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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Sep 18. 2023

브레송에 대한 의혹

연출행위를 거부하고 스트레이트 사진을 옹호하는 이유

세상은 넓고 사진 찍을 거리는 많지만, 현실의 공간에서 원하는 사진을 찍어내기는 쉽지 않다.

피사체가 놓인 현실의 열악한 조건들은 하나같이 사진가의 의도에 저항하는 적과 같은 존재들이다.

적들을 처치하고, 의도한 바 목적을 달성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연출'이다.

그러나 어떤 사진가는...

자기 경험과 기술을 이용해서 적의 저항을 하나하나 막아내고, 좋은 구성을 성취했을 때 비로소 만족감을 느낀다.


한데 대체 그런 게 왜 만족스러운 걸까?


남대문시장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의 사진들 중 일부는 연출되었을 지도 모른다.


[ 게이퍼드: 종종 사진은 아주 짧은 순간의 반사작용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카르티에 브레송>이 곧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상상하며, 자신이 막 찍으려고 하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호크니: 네, 그렇지만 그는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카메라에는 모터가 달려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진이 약간 연출되었는지 여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훌륭한 사진이라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마틴 게이퍼드. 다시, 그림이다 p123) ]

(* ‘게이퍼드’는 책의 저자다. 직업이 정신과 의사인 그는 ‘호크니‘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그를 인터뷰해서 이 책을 썼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나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연출된 사진이라는 걸 알고 나면, 더 이상 '훌륭한 사진'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바로 '문제'다.


그의 사진집에서 보았던 어떤 사진은 그저 거리를 탐색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장면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더욱이 당시의 카메라는 요즘처럼 자동화 기능이 발달하지 않았고, 기계적 성능도 뒤쳐졌을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지만, 카메라는 의도대로 빠르게 반응해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말이 '금세'지,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다. 실은, 카메라 성능 문제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본 것을 찍으면 이미 늦다.


"잠깐만! 조금 전에 그 자세가 좋았어. 다시 좀 해 봐."


움직이는 대상을 촬영할 때, '원하는 상태'를 눈으로 보고 셔터를 누르면, 그 때 사진에 찍히는 것은 '원하는 상태'가 아니다. 위치가 달라졌거나 자세가 바뀌었거나 얼굴이 약간 돌아갔을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어떤 순간이 그토록 예민하고 중요한 경우라면, 미리 예측해서 찍는 수밖에 없다. 이건 정신 없이 돌아 다니는 아이들을 상대로 스냅사진을 찍어 봤다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하는 방식을 감안해 보면) 이런 추측이 가능하겠다.


그 사진가는 무수히 많은 컷을 촬영했고, (어느 정도 행운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찍힌 사진을 몇 장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배경이 될 만한 좋은 장소를 물색해서 뭔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예를 들면, 빗물로 인해 웅덩이가 생긴 길거리에서 거울처럼 반영이 비치는 그 위로 사람이 지나갈 때를 기다리는 식으로. 그리고 공사장에서 노는 아이들이나 지나가는 행인에게 '포즈를 잠깐 취해 달라'고 부탁했던 일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 사진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브레송>의 사진들이다.


물론 모델을 데려다가 적극적으로 연출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자기 머릿속에 이상적인 그림을 넣어두고 있었다면, 그러고 싶은 유혹에 많이 시달리지 않았을까?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위해 거리로 나서본 경험이 있는 사진가라면 다들 잘 알 것이다. 빛이 비치는 상태와 사람들의 움직임과 그 밖에 거리의 모든 것들이 절묘하게 어울려서 멋진 구성을 이루는 모처럼의 그 완벽한 순간을 그냥 흘려보낼 때의 아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어쨌든 나는 (정말 절묘한 순간을 포착했다며) 내가 감탄했던 그의 사진이 연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몹시 실망할 것 같다.


실망하는 첫 번째 이유는 물론 촬영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보다 여유로운 상황에서, 그리고 인위적인 수법을 동원했으니, 그만큼 더 높은 수준의 작품을 기대하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같은 사진가로서, 내가 경외감마저 느꼈던, 전설적인 순간포착의 기술이 별 것 아닌 걸로 밝혀지면서, 사진은 갑자기 볼품없게 보인다. ‘기왕에 연출을 할 것이었다면, 더 완벽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운 부분을 지적하는 여유조차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연출된 사진에 실망하게 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싶다. 현실의 사건은 연출을 통해 언제라도 재현할 수 있지만, 그러나 ‘재현된 사건’은 언제라도 다시 재현할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


[ 어떤 세부요소들은 나를 ‘찌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그 이유는 사진작가가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그 자리에 배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윌리엄 클라인]의 [무인화가 시노히에라] (1961)에서 인물의 괴물 같은 머리가 내게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촬영기법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

이처럼 나의 흥미를 끄는 세부요소는 의도적이 아니거나 최소한 완전히 의도적은 아니며, 필경 의도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롤랑바르트. 밝은 방 p66) ]


그러니까 사진의 내용에 대한 문제다. 연출한 사진 속의 그 장면은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제각기 유일무이하고, 역사 속에서 단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시간성이고, 사진은 (실제 있었던 현실의) 맥락에 따라 연속된 시간의 흐름에서 잘라낸 한 순간이라는 이야기다. 사진은 그 유일무이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그래서 (비록 하찮은 장면일지라도) 흥미롭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나는 평소에 사진의 기록성을 중시하는 입장도 아닌데, 왜 그런 이유 때문에 연출된 사진에서 실망감을 느끼는 걸까? 그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가의 의도로 인해 인위적인 조작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현실성이 훼손되었다. 사진은 더 이상 현실기록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그렇다면 그 현실성을 대체할만한 다른 의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진가가 연출을 시도한 이유는 뭘까?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일까?


사진가의 의도가 존재했고, 그것이 제대로 표현되었다면, 사진은 그 표현된 대로 읽히고 평가된다. 그러나 (연출임을 밝히지 않았음은 물론) ‘다른 의도’를 암시할만한 것이 사진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현실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의사가 있었던 게 아닐까? 말하자면, 연출하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을 기만하려 했다는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제작과정을 베일 뒤에 숨겨서 자기 솜씨를 과장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도덕이나 정직성 문제로 치부하고 끝낼 일은 아닌 것 같다. 처음부터 연출한 사진임을 밝힌 경우라면, 도덕성의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 사진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경외심을 갖고 감상하는 <브레송>의 어떤 사진은, 만일 그 사진이 처음부터 연출된 사진이라고 밝혔다면, 아예 내 관심을 끌지도 못했을 게 틀림없다.


<브레송>의 사진을 감상하느니, 차라리 미장센이 뛰어난 프랑스영화 속의 한 장면을 캡처해서 감상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 영화는 선별된 인물과 의상, 멋진 풍경과 이상적인 조명을 사용해서 장면을 연출하고,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최적의 앵글과 프레임을 적용해서 촬영한다. 그 한 편의 영화 필름 속에서 우리는 아마 수천 수만 컷의 완벽한 사진을 뽑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 보게 된다. 그(연출한 사진가)가, 현실에서 일어난, 그 상황을 보다 ‘완벽하게 담고 싶다’는 것 말고는 어떤 다른 의도도 없었다면, 오로지 ‘사진이 완벽한 미적 조형성을 갖추는 것’이 그의 유일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아름다운 모양새를 얻는 것'외에 다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다. 달리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없고 현실의 사건사고를 알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그의 의도대로) 미적 조형물을 보는 관점에서 사진을 바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사진가는 실제 현실의 모습에 구애되지 않고, 연출력을 동원해서, 자유롭게 그의 창조적 능력을 펼친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현실을 복제한 이미지가 아니라)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창작물이니, 나도 그런 관점에서 사진을 보는 것이다. 그 사진은 (구성이나 색상 면에서. 그리고 사진에 담긴 현실의 실제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얼마나 완벽한 조형물인가? 그리고 얼마나 매혹적인 그림인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다른 그림이나 디자인, 도안, 영화의 한 컷 등을 떠올리면서 그 사진을 비교, 평가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진이 '훌륭한 미적 조형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브레송의 사진뿐 아니라, 어떤 사진도 그림(회화작품)의 형식미에 필적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른 창작물이 현실의 원래 모습에 구애되지 않고, 작가의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이상화된 모습으로 태어나는데 비해, (제작방법의 특수성으로 인해) 사진은 어느 정도 현실의 모습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완벽한 사진을 위해서는 완벽한 현실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완벽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상'이다. 차라리 '왜 처음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고, 굳이 사진을 찍어서 그런 것을 구현하려고 했는지' 의아한 생각도 든다.


뿐 아니라 사진을 인화지와 분리해서 영상(Image)만 떼어 놓고 보면, 그걸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사실 애매하다. 사진이 디지털화 되어, jpg파일 형태로 컴퓨터 하드에 저장되면서 그 정체가 '이미지'라는 사실이 좀 더 잘 드러나게 되었다. 사진은 때로는 모니터 위에 떠있고 때로는 종이 위에 정착하면서, 원본도 실체도 없이 복제되어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유령 같은 이미지다. 그것을 회화나 조각 작품과 비교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된다.


인화지에 정착시킨 사진 역시, 질감도 양감도 없어서, 감각적인 측면에서 보면, 매우 빈약한 조형물일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사진은 '그 안에 담긴 현실이 원본'인 하나의 이미지로서, 거기(현실에) 꼭 달라 붙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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