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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Sep 22. 2023

배회하는 사진

직업사진가와 아마추어사진가의 차이

남이 내려준 지침도 없고 자기 철학도 없는 아마추어사진가는 불나방처럼 빛을 따라 다니게 되어있다.

나는 햇빛이 한 맑은 날에는 주로 시내 길거리로 나간다.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서 그림을 만들기에 좋은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흐린 날은 공원이나 야외로 나간다.

그런 날 찍는 사진에는 모든 세부가 세세하게 잘 묘사된다.

그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원래부터 아름다운 것들 만이 아름다운 사진이 될 수 있다.

공원에는 꽃이 있고 야외로 나가면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행선지가 거의 그 날의 일기예보에 달린 셈이다.

물론 그래서 자주 실패한다.

무엇보다 일기예보가 틀리기 때문이다.

기상청 일기예보의 특징은 세부 사항이 잘 틀린다는 점이다.

날짜별로는 대체로 맞지만 시간대별로는 잘 맞지 않는다.

낮에 흐려진다고 했는데, 해가 질 때까지 하늘이 쨍쨍하다가 이튿날부터 흐려지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맑다고 했지만, 전날 흐렸던 날씨가 오전 내내 이어지고, 오후에 내린다던 비는 이른 아침부터 온다.


기상청 사람들은 그걸 '맞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아니면 (사진은) 꽝이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장소에 있을 때 하늘이 그런 상태여야 한다는 부분이다.

나는 주로 지하철을 비롯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니고, 순간이동은 할 줄 모른다.

맑을 줄 알고 시내 거리에 나와 있다가 흐린 날씨가 계속되고, 하늘이 맑아질 가망이 없어보여도, 짠하고 야외에서 나타날 수는 없다.


날씨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당연히 '빛'이다.

그러니까 나는 빛이 비치는 상태를 보면서 피사체를 정한다.

그리고 어떤 사진을 찍을 지도 결정한다.

날씨가 중요해진 이유는 내가 주어진 것들을 거의 그대로 사진 찍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연출을 하거나 피사체를 만들어서 사진을 찍지는 않는다.

이건 일부러 그렇게 하기로 작정을 한 건 아니고 주된 이유는 그냥 ‘귀찮아서’다.

귀찮다는 것, 이건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그림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아무리 귀찮아도,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림은 그리기에 번거롭지만, 내가 마음대로 그릴 수 있다.

날씨에 얽매일 일도 없고 피사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그림(회화)은 눈 앞의 모델을 그리는 게 아니라 마음에 떠오른 상(像)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진은 빠르고 간편하게 그림을 얻어낼 수 있지만, 의도를 충분하게 반영해서, 마음대로 그릴 수는 없다.

사진은 마음에 떠오른 상을 그리기 보다, 현실의 공간에 존재하는 실물 피사체를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마음대로’를 포기하고, 그 대신 ‘빠르고 간편하게’ 쪽을 선택한 셈이다.

내가 그림(회화)이 아니라 사진을 선택한 건, 그래서라고 생각한다.


연출하거나 피사체를 만든다는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으니 (수고스럽게) 연출을 하거나 만들었을 것이다.

한데 나는 (굳이 수고스럽게) 하고 싶은 것이 없다.

어떤 생각이나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쉽게 말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다.

마음대로 하면 되는 데, 바로 그 ‘마음’이 없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사진찍기가 바로 '그게 뭔지를 알아보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나는 누구이며 뭘 할 수 있을까? "


혹은 나는 그저...


‘빛에 반응하는 좀비’일 지도 모른다.


남대문시장


나는 거의 배회하며 사진을 찍는다.

미리 정해진 건 하나도 없다.

집을 나서기 전에 일기예보를 보고, 나오면서 하늘을 힐끗 쳐다본다.

그리고는 발길이 닿는 대로 어디든지 간다.


지인은 직업사진가다.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건 아니고 고객에게 촬영의뢰를 받아서 사진을 제공하는 경우로 일종의 프리랜서다. 결혼식 같은 가정행사보다는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잡지나 어떤 회사의 사보 등에 넣을 사진을 주로 찍는다고 한다.


일은 그에게 (해결해야 할) '과제'의 형태로 다가온다. 새로운 일에는 항상 새로운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인 내가 보기에, 그는 거의 손발이 묶인 채로 자기 앞의 과제를 맞이하는 것 같다.


직업사진가들은 선호하는 피사체를 임의로 선택할 수 없고 사진의 콘셉트도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그런 건 전적으로 고객인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건물사진을 찍어야 할 때도 있고 인물사진이 필요할 수도 있으며 행사장에 쫒아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피사체가 된 모델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건물이 사진을 찍기에 적당한 공간적 조건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필요한 사진’을 촬영해야 한다.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건물을 찍을 수도 없고 인물을 바꾸거나 엉뚱한 행사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보(社報)에는 사보의 콘셉트가 있을 것이며 정해진 지면이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미 결정된 기사나 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는 거기 맞는 사진을 찍어야 하고, 그런 조건들은 사진을 찍을 때 그의 발목을 잡는 제약사항이 된다. 그런 일이, 때로는 쉬울 수도 있지만, 가끔은 몹시 난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아마추어사진가다. 나는 피사체를 선택할 수 있고 사진의 콘셉트도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다. 그건 물론 돈을 받지 않는 대신 얻게 된 자유다. 사진이 직업인 지인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앞에 두고 골머리를 썩일 필요 없이, 좋은 것만 찾아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도 된다. 멋진 피사체를 만나기만 하면 멋진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멋진 사진이 내 솜씨인지, 피사체 덕분인지 혹은 그런 피사체를 만난 내 행운 때문인지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결과물에 환호할 뿐, 그런 데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좋아하는 제목을 붙이고, 캡션에 그럴듯한 글을 적어서, 사진의 품격을 높여줄 좋은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사진을 찍을 때 처음부터 내가 의도했던 바였던 아니었던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우연히 얻어걸린 사진이라 해도, 그건 나만 아는 사실이다.


둘 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지만 방법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직업사진가에게는 항상 뚜렷한 목표가 있고 일정한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사진찍기는 대게 과제를 해결하거나 프로젝트를 완성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나는 사진찍기를 ‘보물찾기’ 쯤으로 생각한다. 별 계획 없이, 바깥세상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사진찍을 거리를 마냥 찾아 다니는 것이다. 뭔가 찾아내면 셔터를 눌러서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나의 고민은 주로 ‘무엇을 찍을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거의 거기서 끝나버린다. 사진의 성패가 주로 무엇을 선택하는 지에 달렸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고르면 되고, 어떤 피사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걸 찾아서 찍으면 된다. 따라서 굳이 열악한 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한다거나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다. 그럴 시간에 좋은 걸 찾아내는 편이 더 빠를 지도 모른다.


물론 늘 그냥 셔터만 누르는 식으로 간단하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일단 피사체를 선택하고 나면 최선을 다해야 하고, 흡족한 피사체를 항상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탐색은 한계에 도달하고, 어쩔 수 없이 열악한 조건에 있는 것을 피사체로 삼을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그 때는 나도 지인처럼 문제풀이에 골몰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래도 상황을 연출한다거나 조명장치를 쓰는 등의 인위적인 수단을 가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대신에 다리는 좀 아프다.


직업사진가인 지인과 나사이의 대화에는 접점이 거의 없다. 사진을 찍는데 있어서, 각자의 어려움이 있지만, 서로 다른 문제로 고민하기 때문이다. 나는 직업사진가의 일이 마치 주어진 시험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출제자의 의도를 이해해야 하고, 필요한 공식을 찾아 적용해서 답을 내놔야 한다. 고객이 원하는 사진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나타날 것이다. 만약 아무나 셔터를 눌러서 원하는 사진이 찍힌다면 굳이 전문사진가를 불렀을 리 없다. 지인은 내 앞에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때의 고충을 자주 토로했다.


주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해야만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들이었다. 모델이 마음에 들지 않고 빛이 마음에 들지 않고 공간이 마땅치 않을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늘 전전긍긍했다. 어떤 포즈 어떤 표정을 유도해야 할까? 어떤 화각이 좋을까? 조명을 써야 할까? 어떤 조명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언제 어느 위치에서 찍으면 좋을까? 만능 해결사가 되어야만 그는 비로소 자기 일에서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든 것은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을 남들 앞에 내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자주 몰린다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최선을 다해도 별 수 없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사진은 원래, 과장하고 미화하고, 약화하고 은폐할 수는 있을지언정, 아예 없는 걸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래서 어차피 ‘아닌 것’은 아니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게 사진이지만 사람들은 그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진의 미흡함을 오직 그의 탓으로 돌렸다. 원본(?)의 상태는 감안하지 않고, 결과물인 사진만 보면서, 사진가를 나무라는 셈이다.


‘그림이라도 그리라는 건지...’


그는 종종 그렇게 탄식했다.


나의 문제는 ‘내가 뭘 원하는 지, 나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뜻밖에도, ‘자유’가 사람을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대뜸 ‘문제풀이’에 몰두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그는 항상 일을 하며 힘들어 하지만, 나는 뭘 하기도 전에 ‘방황하기’부터 먼저 시작한다. 뭘 찍어야 할지, 어떤 콘셉트로 찍어야 할 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전에 TV에 종종 나왔던 어떤 요리사는 야외에서 주변의 재료들을 활용해서 요리를 만들었다. 미리 정해진 건 없고, 준비도 없었다. 아무도 무슨 요리가 만들어 질지 몰랐다. 그는 주변을 탐색해서 식재료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뭘 만들지 결정했다.


내가 사진을 찍는 방식도 그와 비슷한 것 같다.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에서, 우선 주변에 뭐가 있는 지 살펴봐야 했다. 그리고는 그냥 대뜸 거기 있는 것들을 피사체로 삼아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지침이 없는 건 당연하고, 콘셉트도 철학도 뭣도 없었다. 생각이 없을 때는 감각에 의존하게 된다.


사진의 감각은 물론 시각(視覺)이다. 머리가 텅 비었으니, 일단 눈에 비치는 시각적 자극에 따라 사진을 한 번 찍어보는 것이다. 그 때 선택의 기준은 주로 빛이 된다. 물론 사진에 찍히는 건 피사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빛의 영향을 받은 피사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빛에 이끌려 다닌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빛이 중심이 되는 이유는 ‘변화’ 때문일 것이다. 피사체를 중심에 두면, 사진이 진부해지기 쉽다. 사물은 한정되어있으며 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새로운 걸 찾아내기 어렵고 품도 많이 든다.


따라서 그런 관점을 가지면, 금세 밑천이 드러나서, 진부한 사진을 찍기 쉽다. 한편 빛을 중심에 두고 바라보면, 세상의 모습은 훨씬 더 다양해진다. 선택의 여지가 많아지고, 같은 세상이 약간 참신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빛을 중심에 두고, 그에 따라 피사체를 결정하는 식으로 행동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그러다 보면 카메라에 뭔가가 찍힌다. 별 것 아니다.


감각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다 보면 이런 저런 것들이 카메라에 담기게 마련이다. 무질서한 공간에서 질서를 찾아내고 뜻밖의 패턴을 보기도 한다. 마치 일부러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형상들이 사진을 통해서 발견된다. 아마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었겠지만,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몸이 한 일이지, 머리로 생각해서 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심코 저지른 일들은 설명하기 난해한 경우가 많다. 억지로 설명을 하려다 보면, '설명을 위한 설명'이 되기 쉬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설명이 얼마나 진실에 가깝게 닿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얘기 정도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왜 사진을 찍는 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가 아닐까? 표현이 너무 진부한가?


그러고 보니 '왜 사는 지 알고 싶어서 산다'는 식의 흔한 대답을 흉 내낸 것도 같다. 할 말이 없어, 답변을 회피하려고 얼버무리면서 내뱉는 말장난처럼 보일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 엉터리는 아닌 것 같다. '언젠가는 알게 될 수도 있다'는 바람도 약간 담긴 설명이기 때문이다. 다 치르고 난 뒤가 아니면, 대체 왜 그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일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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