라를 사용하는 불편까지 감내하면서 그런 사진을 찍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일부러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을 부각시키려고 그랬던 것처럼) 흔하고 존재감이 없는 것들을 사진의 피사체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사진에 특별한 게 담겨있으면, 사람들은 사진을 보지 않고, 거기 찍힌 사물이나 사건사고에만 관심을 둘 것이다. 사람들 시선과 관심이 피사체에 집중되면, 놀랍게 잘 묘사된 사진이미지에 대한 관심은 아무래도 뒷전으로 물러나게 될 터였다. 그러면 갖은 공을 들여서 촬영했던 사진가 자신의 노력도 허사가 된다.
그림그리기(繪畵)와 사진찍기는 둘 다 ‘그림을 얻기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작업의 결과물이 '그림'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회화의 장점이 ‘창조적 능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는 점이라면, 사진의 장점은 ‘속도와 시간성 그리고 편의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은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일을 하는 반면, 다른 쪽은 자동화된 기계장치를 이용하니 그렇다. 손으로 하면, 자유롭게 그릴 수 있고 개성을 발휘하기는 쉽지만, 능률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장치를 활용하는 이유는 (같은 일을) 빠르고 편리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획일적인 결과물을 얻게 되어,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카메라를 들었다는 것은 이미 ‘그 단점을 수용하고 편리함을 선택했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대로 그릴 수 없고 개성을 나타내기 어려울지언정 편리함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이미 사진을 선택해놓고는) 굳이 일부러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느리고 힘든 사진찍기 방식을 고수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빨리 찍고, 대충 찍고, 몰래 찍고, 간편하게 사진을 찍는다. 그러려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사진을 찍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화가의 이젤과 캔버스에 버금가는, 크고 무거운 삼각대와 대형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사진을 찍어야만 한다면, 나는 아마 처음부터 사진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델을 앉혀놓고 포즈를 취하게 하는 등 연출을 한다거나 피사체를 만들어서 사진을 찍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그러려면 차라리 사진대신 그림을 그렸지 싶다. 나는 ‘간편하게 그림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사진을 찍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사진은 정지된 시간이다. 1/125초, 1/250초, 1/1000초... 시간을 멈추면 세상도 움직임을 멈춘다. 사진은 시간을 멈춰서, 내가 사물을 찬찬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셔터를 누르면 그 순간의 풍경이 카메라에 담겼고, 나는 그 점이 흥미로웠다. 정지된 장면은 늘 보는 일상과는 달랐다. 낯설고 새롭고 때로는 흥미진진했다. 게다가 사진은 마치 정성 들여 그린 그림처럼, 언제나 정교하게 찍혔다. 내가 제대로 보지도 않고, 급하게, 아무렇게나, 대충 찍어도 사진은 멀쩡하게 찍혔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 한 장의 사진을 위해서 내가 마치 온 힘을 다해 진지하게 노력한 것처럼 가장을 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큰 셈이다. 그러니까 대형뷰카메라를 즐겨 사용하는 그 사진가가 의미를 중시했다면, 나는 실속을 챙긴 것이다. 그가 힘들고 거추장스러운 작업과정 속에서 사진을 찍는 의미를 찾았다면, 나는 쉽고 간단하게 그림을 얻을 수 있다는 데서 의미를 느꼈다.
나는 사진에서 속도와 편의성은 일종의 '손실보상' 같은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찍음으로써 잃게 되는 손실(?)은 개성과 자유로운 발상 등이고 그 대가로 얻은 것이 속도와 편의성이라는 뜻이다. 만약 사진이 아닌 그림(繪畵)을 선택했다면, 나는 장치에 구속되거나 피사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사진을 찍게 되는 바람에, 장치의 한계와 피사체란 존재의 양태(樣態)에 손발이 꽁꽁 묶이는 처지가 된다.
카메라의 표현은 현실의 한계 안에 머물렀으며, 더 나은 피사체를 만나야만 더 나은 사진도 가능했다. 머릿속에 이상적인 그림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런 피사체를 부단히 찾아 다녔고, 좋은 것을 만나려고 노심초사 해야 했다. 물론 그건 내 선택이었고, 불만은 없었다. 나는 그 대신에 빠르고 간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속도와 편의성’을 얻었던 갓이다. 상상력을 작동해서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를 포기한 대신, 카메라를 작동시켜 빠르고 간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느리고 번거로운 방법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진을 선택할 때 포기했던 그것이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포기했던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개성과 창의성과 자유로운 발상 등 창작활동에서는 꼭 필요한 핵심적인 요소다. 흠이 있는 것도 완벽한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상상력을 동원해서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그려낼 수 있다.
속도와 편의성은 바로 그 중요한 것을 내어주고 얻은 대가이자 보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과 맞바꾸고 얻은 것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아니라면, 나는 밑지는 거래를 한 셈이 된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으면서, 보상으로 받은 그 이점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면, '상대적으로 손해 보는 결과가 된다'는 게 내 계산이다. 다시 말해, '마음껏 그리지는 못하게 되었으니, 그 대신에, 쉽고 빠르게 그리는 이점은 충분히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혹시라도, 내어준 부분을 만회할 생각이 있다면, 새로 얻은 이점을 십분 활용하는 데서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사진이 가진 장점에 속도와 편의성만 있는 건 아니고 뛰어난 묘사력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이건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어떤 부분에 더 큰 의미를 느끼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속도와 편의성인가 아니면 뛰어난 묘사력인가? 나는 빠르고 간편하게 그림을 얻을 수 있다는 데서 사진의 의미를 느끼기 때문에 느리고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방식은 싫다. 설사 그렇게 해서, 제아무리 뛰어난 사진이 찍혀 나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경우, 사진의 탁월함을 나의 탁월함으로 전이(轉移)시킬 방법이 무엇인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불편한 장치를 사용한다고 해서 ‘수작업 사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장치의 한계 안에 갇혀서 작업을 하게 될 것이고, 피사체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창조적 능력을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속박은 더 심각해지고 한계는 더욱 분명해질 뿐이다.
아무튼 나는, 사진을 찍는 장치가 그것뿐이라면 모를까, 대형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다. 기계장치는 편리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고, 사용상의 불편과 부담은 줄어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뷰카메라는 SLR카메라가 개발되기 전 구시대에 쓰였던 장치고 요즘 시대에 굳이 그런 장치를 사용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물론 대형이나 중형 포맷이 꼭 필요한 작업도 있고, 그 경우는 별수 없다. 하지만 아마추어사진가는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나는 처음부터 그런 사진은 포기했다.
나는 (장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야만, 그 다음에 뭔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장치를 이동시키고 정확하게 작동하는 것조차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면, 거기 속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온통 신경을 쓰게 되고, 그 지점에서 발목이 잡혀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진에서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부분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속도와 편의성을 극대화해서 실속을 챙기자는 게 내 속셈이다.
그가 대형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날, 나도 그 옆에 서서 같은 장면을 찍어보았다. 달랑대며 목에 걸려있던 내 SLR카메라를 들어 올려 구도를 맞춘 다음 셔터를 눌렀다. 당연하게도,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간단한 이 일을 그는 왜 그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 사물을 보는 관점이나 피사체를 선택하는 태도는 나와 별 차이 없었다. 나도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처럼, 특별한 대상이나 사건사고를 쫓아다니는 대신, 빛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피사체를 선택했다.
내 눈에 그는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너무 많은 공을 들이는 걸로 보였다. 그래서 실제로 찍혀 나오는 사진에 큰 차이가 있을까? 그 차이는 그가 감내하는 수고를 보상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클까? 혹시 그는 자기가 사진을 찍는 그 힘들고 어려운 과정 안에서 의미를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사람은 원래 너무 쉽게 얻은 것에는 의미를 잘 못 느끼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의미에 대한 고민을, 그 번거로운 활동 속에 묻어버리기로 작정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날, 그가 했던 작업이 장엄해 보였던 반면, 나의 사진찍기가 '같잖아 보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