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미지는 아무래도 사진가의 발명품은 아닌 것 같다. 비록 ‘새롭게 그려진 그림’처럼 보일지라도, 사진은 다만 렌즈를 통해 바라본 어떤 존재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내 그림자가 '나'인 것처럼, 내가 찍힌 사진은 거울에 비친 '내 분신'이며, '또 하나의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흔적이나 낙인’처럼, 사진도 역시 사진에 찍힌 그것의 ‘일부라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현실세계에서 이미지를 발굴해 내는 것.’
정서적인 면이 배제된 다소 건조한 표현이지만, 나는 일단 사진을 그렇게 정의하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뭔가를 새롭게 발명하거나 창조하지는 않은 것 같았던 것이다. 나는 피사체가 된 현실을 (화가처럼) 내 의도대로 해석하지 않고, 마음대로 치장하거나 윤색하지도 않는다. 단지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기록’할 뿐이다.
기록은 정직해야 하고 객관성이 있어야 하며 가능한 한 정확해야 한다. 만약 사진가가 기록을 할 생각이 있다면, 기록할만한 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객관적으로, 온전하게 사진에 담아야 할 것이다. 형식보다 의미를 먼저 생각해야 하며, 연출하거나 왜곡해선 안 되고, 때에 따라서는, 마냥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기는 어려운 입장에 놓일 수도 있다. 모양새보다는 내용이 우선되어 사진은 사진에 찍힌 그 현실에 꼭 달라붙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현실의 모습이 추하면 사진도 추하고, 흔하다거나 무의미하고 가치가 없다면 사진 역시 그렇게 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예술작품이라면, <손택>이 말했듯이, ‘개성도 필요하고 거짓말도 할 줄 알고, 미학적 즐거움도 줄 수 있어야 한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카메라 앞에 놓여있던 그 대상에 구속될 이유가 없다. 객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며, 왜곡하기를 꺼릴 이유도 없다. 그는 카메라 앞에 놓인 현실세계에서 일종의 밑그림을 차용해왔을 뿐, 필요하다면 마음껏 수정하고 변형해서 개성과 취향이 듬뿍 담긴 멋진 작품을 만들면 된다. 물론 제작된 ‘예술작품’은 당초 카메라 앞에 놓여 있었던 사진 속 그 대상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렇게 ‘기록과 예술’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심각하게 상충된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은 기록이나 증명자료가 될 수 없고, 기록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찍은 사진이 예술작품이 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설사 겉보기에 서로 비슷해 보인다 해도 마찬가지다. 당초 의도가 달랐기 때문에, 내용과 의미 면에서, 성질이 전혀 다르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편 예술성이 강할 수록 기록으로서의 가치는 그만큼 상쇄될 것이고,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높이려면 예술성이 깃들 여지가 줄어들게 된다.
물론 어떤 사진은 기록물이겠지만, 다른 사진은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가진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기록을 할까 예술작품을 만들까?”
그런데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 지금 여러분의 책상을 한구석에 붙여 놓고 글을 쓰려고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책상을 방 한복판에 놓지 않은 이유를 상기하도록 하자.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
우리 마음속에는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과 과한 존경심이 있는 것 같다. 그와 반대로 ‘기록’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도 존재하는 것 같다. 예술은 지적인 동시에 감성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이라,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일인 반면, 기록은 기계적인 작업이라 누구나 할 수 있고, ‘별 가치가 없다’는 식의 인식이다. 그런 인식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쪽이 사진가들이고, 그래서 사진가들은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하고, 자기사진이 예술작품이 되기를 원하는 것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오히려 예술이야말로 무용하고 무가치한 일이다.
예술의 본질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양식(糧食)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편리하게 발전하지도 않는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경외심은 상당부분, ‘그런 무용하고 무가치한 일을 하면서도 버젓이 밥을 먹고 살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놀라움 때문’일 지도 모른다. 예술은 우리에게 약간의 위안을 줄지언정, 명백히 허영이고 사치라고 볼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자격지심과 시기심도 있겠지만, (위대한 예술 식의) 편견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 던져 본 말이다.
사진가들은 흔히 둘 중 하나이거나 혹은 위의 두 입장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예술작품을 향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에 속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아마추어사진가들도 나와 입장이 비슷하지 싶다. 나는 내 사진이 단순기록을 위한 자료로만 쓰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설사 사진이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월등하다 해도, 단지 그 뿐이라면 달갑지 않다. 그 부분은 명백하고, ‘기록이나 증명‘은 내 관심 밖의 일이다. 물론 이 때 ‘기록’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록’이다. 사실 우리가 얼핏 알고 또 머릿속에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기록’은 ‘기록의 고리타분한 이미지이고, 진부한 일면’일 뿐이다.
기록이나 증명의 용도로 쓰기 위해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사진. 시간이 흘러 대상물이 훼손되고 소실된다든지, 희소해지거나 접근이 어려워서 귀하게 된 사물을 촬영한 사진 등. 대게 그런 사진의 의미와 가치는 사진보다는 피사체가 된 사건이나 사물에 의해 결정된다. 즉 사진에 오래되거나 희소한 게 찍혀있으면 사진의 가치가 높아지고 의미도 생긴다. 그 때 사진가는 자기표현을 하거나 정신활동을 발휘했다기보다, 단순히 노동력을 투입 한 것뿐이다. 물론 시간으로 숙성된 기록의 가치는 무엇보다 귀하다. 단지 내 관심 밖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사진을 통해 내 손으로 의미 있는 뭔가를 창조해내고 싶어서 사진을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뭔가를 (창조)하려고만 들면, 나를 가로막는 것이 오히려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자니 사진을 포기해야 했고, 사진을 고수하자니 창조성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한편 사진은 어차피 현실과 피사체에 기대는 수밖에 없고,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는 뭔가를 기록하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자연히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기록의 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사진이 예술적인 혹은 그에 준하는 독창적인 매체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찾은 답은 이런 것이다.
' 사진의 기록도 독창적일 수 있다. '
시간이 흘러야만 비로소 숙성이 되어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방식의 기록만 가능한 건 아닐 것이다.
[ 타자기 앞에 앉거나 연필을 집어 드는 것은 육체적인 행위다. 잊힌 창을 통해 평범한 풍경을 전혀 다른 각도, 그러니까 평범한 풍경을 비범하게 만드는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은 여기에 상응하는 정신적인 행위다. 그 창문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뭐가 보이는지 보고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스티븐 킹. 자정 4분 뒤) ]
이를테면, 남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고, 전에는 그렇게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일깨우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게 ‘창조활동’이라면 ‘새로운 시각’ 역시 창조적일 수 있다.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사진가의 눈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태어났고,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中)]
사진찍기는 '숨어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그 '경험의 이면'들을 하나하나 들추는 일이다. 나는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제공하는 보물들을 찾아 다녔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사진은, 새삼스럽게도, 때로 감각적이고 때로는 놀랍기도 하다. 우리 의식을 환기시켜, 앞만 향하던 고개를 돌려, 잠시 일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 거기 어디 그런 게 있었지? “
" 이게 정말, 내가 요즘 그 안에 파묻혀서 허우적대고 있는, 바로 그 일상이 맞단 말인가? "
‘창작한다’는 건, ‘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든다‘는 뜻이다. 사진이 창작활동이 되려면 ‘이미 존재하는 걸 찍는 식’이 아니라 ‘찍음으로써 존재하게 만드는 식’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진은 작품이 되고, 사진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라고 할 수 있다.
좋아해서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음으로써 좋아하게 되고,
사랑해서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음으로써 사랑하게 되며,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기 보다 사진을 통해서 비로소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만들고,
의미 있어서 사진을 찍기 보다 사진을 찍음으로써 의미가 부여되며,
전에 가치 없던 것이 사진을 찍음으로써 가치가 생겨난다.
그렇게 세상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하나씩 태어나고, 기록하고 수집한 행위가 어느새 창작활동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진이 창작하는 것은 결국, 그림이 아니라 '관념'인 셈이다.
[ 법률용어로 보물을 ‘발견’하는 사람을 그 보물의 고안자(inventor)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그 보물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소급효과를 가지면서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발견’이다. (미셸투르니에. 외면일기(外面日記)) ]
사진의 피사체가 되는 현실(사건이나 존재)의 모습은 시각이나 관점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사진은 사진가가 발견한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이다. 만약 그의 시각과 관점이 참신하다면, ‘창조적’이라는 말을 붙여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진가의 발견은 '창조적'일 수 있으며, 사진은 ‘창의적인 기록’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