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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Oct 07. 2023

사진에 댓글달기의 어려움

사진이란 무엇인가? : 난해한 사진읽기

나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사진가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눈치가 빠르며, 말을 참 잘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아둔해서 말을 지어낼 줄 모르고, 고지식해서 마음에 없는 말을 잘못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의 사진을 열어 보고는 뭐라고 댓글을 적을 지 한 참 고민하다가,

그냥 창을 닫아 버리기 일쑤다.

가끔 억지로 마음에 없는 댓글을 달기는 하지만,

문장에서 그런 내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모양이었다.

내 사진동무는 나에게 ‘그런 식으로 댓글을 달면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을 거’라며

슬쩍 충고를 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내 사진동무는 다소 실망한 눈치였다. 얼마 전 그가 동호회 게시판에 사진을 올렸는데, 거기 댓글을 단 사람들 중에 자기 의도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면서 푸념을 했다. 대부분 건성으로 쓴 인사 치레였고 그나마 진지하게 적은 몇몇 댓글들도 전부 엉뚱한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인적이 없는 해변의 넓은 모래밭을 프레임에 한 가득 담은 사진이었다. 사진 한 가운데 자기 그림자가 수직으로 길게 서있고, 광각의 원근감이 과장되어, 모래밭이 실제보다 넓게 보였으며 사진 상단에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이 아주 약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사진에 댓글을 단 사람들은 하나같이 텅 빈 해변에 우뚝 서 있는, 사진가 자신의 기다란 그림자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눈 여겨 보았던 건 모래밭에 그려진 물결무늬였다. 날개를 펼친 갈매기처럼 구불구불한 무늬가 아름다운 패턴을 이룬 광경이었는데, 파도가 새겨놓았을 그 무늬는 사진가의 발 밑에서부터 시작되어 바다를 향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그는 고운 모래에 새겨진 물결무늬의 아름다운 패턴에 이끌려서 사진을 찍은 것이었고, 그 위에 드리운 자기 그림자는 마지못한 선택이었을 뿐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 해가 등 뒤로 떠올랐기 때문에 바다를 향해 바라보기 위해 그는 해를 등지고 설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16mm 광각렌즈로 코앞의 모래밭을 가득히 담다 보니 자기 그림자가 프레임에 포함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감탄한 나머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게 만들었던 그 모래밭의 물결무늬는 사진에서는 존재감이 다소 약해 보였다. 만약 같은 장면을 오후의 역광에서 바라보았다면 자기 그림자가 사진에 찍히지 않았을 것이고, 솟아오른 모래톱 전면에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뚜렷한 패턴이 형성되어 좀 더 돋보였을 것이다.


인사동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댓글은 일종의 ‘서비스 활동‘같은 것이다. 서로 격려하고 격려 받으면서, 서로의 사진에 관심을 표명하고 동호인 상호 간에 친목을 도모해서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칭찬받은 사진가는 고무되어 좋은 사진을 찍으려고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열정에 찬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동호회는 활성화되기 마련이다. 뿐 아니라 좋은 댓글은 긍정적인 의미의 부메랑이 되어 비슷한 형태의 보상으로 되돌아 올 수도 있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인터넷에 올린 내 사진 밑에 달린 댓글을 열심히 읽는 편이다. 짧고 간단한 문장이지만,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고 두 번 세 번 되 뇌이면서 글을 쓴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를 정확하게 분석하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정색을 하면서 예민하게 반응한다. ‘멋지다!’ 라고 썼는데, 진심일까? 혹시 그냥 인사치레는 아니었을까? ‘감탄했다! 부럽다! 대단하다!’ 라는 찬사는 곧이곧대로 믿어도 괜찮을까? 그 진정성을 내가 어느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까?


나는 종종 남이 써준 댓글에 고무되어 행복해지거나 반대로 풀이 죽어 참담한 심정이 되기도 한다. 물론 우호적인 분위기여서, 후자의 경우는 드물지만, 결정적인 사진을 한 장 올리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오히려 평소보다 반응이 적거나 댓글에 열의나 진정성이 없어 보여서 낙담을 하게 되는 경우는 제법 흔하다. 아마 다들 그렇지 않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터넷 공간에 사진을 올리는 것도 사진을 ‘발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게시판에 공개한 사진가는 댓글을 통해서 자기 사진에 대한 남들의 반응을 접하게 된다. 글의 내용에 사진으로 공유되는 정서가 나타날 것이고, (분명하지는 않지만) 사진에 대한 평가나 호불호도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까 댓글은 발표에 대한 세간의 반응이고 평가나 비평이라고 볼 수도 있다. 비록 역작(力作)은 아닐지라도, 자기 손을 거쳐서 만들어진 걸 발표하고 평가를 받는 사진가의 입장은 진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고수는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초보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남의 사진에 열심히 댓글을 달아보세요.’ 나는 이 말이 같은 질문에 대한 전문 사진가들의 무수한 대답들에 못지않게 ‘명쾌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댓글을 쓰려다 보면 사진과 사진가를 분석하게 되고 의문을 갖게 되고 알게 된다. 특히 정성을 들여서 글을 쓰려고 하다 보면 더욱 그렇게 된다. 알아낸 게 있어야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글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했을까?’ ‘왜 그렇게 찍혔을까?’ 그리고 ‘왜 찍었을까?’ ‘왜 그렇게 찍었을까?’ 식의 질문이 떠오르고, 답을 알려고 애를 쓰는 과정을 통해 사진에 대한 통찰과 식견이 점점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진 읽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 사진언어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사진가가 자신이 갖는 생각을 사진으로 재현하기도 어렵지만 독자가 그것을 읽어내기도 어렵다. 특히 사진 한 장만으로는 더욱 그렇다. 사진은 단독으로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언어는 그 특성상 논리의 문법을 가지고 의미를 제시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만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데 적합하다. 그 감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도 때와 장소 혹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사진은 같은 시각 이미지지만 그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림은 그것을 만들 때 작가가 주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화가의 생각을 재현하기가 더 쉽다. 그렇지만 사진은 본질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다. (이광수. 사진인문학 p144~145) ]


‘우연의 산물’이라고 단정할 순 없겠지만, 사진이 찍는 사람의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매우 적은 방식으로 제작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누군가 쓴 글을 읽고 ‘왜 그렇게 썼느냐?’고 묻거나 누군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왜 그렇게 그렸을까?’라고 의문을 가지는 건 타당하다. 그러나 누군가 찍은 사진을 두고 ‘왜 그렇게 찍었느냐?’고 질문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물론 사진이 완전하게 의도대로 제작된 결과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래밭에 그려진 사진가의 그림자가 의도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듯이, 그냥 그렇게 찍혔을 뿐, 일부러 그렇게 찍었던 건 아니다. 만약 그 부분을 두고 ‘왜 그랬냐?’고 굳이 묻는다면, 할 말이 없는 사진가는,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거짓 이유라도 지어내려고 들지도 모른다.




사진은 좀처럼 사진가의 의도대로 찍히지 않는다. 작가가 단어를 골라서 문장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감독이 의도대로 영화나 연극을 연출하는 것처럼, 혹은 화가가 마음이 가는 대로 붓질을 거듭해서 그림을 완성하듯이, 사진가가 그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 건 아니다. 그런 작업들은 전부 상상력을 통해 그려낸 머릿속 일들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사진은 상상해서 창작해내는 식이 아니라 현실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따라서 사진 제작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피사체 그 자체와 빛을 위시해서 사물들이 놓인 주변상황이지, 사진가의 의도나 상상력은 아니다. 만약 사진가가 '자기는 충분히 의도대로 사진을 찍었다'고 스스로 믿고 주장한다면 그건 필시 착각 때문일 것이다.


사진가의 의도는 장치의 한계 안에서만 유효하며 사진가들은 상습적으로 자기가 원치 않는 현실의 여러 조건들에 의해 방해를 받으면서 사진을 찍게 된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먼저 손에 쥔 장치를 확인하고 모델과 피사체와 그것들이 놓인 주변의 여러 상황들을 파악한 다음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하게 된다. 의도대로 한다기 보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최적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의도를 현실에 맞춰가는 셈이 되어 '사진에 자기 의도를 온전하게 표현했다’고 말하기는 힘들게 된다. 상당 부분, 자기 의도와는 달리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쳐서) 마지못해 그랬던 부분이 있을 거라는 뜻이다. 물론 늘 최선을 다하겠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어느 정도 사진가의 의도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단지 사진가들은 그런 방식에 익숙해진 나머지, 스스로 외부조건에 맞추느라 자기의도를 지레 포기했다는 사실을 깜빡 잊는 것뿐이다.


그래서 사진에서 사진가의 의도를 읽으려는 시도는 종종 ‘난해한 일’이 되고 만다. 의도는 사진에 충분히 반영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의도를 판단하려고 드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해석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는 사진과 거기 찍힌 피사체 사이에서 좀처럼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대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묘사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사진가의 의도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 것도 전해 주지 못한다.


어떤 표현물(작품 등)에서 표현한 사람의 의도를 읽어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변화된 부분을 찾아서 비교해 보는 것'이다.


“원래는 이랬는데 표현된 상태는 저러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랬던 것을) 저렇게 바꿔 놓았을까?"

" 무슨 의도에서 그랬을까?”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림 속 대상의 원래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대체로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그것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화가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했는지가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은 세상에 대한 화가의 해석인 게 틀림없고, 둘을 서로 비교해 보면, 화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는 단서도 얻게 된다.


예컨대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의도는 ‘다분히 관념적으로 세상을 보았던 기존의 방식을 바꿔서 실제 시각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연 속의 색채는 붓으로 물감을 바르듯이 일정하게 칠해진 상태라기보다는 병치된 여러 색들이 우리 시각에 비치면서 서로 섞인 결과물에 더 가깝다. 그런 인상파 화가들의 시도를 보면서 우리는 예전의 그 자연주의 그림에서 보았던 사실적인 묘사방식이 ’실제와 꼭 닮았다‘는 기존의 믿음을 재고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피카소와 같은 입체파 화가들의 의도는 파악하기 더 쉽다. 그림은 2차원의 평면 위에 그려진다. 3차원의 사물이라도 어느 한 방향에서 본 시선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입체파 화가들의 그림은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사물의 모습을 하나의 평면 위에 그려서 합쳐놓는 식이다. 왜 그런 시도를 하게 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화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고, 화가의 생각이 무엇인지 그림이 내포한 의미는 무엇인지 의문을 품고 추론하고 알아볼 근거가 그림 속에 들어있다.


그러나 사진은 그렇지 않다. 사진의 외형은 실물과 거의 흡사해서 사진가의 해석이 개입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진을 볼 때는 어떤 질문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게 되고, 그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유효한 질문이 있다면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왜 그것을 사진 찍었을까?‘이다. 사진가는 자기 목적과 의도에 따라 혹은 취향에 따라서 사진 찍을 대상을 선택할 수 있다. 피사체를 선택하고 프레임에 넣을 것과 뺄 것을 선택하고, 보는 방향과 거리와 피사체를 둘러싼 여러 조건들과 사용할 장치 등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의도대로(마음대로) 어떤 표현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런 선택들을 좌우한 요인은 아마도 어떤 필요나 가치 혹은 정서적, 탐미적인 동기일 것이다. 거기에는 미학적 관점이 깃들 여지가 있고, 약간의 복잡성과 창의적인 면과 어느 정도 숙련된 기술이 필요할 정도의 난이도가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을 ’해석할 대상‘으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어쨌거나 사진 그 자체는 ’거의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 사진가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해서 '의미있게 변형된 상태'라고 볼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사진에서 해석할 게 있다면, ’사진 그 자체‘보다는 ’사진가의 행위‘일 것 같다. 그는 왜 사진을 그렇게 찍었으며, 왜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려고 하는가?



[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가 입고 있는 옷, 서 있는 자세, 얼굴표정, 배경 등이 주요 기호다. 그 기호들은 이미지 문자 그대로 의미를 갖는 외연과 그 장면이 한 단계 더 만드는 의미인 내포를 갖는다. 외연은 대상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는 단순한 인지를 말하는 것인데, 한 고등학교 여학생이 교복을 입고 있으면 학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외연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사람들은 그 교복이라는 기호가 문화적으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을 인식한다. 고등학교 교복을 보면서 세월호 참사를 느끼고 이민가고 싶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교복 이미지를 텍스트로서 기호적으로 읽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외연과 내포는 전형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다. 누구나 다 다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사진가가 여학생 교복을 통해 세월호 참사로 가난한 이의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의 대한민국을 그리고자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이미지 단독으로는 그 생각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하다. (...중략) 사진으로 뭔가 생각을 담아내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텍스트다. 사진의 텍스트는 크게 제목, 캡션, 그리고 작업노트로 구성된다. 제목은 사진가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국화꽃을 찍어 놓고 ‘국화’라고 제목을 달면 그 안에는 특별한 생각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중략) 이 경우 그 사진 밑에 ‘2014년 여름 팽목항에서‘라는 캡션을 달아 놓으면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이광수. 사진인문학 p146~148) ]


살다 보면 할 말이 없는데도 뭔가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나는 남의 사진에 댓글을 달 때, 내가 바로 그런 상황에 놓였다고 느낀다. 기호학의 이론을 적용해서, 사진이미지에 내포된 의미를 읽어 보려는 시도 역시 비슷한 입장에서 나온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의도대로 제작되지 않은 작품을 두고 어떤 해석을 하려고 드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물감을 흩뿌리는 방식으로 제작된 그림(액션 페인팅)에서 물감 한 방울이 왜 그 자리에 떨어졌는지를 두고,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사진가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조절하고 통제해서 사진을 의도대로 제작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사진의 피사체를 떠올린 뒤, 그 장면을 현실의 공간에 꼭 같이 제작하고, 조명과 외부 상황을 완벽하게 연출해서 사진을 찍으면 된다. 혹은 원본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찢어 붙여서 새로운 사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런 사진이라면, 사진의 피사체가 된 실제현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거나 있었더라도 서로 관계가 끊어졌으므로, 별도의 해석과 의미부여가 필요한 창작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진은 (내가 생각하기에) ‘파격’이고, 그게 사진에 더 가까운지 아니면 퍼포먼스나 설치미술 혹은 회화에 더 가까운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지금 나는 그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진’을 말하는 것이고, 개념미술의 수단이나 회화 작품를 위한 재료로 활용된 사진을 두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내 생각에 ‘사진’이란, 어쨌거나 실물을 앞에 놓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서 찍는 사진을 말한다. 그리고 (찍기 전의 일이나 그 이후의 일에 대해 가치를 폄하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부분이 찍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띠고 등장하는 사진이라면 ‘일반적인 사진’은 아니라고 본다.



힘들게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날씬해진 몸매를 자랑하고 싶은 친구에게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린다'고 말하면 실망할 게 빤하다. 진정성이 엿보이는, 성의 있는 댓글을 쓰려면 사진을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사진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읽고, 그 부분을 적시하는 글을 썼을 때, 댓글의 효과는 배가되고 상대방의 호감도 살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서로의 생각과 정서가 일치하고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구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항복하고 모든 것을 다 내주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댓글을 쓰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나는 그 이유가 댓글을 쓸 때, ‘사진을 해석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사진은 사진가의 의도와 목적을 궁금하게 만드는 퍼즐'이 아니다.


해석은 ‘여지’가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고 해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 때 해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사진이 가리키는 것은 늘 분명하다. 단지 (사진가가 말을 해주지 않는 한) 관람객이 그걸 알 수 없을 뿐이다. 모르는 이유는 정보가 부족해서지, 생각이 모자라거나 상상력이 빈약해서는 아니다. 답은 오직 하나뿐이고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전혀 없다. 오히려 빈약한 정보를 기초 삼아 무리하게 해석을 시도하면, 오류는 불가피할 것이고,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사진을 찍은 사람이다)은 당신을 딱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본질적으로 사진에서는 관람자가 굳이 의미를 알아 맞추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고 사진가도 의미를 창작해내려고 고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들 콜라병을 주워 들고 그게 무슨 물건인지 고민하는 부시맨이 될 필요는 없다.



내가 아는 어떤 사진가는 설악산 정상에 올라가서 운해로 휘감긴 산봉우리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사진동호회 게시판에 올리고 제목에 ‘설악의 꿈’ 이라고 썼다. 그리고 사진 밑에 그 사진을 찍기 위해 무수히 반복해서 산을 오르게 만들었던 자기 욕망에 대해 몇 줄의 글을 적어 털어놓았다. '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만나서 최고의 설악산 사진을 찍겠다'는 욕망에 대한 글이었다. ‘설악의 꿈’ 이라기보다는 ‘설악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겠다’는 자기 자신의 꿈일 터였다. 그는 그 꿈을 거의 이룬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완벽한 설악산 운해사진은 본 적이 없다. 태양의 밝기는 사진에 흠을 낼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지만 빛이 풍부했고, 능선을 타 넘어가는 운해의 농도도 적절했다. 가릴 것은 가려지고 드러날 부분은 적절히 드러난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하지만 나는 댓글에 몇 개의 찬사 외에 달리 쓸 말이 없었다. 그의 체력과 끈기와 행운에 보내는, 그리고 설악산과 자연현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였다.


제목에 의미가 담겨있고 캡션이나 메모가 적혀있다면, 그 부분이 사진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단서가 된다. 댓글을 쓸 때는, 어쨌거나 그 부분은 존중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사진가는 (열정이나 행운보다) 자기 솜씨나 개성에 대해 칭찬받고 싶어 할 수도 있다. 남다른 표현력과 개성과 차별화된 시각 같은 걸 언급하면 더 좋아하는 것이다. 아마 사진에서는 그런 걸 드러내는 게 유난히 어렵고, 그게 ‘최상의 칭찬’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저 ‘아름다운 장소’라든지, ‘고생이 많았다’든지, ‘열정이나 행운’ 식의 말만 적으면 서운해 할 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지치지 않는 열정이 부럽습니다.’ 식의 댓글을 보면 내가 마치 저돌적인 멧돼지라도 된 것 같다. 물론 열정은 잦은 기회를 갖게 해주고, 기회가 많으면 행운을 맞이할 확률이 높아질 뿐 아니라 솜씨도 향상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열정은 좋은 자질이고, 특히 사진에서는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최고의 덕목이지만, 다만 ‘그것뿐’이라면 왠지 서운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사실 통상적인 풍경사진은 일종의 장식이며 구경거리일 뿐이다.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위한 장식물로서의 의미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진가는 아름다운 사진을 얻기 위해서 그 장소에 갔으며 그 순간을 선택한 것이다. 풍경사진은 흔히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되며, 선호하는 장치나 선택하는 피사체에 대한 것 외에 사진가 고유의 무엇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사진가의 작품적 기교나 철학이나 관점이 아닌 그의 행위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자연과 풍경 그리고 사진에 대한 지치지 않는 사랑과 끈기와 그로 인해 빚어진 인생 역정같은 것이다. 실제로 불치의 병이나 장애를 극복하고 혹은 가정적 불화마저 감수하면서, 풍경을 만나려고 아름다운 곳으로 찾아 다니면서 사진에 몰두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진가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야생화 사진이나 곤충사진 등은 일반 풍경사진과 약간 다르다. 일반 풍경사진에 비하면 사진가의 기교와 기술에 따라 사진이 달라질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기록의 의미를 띤 사진이 아니라면, 본질적으로는 풍경사진과 차이가 없다. 오직 형식미를 위해 그런 피사체를 선택해서 사진을 찍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인물사진은 주로 촬영기법이나 장비에 대해 언급하게 된다. 인물사진은 (연출력을 포함해서) 사진가의 기교가 가장 잘 드러나는 사진이며, 사용되는 장비의 등급에 따라서도 결과물이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다. 다큐멘터리나 보도사진에는 사진가가 제목이나 캡션 형식으로 뭔가 적어 두었을 것이다. 피사체가 된 그 현실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관점이 무엇인지 헤아려보고, 공감할 부분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사진들도 사진가에게 별 다른 의도(혹은 용도)가 없고, 고식적인 제목이 붙어 있거나 추가된 텍스트가 없다면, 역시 풍경사진의 일종으로 보면 된다.



나는 내 사진에 달린 댓글을 읽으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뭔가 있어 보이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는, 그 난해한 사진에 뭐라고 댓글을 써야 할지 고심했을 동호인들의 곤혹스러운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특별한 대상을 피사체로 삼은 것도 아니면서, 사진이 별로 아름답지도 않다는 점이 그 분들을 난처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뭔가 있을 거야!“


하지만 칭찬을 해 주려고 해도 칭찬할 거리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멋진 그림도 아니면서 이야깃거리도 될 수 없는, 그 애매한 이미지를 더욱 난해한 것으로 만든 데는, 아마 내가 사진에 대해 유난히 진지한 입장이었다는 점도 한몫 했지 싶다. 뭔가 좀 '아는 체 했다'는 뜻이다. 사진 읽기에서 문제가 되는 사진은 소위 ‘심상사진’처럼, 사진가의 생각이나 관점이 강조된 것처럼 보이는 사진들이다.


풍경일 수도 있고 꽃이나 도시의 거리나 인물사진일 수도 있지만, 왠지 그저 단순한 풍경이나 자연이나 인물사진은 아닌 듯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처럼 보이지만, 사진가가 그런 의도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우연으로 보이지만, 그냥 ‘찍혔다’고 보기에는 사물들의 배치상태나 전체적인 구성을 볼 때, 짜임새가 있어서, 마치 의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 짜임새는 어느 정도 기다림을 통해서 얻은 것이긴 하다)


그래서 더욱 그 안에 뭔가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통념상 사진 찍을만한 대상이 아닌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놓았기에,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은 도리어 ‘그가 왜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 ‘그 사진을 왜 보여주는지‘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의미를 읽어 내야만 할 것 같은’ 압력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게다가 제목이나 캡션을 통해서 단서라도 알려주면 실마리를 풀어 나갈 수 있겠지만, 사진가의 의도를 추정할만한 어떤 언급도 없다. 시내 길거리를 찍은 사진이지만 평소의 복잡한 도시거리나 혹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텅 비게 된 거리를 시사(示唆)하는 장면도 아니고, 그 지역을 상징하는 시설물을 찍은 것도 아니다. 그 사진은 명동이나 종로거리에서 찍었지만 사실상 종로나 명동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다시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보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사진이 특별히 아름다운 것 같지는 않다. 구성이 조화롭고 색조가 약간 세련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대단치는 않아서, 사진가가 그 부분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하기에는 (아름다움의 정도가) 미흡한 편이다. 그러고 보니 사진 안에 여러 가지 사물들이 놓인 위치가 뭔가 말을 하는 것도 같다. 다시 의미를 읽으려고 (기호학의 원리대로) 눈에 보이는 ‘외연’ 너머에 ‘내포’된 의미를 읽어보려 해도, 막연해서 상상력이 잘 닿지 않는다. 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찍는 모든 사진은 '미흡한 풍경사진'이다. 나는 요즘 주로 (풍경보다는) 일상의 공간에서 평범한 것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풍경사진'은 의미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면 된다. 그 앞에 굳이 '미흡한'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아름다운 정도가 그렇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그 사진들은 충분히 아름다운 것을 찾아가서 찍은 사진은 아니기에 별로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장소와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카메라로 포착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대상과 그 순간이 담긴 풍경사진이다. 비록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 두기에는 적절치 않지만, 일반적인 풍경사진처럼, 그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아름다움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생각한 적이 없다. 만일 내 사진에서 그 밖에 다른 것을 읽는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사정일 뿐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피사체를 고르는 데 있어서도 일관성이 하나도 없다. 야외풍경 사진도 찍지만 요즘은 주로 시내 길거리로 나가서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찍는다. 거리사진 뿐 아니라 재개발이 진행 중인 남루한 주택지에서 사진을 찍을 때도 내가 원했던 건 ‘아름다움’ 뿐이었다. 따라서 사진에 ‘아름다움‘ 외에 내가 의도한 건 전혀 없다.


만드는 사진이 아니라면, 나는 대부분의 사진이 의도하는 바는 결국 ‘아름다움’뿐이라고 믿는다. 그것도 은유적이거나 관념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오직 감각적(시각적) 아름다움이다. 이건 정직한 고백이다. 어차피 의도대로 되지도 않을 일에 의도를 품는다면 고통을 자초할 뿐이다. 그래서 사진은 (어떤 지독한 형식주의자의 주장처럼) '황금 비율 같은, 디자인과 균형의 다양한 보편 법칙들을 가지고 선이나 모양을 만든 것'이다. 어떤 사진에서는 ‘그림’냄새가 나고 다른 사진은 ‘사진’냄새가 날 뿐, 모든 사진은 근본적으로 같은 미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 속에는 '일상의 공간을 뒤져서, 제일 멋진 것을 만나 최상의 순간에 사진으로 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그건 최고의 설악산 운해사진을 찍으려고 전 날 오후에 산에 올라가서 비박을 하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순간을 기다렸던, 그리고 같은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했던, 산악사진가의 마음과 전혀 차이가 없다. 피사체가 다를 뿐 같은 마음인 것이다. 다만 그의 사진을 구성하는 재료가 설악산과 일출과 운해라면 내 사진의 재료는 빛과 행인과 쇼윈도우 등인 것뿐이다. 재료의 차이가 사진의 아름다움을 판가름 짓는 결정적인 차이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단지 유명한 풍경촬영지나 비슷비슷한 꽃 사진에 식상해서 진부함을 벗어나려고 색다른 대상을 찾아 다녔던 것이다. 아마추어 사진의 빤한 외형에서 벗어나 다소 낯선 장면을 담고 싶었던 것 같다. 특히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만 (혹은 찾아 가기만) 하면,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일반적인 풍경사진의 전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대로 적용하면, 좋은 대상을 못 만나면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한다는 뜻이 되었고,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건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다. 나는 그 부분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서 소모적인 피사체 경쟁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사진에서 나의 역할과 영향이 차지하는 비중을 조금 더 늘리고 싶었으며,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포기하면 그 대신 그 만큼의 참신함으로 사진을 채울 수도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물론 생각처럼 일이 잘 된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찍은 길거리사진은 사진동호회 갤러리의 설악산 운해사진보다 아름답지 않지만, 그 설악산 운해사진은 미 서부의 <엔텔로프 캐니언>이나 그리스 <산토리니>에서 찍은 어떤 풍경사진에 비하면 다소 덜 아름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차이 역시 ‘피사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사진 뒤에는 늘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을 생각한다면, 오직 ’절대적 아름다움‘이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사진을 평가하는 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솔직히 나는 사진을 통해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전제 자체에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성과 존재성을 빼면 사진은 아예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의 아름다움은 '어느 순간 어떤 존재의 아름다움'일 뿐, '절대적인 아름다움'일 수는 없다. 상업사진가가 스튜디오에 찾아온 손님의 외모 때문에 자기가 아름다운 인물사진을 찍지 못한다고 불평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모든 사진가의 입장이 그와 비슷하다고 믿는다. 손님을 바꿀 수는 없는 것처럼, '피사체를 바꿔버리는 식'이 주된 해법이 되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아무튼 나는 어느 순간에 내게 주어진 걸 대상으로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었고, 비록 미흡해도, 정답 대신 내가 풀어낸 ’해답‘이라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도 괜찮을 것 같다. 의미를 '내가 최선을 다했는지 여부'에 두면 된다.



지금까지 내 사진에 달린 댓글 중에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내용은 이런 것이다.


“시내 길거리로 카메라를 들고 돌아 다녀 봐도 좀처럼 그런 사진 찍기 어렵던데, 어떻게 늘 그럴 수 있는지, 참 대단하십니다!”


풍경촬영지로 찾아 가면 누구라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그 때는 주로 확률과 행운에 좌우되는 경향이 크지만, 열정을 잃지 않고 반복해서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멋진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일상의 공간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약간 다르다. 평범한 눈을 가진 사람들은 사진찍을거리를 하나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특별한 눈이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


만일 '대단하십니다 라고 쓸 것까지야!' 식으로, 과분한 칭찬을 하는 게 낯간지럽다고 생각되면, 한 낮에 카메라를 들고 시내에 돌아다니면서 직접 사진을 한 번 찍어보기를 권한다. 카메라가 진실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면, 우리 주변의 일상이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덜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는 미감이 뛰어난 유적도 별로 없고, 컬러풀한 의상을 차려 입고 카메라의 시선에 유난히 너그러운 행인들도 만날 수 없다. 기하학적 구성은 엉망이고 눈 앞에 보이는 색상과 명암의 톤은 조화로운 상태와 거리가 멀다. 물론 사진을 위해서 준비된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고, 거기서 그럴듯한 사진을 한 장 건지려면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도 여전히 아쉬운 점은, 내가 발견한 그 아름다움이 별로 대수롭지 않아서,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도무지 ‘내가 오직 아름다움만을 보여주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할 정도라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설악산에 올라가서 비박을 하지는 않을 것이고, 미국서부나 그리스 등지로 여행을 떠날 생각도 없다. 다만 다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시간이 갈수록 나는 좀 더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눈은 점점 더 발전할 것이고, 나는 이 세상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의 비밀을 더 많이 터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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