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는 저절로 되던 것들이 나이가 들면 '열심히 노력해야 겨우 된다’는 걸 뒤에 알았다.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뭔가를 자꾸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근육을 잃고, 건강을 잃고, 사람을 잃고 마침내 세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도 잃게 된다.
나이 든 사람들의 비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갈수록 힘이 달리고 의지는 약해지는데 반해 요구되는 노력의 양은 점점 더 많아진다는 점이다.
종 내는 버거워서 그만 손을 들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만 잃지 않으면 그나마 버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남대문시장
나는 아직 '내가 사진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20년 넘게 사진을 찍었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 번도 사진을 체계 있게 배운 적이 없어서’이다. 물론 번듯한 전시회를 열거나 사진집을 출간한 일도 없지만, 그런 건 본질과 거리가 멀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먼저 말한 이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시회나 사진집은 활동의 성과를 남들에게 보여줄 때 하는 행사일 뿐 사진가 조건을 갖추는 것과는 크게 관계가 없지 싶다. 아마 나는 '정식으로 배우지 않으면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일반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사진을 체계 있게 배운 적이 없고, 그래서 ‘사진가’로 불리는 게 겸연쩍다. 앞에 '아마추어'라는 단어가 붙으면 좀 낫기에, (그럴 일이 있으면) 나는 스스로를 ‘아마추어 사진가’라고 불렀다.
20년은 뭘 익히기에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한 때는 주말에나 사진을 찍었지만, 거의 일삼아 찍은 시기도 있어서, 시간의 총량을 따져도 경력이 짧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래서 남들 눈에, 내가 너무 지나치게 겸손을 떠는 것처럼 비치지는 않을지 약간 걱정도 된다. 그러나 나는 진심이다. 전문가가 되려면 집중해서 연습을 하고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는 절차를 반복해서 몸에 익히는, 소정의 교육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책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몸에 배도록 일정기간 의식적으로 훈련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통상, 배우는 과정 없이, 어떤 일을 혼자 오래 계속하게 되면, 일정한 단계에서 발전을 멈추고 한계에 이르게 된다. 교정하거나 기능을 향상하기 위한 분명한 목표나 방향성 없이, 타성적으로 반복하는 시간들은 ‘별 의미 없다’는 것이다. 뿐 아니라 운이 나쁘면, 배가 산에 기어 올라가는 식이 되어, 엉뚱한 스타일로 굳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변칙’ 같은 것이다. 내가 보낸 20년도 그런 식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역시 '지나친' 겸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사진은 ‘학문’도 아니지만, '기술'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학문은 ‘머리에 지식을 집어 넣는 것’이고 기술은 주로 ‘몸에 익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진은 학위나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딱히 ‘기술’이라고 볼게 있는지도 애매하다. 사진을 찍는데 깊이 있는 이론이나 전문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이 시대에, 매뉴얼을 익혀서 (약간 복잡한)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걸 두고 '기술'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테니 하는 말이다. 사실 나는 사진에서 ‘기술’에 속하는 요소는 오래 전에 '카메라의 자동화 시스템'으로 대부분 대체되었다고 본다. 더욱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사진촬영과 현상/인화하는 과정에 약간 남아있던 전문성마저 거의 사라져버렸다.
촬영은 결과물의 상태를 보며 (노출, 초점, 심도 등을) 즉흥적으로 조절해가며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컴퓨터에서 하는 현상/인화과정 역시 일반화되어 ‘전문기술’이라고 할만한 게 별로 없어 보인다. 클래식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스스로를 예술가나 기술자라고 굳게 믿었던 100여 년 전의 그 사진가를 불러와서, 요즘 디지털 카메라를 쥐어주면, 그는 ‘이 일에 자기 역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몹시 당황할 것이다. 도제가 되어 스승에게 전수받은 자랑스러운 사진기술이 전부 카메라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자기 안의 예술가나 기술자가 사라진 셈이고, 동시에 ‘사진가’로서의 자부심마저 잃을 게 분명하다.
물론 그래도 그 한계 안에서는, 여전히 '기술’이라고 불릴 만한 게 남아있긴 하다. 사진촬영에 수반되는 기능들 중 사람이 할 역할이 아직 있고, 그 부분이 이 분야 '기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카메라나 조명 등 촬영과 관련된 기계장치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거기 해당될 것 같다. 그 분야에서는 여전히 미숙한 사람과 능숙한 사람 간에 기능적 차이가 있고, 다른 기예(技藝)들에서 보듯이, 기술이 뛰어나면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은 (자동화 기능을 너무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이 개입해서 결과물에 영향을 줄 여지가 적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기술이나 기능'이라기 보다는 '지식이나 정보'라고 볼만한 성격의 것들이 많다는 얘기다.
특히 사진에서는 뇌의 지시에 따라 몸(특히 손)을 정교하게 움직여서 힘을 조절한다거나 균형을 잡고 동작을 통제하는 등 일반 기예에서 요구되는 핵심 신체능력이 거의 필요 없다. 비행기 조종처럼 복잡하지도 않으면서, 피겨스케이팅처럼 몸에 새겨 습득할 사항도 많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방법을 알면 누구나 할 수 있고, (익히는 과정 없이) 바로 할 수 있으며, 할 줄만 알면 누가하더라도 일의 결과물에 별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 해도, 대부분 획일적/기계적인 형태로만 나타난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자동화 시스템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경우처럼(실제 그렇기도 하다), 기능이 뛰어난 사람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보다, 생산성을 높일 뿐이다.
정작 사진에서 결과물에 인위적인 영향을 줘서, 만든 사람의 흔적을 남기고, 남과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그건 바로 연출과 편집 및 디자인과 관련된 기술들이다. 실제로 사진가가 그런 부분에 관심과 노력을 치중하면 쉽고 간단하게 사진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고 사진에 자기 만의 개성과 취향을 불어넣을 수 있다. 더욱이 요즘은 사진을 주로 인터넷에서 보게 되어, 내가 사진을 보고 있는 건지 그 사람의 편집 솜씨와 디자인 감각을 보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인터넷에 올리는 게 일종의 전시가 되어, 편집과 디자인의 중요성이 더 커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격상 그런 일을 ‘사진 고유의 기능’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연출과 디자인 솜씨만으로 훌륭한 사진가가 될 수 있다면 사진가란 명칭이나 지위는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화가도 필요하면, 모델의 자세와 매무새를 손보는 등 연출에 관여하겠지만, 그게 그의 일에서 핵심인 건 아니다. 그림을 액자에 넣어 갤러리 벽에 거는 일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화가는 그림 그리는 실력으로 평가 받는다. 편집과 디자인도 시각예술이 지닌 여러 요소들 중 일부일 뿐 사진 고유의 기능은 아니다. 따라서 사진에서 그런 측면을 너무 과하게 강조하면 자기정체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도대체 너는 누구인가?’ 식의 질문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 더욱이 사진을 찍는다더니, 연기를 시키고, 뭘 만들고, 그림 그리기에 더 열중한다면, 사진가 자신도 ‘내가 정말 사진을 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그래서 그런 수단을 지나치게 많이 활용한 사진도 사진으로 봐야 할 지 의심하게 되고, 고심 끝에, 오로지 ‘순수사진(스트레이트사진)만이 사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긴 것 같다.
인위적 표현을 강조하다가 자칫 정체성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순수사진의 관점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사진을 평가하고 비평할 지위에 있는 전문가들도 이 부분에 일정하게 선을 그을 필요성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 설 자리가 너무 좁아질 것 같아서 딱 자르지는 못하고, 그래서 그냥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기로 한 것 같다. 현실적 절충안으로, 너무 노골적으로 만들거나 그리지만 않으면 (사진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인 걸로 보인다. 연출보다는 관찰을 통한 시각적 창의성을 더 중요시하고 편집과 디자인은 작업을 마감하기 위한 보조활동 같은 성격으로 봐서, 필름사진에서 해왔던 현상/인화 정도의 수준 만 허용하는 식이다. 물론 ‘사진예술’식으로, 예술이라는 명분 하에서라면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상관없다.
전에 어떤 대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사진학과 커리큘럼을 본 적이 있다. 전문가가 되려는 사람들이 뭘 배우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특히 ‘대학은 학문을 배우는 곳’이라는 내 고정관념 때문에, 사진에서 학문적인 성격으로는 어떤 게 있는 지 그 부분도 궁금했다. 미학(美學)과 사진사史 외에는 대부분 실기와 세미나 형식의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학은 어차피 사진 고유의 영역은 아니니, 학문적인 성격을 띤 과목이라면, 사진사史가 전부인 셈이다. 사진을 학문의 지위에 두기 위해 애쓰는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나는 사진이 그냥 ‘실용지식’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실기와 세미나를 통해 주고받는 건 ‘경험’일 것이고, 학생들은 아마도 거기서 성공한 사진가들의 경험을 전수받게 될 터였다. 역시 사진에 관한 '배움'에서 핵심적인 것이 있다면, 바로 ’경험‘이 아닌가 싶다. 사실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 사소하다. 그건 주로 ‘기기 사용법‘이나, ‘어디에 무엇이 있다‘든지, ‘어떻게 하면 좋다‘는 식의 정보사항들뿐이어서, (학문이나 기술이라기보다) ‘팁tip’이나 ‘훈수’ 정도로 봐도 될 것 같다. 정작 중요한 내용은 전부 개인의 경험 속에 봉인되어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도 없다. 게다가 전할 것이 대부분 감각적, 직관적인 성질이라 말로 주고받기에 더 어렵기도 하다.
기계장치와 사람 간에 일어나는 교감에 대한 문제
실물 세상과 시각이미지에 관한 문제
그런 것들이 정서적인 측면에서 타인들과 공감되어야 하는 문제
이런 것들은 언어로 체계화 하거나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다만 (상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성격의 일은 학교 교실에서 배우기보다는 현장에서 경험을 쌓는 쪽이 빠를 것 같다. 전에 어떤 대학의 영상미디어학과에 입학해서 한 학기만 마치고 그만 둔 적이 있었는데 거기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 커리큘럼에 ‘학문’이라고 볼만한 전문분야가 없었고, 수업은 주로 일반상식에 해당하는 내용과 다른 학과의 전공에 속하는 과목들로 진행되었다. 나는 전문가가 되려고 대학에 갔지만 ‘수업을 통해서는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내가 사진에 관해 배운 게 있다면 오직 하나, ‘세상과 사진 간의 관계’뿐이다. ‘관계’란 물론 시각적 측면에서의 관계 즉 ‘보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세상은 (이 사물은 또는 이 상황은) 사진에서 어떻게 보일까?’
‘이것은 사진을 찍으면 어떻게 보일까?’
사진의 정수(精髓)는 ‘보는 것’과 관계가 있고, ‘극단적으로 보는 것’이 사진활동의 핵심인 것 같다.
[ 사진은 사진 찍히는 사물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 사물이 사진에 찍히면 어떻게 보일까에 관한 문제다. ( 게리 위노그랜드 (Garry Winogrand, 1928 ~ 1984. 미국의 사진가 ) ]
<게리 위노그랜드>가 나와 같은 입장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카메라를 들면 나는 모든 관심과 호기심이 거기(어떤 사진이 찍힐까에) 집중되었고, 특별한 걸 발견할 때마다 내 피사체 목록에 항목 하나를 추가했다. 목록은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였고, 나는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언제 집을 나서야 할 지, 시선은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대강 알 수 있게 되었다. 대수롭진 않지만, 남들은 보지 않는 것을 본다거나 남들은 보지 않는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된 측면도 약간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은 남들은 못 보는 걸 보거나 남들은 생각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보는 바람에 스스로 놀랄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보기'가 단순히 시각적 경험의 파편 같은 것이라기 보다 ‘가시적 세계에 대한 (시각적) 통찰’의 성격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고 반복되며 발전하는 걸로 봐서 그렇게 보인다. 그 안에 나름의 맥락과 원리가 포함되어 있어서, 마음먹기에 따라 (그런 시각적 능력을) 응용하거나 확장하는 것도 가능한 것 같다. 물론 따로 배운 적 없이 혼자 터득한 것이니, 나만의 생각일 뿐,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지식의 성질인지 기술에 속할 지 잘 모르겠지만) 사진과 관련해서, 나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이었고, 내가 오랜 경험을 통해 배워서 얻게 된 ‘자산(資産)’인건 분명하다. 그러니까 카메라와 함께 상당한 시간을 보낸 뒤에 내 몸 속에 체화(體化)되어 남은 게 있다면 오직 그것뿐이다. 사진의 정수가 오로지 그 '특별한 보기'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라면, 내가 그 동안 '헛 짓'을 한 셈이 되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아무튼 내 생각에, 만일 일반인과 사진가를 구분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일반인은 없는 것을 사진가는 가진 무엇이 있다면 그건 바로, '세상과 사진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눈’일 것이다. 나는 어떤 것(어떤 사물 또는 어떤 상황)이 사진에 찍히면 어떻게 보일 지에 대해, 일반인들보다 더 잘 안다. 이게 나의 전문성이고, 내가 사진가로 불릴 수 있다면, 바로 '그런 능력이 있어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학위나 자격증이나 공모전 입상경력이나 전시회나 사진집 출판경력 따위는 아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을 위한 피사체로서의 세상’을 새삼스레 바라보게 되었다. 그건 분명 이전에 보았던 세상과는 달랐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놀랍고 신비로운 풍경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일상이 벌어지는 평범한 공간에도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는 뜻밖의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관심을 기울여서 보면, 나름대로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이치도 깨달았다. 사물에는 다양한 면모가 있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 또한 다양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어디로 가면 무엇을 볼 수 있는지
흐린 날과 맑은 날에는 세상과 사물들이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
이른 새벽과 늦은 오후에 들판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풍경이 시야에 들어올 때 빛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전에는 몰랐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무관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사진은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었다.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즐기지만 다른 사람은 자아를 잃을 정도로 음악에 심취한다. 누군가는 야구경기를 무심코 보지만 야구에 미친 사람은 선수들 전적을 줄줄 외고 감독 성향까지 파악하고 경기장에서 펼쳐질 작전을 예상하면서 경기를 더 깊게 즐길 수 있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강렬한 색채와 미친듯한 붓 자국에 감탄하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지만,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그림의 의미를 새기고 당시의 사건과 화가의 심중까지 살피는 등 그림에 더 깊이 빠져드는 사람들도 있다.
관심이 클수록 지식과 경험이 늘어나고, 지식과 경험이 쌓일수록 더 많은 의미를 새길 수 있으며, 더 강렬한 정서를 느끼고, 더 많이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나는 이렇게 믿는다.
‘깊이가 생길 때 비로소 재미도 지속될 수 있다.’
이 말은 ‘깊이를 만들어낼 수 없으면 재미는 끝장이 난다’는 뜻도 된다. 진부함은 사진이 지닌 최대의 적이다. 같은 방식을 반복하면서 계속해서 같은 결과만 얻게 된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일이 아닌 이상, 재미를 못 느끼면 그만둘 수 밖에 없다.
아마추어사진가들은 대게 그런 식으로 결말을 맞는 것 같다. 진입은 쉽지만, 성취가 빠르고 한계에 도달하는 시기가 매우 짧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만, 깊이를 추구할 방법은 모르는 것이다. 일정한 한계에 다다르면, 벽이 견고해서, 깨고 그 너머로 나아가기가 힘들다. 아마 기계장치를 사용하는 방식인 탓에 생기는 문제일 것이다. 사진은 대상에 매우 의존적이며, 초보사진가는 처음부터 멋진 그림을 너무 쉽게 얻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한계에 이르렀을 때, 좀처럼 헤어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고민에 빠져서 벽 앞을 서성대던 때가 떠오른다.
진부함을 벗어나기 위한 사진가들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난 것 같다. 누구나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며 살아가기 마련이고 사진가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을 통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은 사진가는 창의성을 발휘해 계속해서 새로운 기법에 도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보다 신기하고, 더 충격적인 장면, 더욱 끔찍한 피사체를 찾아 나서야 한다. 남들 시선을 끌려면 놀라움을 주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도를 하고, 더 많은 실험을 하는 방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보지 않아도, 그런 방식에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영악한 계산 끝에, 나는 그 판에 너무 깊게 발을 들여놓지는 않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나는 창의성도 열정도 부족했고 그런 사실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나 스스로 잘 알았고, 그 때문에 그런 판단을 했을 지도 모른다.
<롤랑바르트>는 ‘사진을 보는 사람‘ 즉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사진에 관한 노트 <밝은 방>을 썼다. 그는 ‘사진가가 사람들 시선을 끌기 위해 행한 모든 시도에 대해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놀라움을 주려고, 진부함을 벗어나서 새로움을 추구하려고, 혹은 예술이나 창의성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가들이 해온 모든 활약들에서 나는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어떤 방식들은 너무나 소모적이고, 다른 방식들은 너무 사진답지 않아서, 결말이 눈에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사진의 역사를 통해 예술의 관점에서 행해졌던 대부분의 시도들이 '사진가의 실패'인 동시에 '사진의 실패'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래서 사진의 입장에서 또한 스스로 위로 받기 위해 이런 믿음을 길러왔다. '예술만이 최고의 방식은 아닐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이 예술을 좋아하는 건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다. 나는 원래 그림을 그리다가 사진을 찍게 되었고, 그래서 최소한 사진이 그림처럼 되기는 원하지는 않았다. 사진의 장점을 보고, 거기에 꽂혀서 전향(?)을 했던 셈인데, 그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림이나 예술작품보다는) ‘사진’을 더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여러 논리를 동원해서 내 판단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면서 확증편향을 강화해 나갔을 것이다. 바로 '사진은 그림이 아니며 예술작품도 아니고 사진에서 중요한 건 사실 또는 실제라'는 식의 논지였다. 그래서 최소한 '미(美)의 창조'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될 것 같았고, 그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고 부심했다. 조형미를 위해 시도되는 여러 사진기법들은 자연히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진기법에 완전 무관심했던 건 아니었다. 그 부분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지만, 단지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뿐이다. 좋아하거나 시도하지는 않더라도, 방법을 알아둘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가치 있는 활동에 정당한 가치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고, 사진기술이나 기법에 대해 쓸데없는 환상을 키울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경험이 늘면, 사진만 보고도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많아진다. 일반적인 촬영으로는 사진이 그렇게 찍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 어떤 보조장비를 썼다거나, 어떤 기능,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 지 추측해 볼 수 있다. 만약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진이 그렇게 찍힐 수는 없다’고 판단되면, 어떤 연출을 했으며 촬영 후의 편집과정은 어떠했을 지도 짚어보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비법(?)을 알고 나면,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비슷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다. 그때, 그런 사진에 대한 흥미도 사라진다. 심지어 그 사진을 찍은, 혹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찍게 된, 동기와 관심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알게 되면서 약간 ‘측은하다’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다. 나는 사진에서, 그 보다는 좀 더 ‘더 나은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매체는 제 나름의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글은 머릿속 생각을 ‘표현’하기 좋고, 그림은 시각적 경험을 ‘표현’할 때 유리하다. 사진은 ‘시각적 경험’을 ‘묘사’하기에 좋은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이 ‘표현’보다 ‘묘사’에 적합한 이유는 물론 카메라라는 장치를 이용해서 제작하기 때문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작방식을 생각해보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제작(製作)은 ‘제품이나 작품을 만든다’는 뜻이다. 제작이란 말을 아주 좁은 의미에서 보면, 사진제작은 ‘셔터를 누르고 나서 카메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된다. 그 때 실제로 사진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물체가 반사한 빛이 감광물질에 쪼였을 때 생긴 자국을 고정시켜 그림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런 제작과정에는 ‘표현’이라고 할만한 작용이 깃들 여지가 없다. 사람이 자기 의도를 담아서 일일이 그리지도 않을뿐더러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에 신체활동이 전혀 개입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시각적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기에 좋은 매체인 반면 무엇을 '표현'하기에는 불편한 매체다. 물론 카메라를 흔든다든지 장시간 노출을 준다든지, 촬영 시에 변화를 주는 몇 가지 표현기법이 있긴 하지만 그게 거의 전부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런 한두 가지 수단을 활용하는 걸 두고 ‘표현한다’고 주장하긴 힘들 것 같다. 너무 제한적이고 그 과정조차도 완전히 기계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작된 사진은 사람이 한 표현이라기 보다 자연현상에 의한 물리적 결과물일 뿐이다. 사진가가 굳이 사진을 통해서 뭘 ‘표현’하려 한다면, 촬영 전후의 단계에서 자기 의도를 반영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장면을 연출하거나 피사체를 선택하는 것 그리고 제작된 사진을 가지고 현상/인화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화를 주는 방식이다. 물론 ‘제작’이라는 말을 넓게 사용하면 전부 제작의 과정에 포함된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부분을 더 강조하고 중요시할 지는 사진가 자신에게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사진은 ‘제작에 대한 부담이 거의 없는 매체'이기도 하다. 이건 사진을 바라보는 또 한가지 (독특한) 내 관점이기도 하지만, 다른 매체에서는 볼 수 없고, 오로지 사진만이 가진 고유한 특징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처음 카메라를 들게 만들었던,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사진의 이 독특한 특성에 주목했다. 그림이 너무 쉽게 그려져서, 거의 내가 눈으로 보기만 하면 곧바로 그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셔터만 누르면 사진이 제작되는, '카메라'라는 장치를 이용하는 방식 때문에 얻게 된 특징이자 장점이다. 예술이든 무엇이든, 모든 제작활동에는 ‘제작’ 즉 ‘만드는 과정’만 있는 게 아니다. 관찰과 아이디어도 중요하고, 그 밖에도 작품이나 제품에 관여하는 여러 활동들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에 착안해서 나는 이런 식의 생각도 해 보았다.
'만약 제작에 대한 부담이 없다면, 그 여유와 남는 시간을 나머지 활동 즉, 아이디어나 관찰 등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진가들은 그 여유와 남는 시간을 아이디어 창작에 집중한다. 제작에 대한 부담이 없으니, 자기 시간과 노동력을 거의 전부 아이디어 구상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 기질이 강한 사진가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다양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담아 작품을 발표했고, 그러고들 있다. 퍼포먼스를 하고, 설치작업을 하고, 다양한 방식을 써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는 ‘찰칵’ 사진을 찍어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아이디어가 중요하지 사진 그 자체는 별 것 아니다. 아이디어가 작품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한데 나는 그런 작업이 가능한 이유를 '제작에 대한 부담이 없는 사진 덕분'이라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작품 제작에 대한 부담이 없으니 아이디어에 더 열중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궤변처럼 들린다는 건 알지만, 제법 그럴듯한 설명 같지 않은가. 핵심이 ‘행위’일 수도 있고 ‘그리기’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들을 하기에 하게 된 생각이다.
어떤 선택을 해서 어떤 부분에 집중할 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성향과 선택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의미를 느끼는 일에 열중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 ‘여유와 남는 시간’을 '관찰하고 시각적 현상을 탐구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 같다. 달리 관심 있는 분야가 없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고지식해서 창의성이 부족한 동시에 안일하고 게으르다 보니, 뭘 (행동)하기보다는 관찰하는 쪽을 더 좋아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달리 뭘 하지 않더라도, 보는 행위 그 자체 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다는 식의 신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게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성에 잘 맞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어쨌거나 나는 내가 의미를 느끼는 쪽으로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내 생각이 옳은지 가치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단지 내가 그렇게 믿으려고 애를 쓴 결과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의미를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는 건 각자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이나 평가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시(詩)가 ‘언어의 결정체’라면, 사진은 ‘시각(視覺)의 결정체’다. 다시 화가를 들먹이자면,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도 대상을 관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봐야만 제대로 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는 대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할 수 없다. 그는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대상에서 눈을 떼고 시선을 돌려 화판을 쳐다봐야 한다. 제대로 그리려면 ‘그리기’에도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로 이 부분이, 그가 그린 그림은 상당부분 (실제가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서 '창작된 것'으로 인정받는 이유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사진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피사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사진을 완성할 수 있다. 사진가의 관찰에는 빈틈이 없고, 그는 그야말로 ‘관찰의 끝판 왕’이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을 때, 비로소 매혹적인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그건 ‘세상과 사진 간의 관계’를 배우는 일이기도 했고, 사진의 그런 면이 나는 좋았다. 세상과 사진 간의 관계... 그저 ‘세상이 사진에 어떻게 비칠 수 있는가’ 식의, 어떤 현상에 대한 ‘가벼운 관심’일 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그게 바로 (사족이라고는 하나도 붙지 않은) ‘사진의 정수(精髓)’라고 생각했다. 그저 사진에 비친 세상을 바라보는 ‘사소한 일'이었고, 특히 나는 거기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호기심에, 둘 간의 관계를 파헤치는 일로 부심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뜻밖의 소득을 얻은 셈이다. 한 때 무의미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의미 문제도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하나의 무의미한 몸짓도 이름을 불러주면 꽃이 되는 것처럼, 세상 무엇이든 프레임을 갖다 대서 바라보기만 하면 의미는 저절로 생겨났다. 세상의 의미는 서로에 대한 관심을 통해 생겨날 수 있는 것이고, 사진에서는 프레임이 곧 관심이다. 흔히들 말하듯이, ‘사진으로 세상을 비추거나 사진으로 나를 표현하는 것’과 같은 거창한 문제를 끌어 안을 생각만 아니라면, 그 밖에 따로 뭘 하려고 굳이 애를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고민이 많았고 부침도 있었지만, 결말은 괜찮은 것 같다. 결국 사진에 관한 그 모든 열정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 테니 하는 말이다. 사실 나는 요즘 자꾸 내빼려고만 드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의 뒷덜미를 사진을 빌미 삼아 겨우 붙잡고 늘어지는 중이다. 그러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