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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Oct 09. 2023

·사진이 그림인가?

사진이란 무엇인가? : 사진과 그림의 차이

사진을 그림(繪畵)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그림과 비교하고,

그림처럼 다루면,

거기에는 답이 없다.


명동거리


책이나 블로그나 그 밖에 공개될 가능성이 있는 공간에 글을 쓰는 이유는 대부분 마음속에 간절하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일은 아주 힘들고 귀찮아서 간절하지 않다면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별 생각이 없다거나 의도가 간절하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공연히 글을 써서 남이 읽게 만든다면, 그는 실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뭔가를 전달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일 터이다.


'사진이 그림인가?'


솔직히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심각하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자꾸 말을 꺼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은 마치 그렇게 믿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고 싶은 동기가 작동해서 나를 자꾸 글을 쓰게 부추겼다. 물론 '개인의 신념에 관한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종교가 아닌 다음에야, 신념은 어느 정도 과학적 합리성의 바탕 위에 서있어야 옳지 않을까?




나는 사진그림에는 좀처럼 공감하지 못한다. 또한 그림과는 달리, 사진은 ‘피사체나 대상의 이미지로서 존재할 때만 의미를 띨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 한 장의 사진이 어떤 볼거리를 주든 그리고 그것의 방식이 어떠하든, 그것은 언제나 비가시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사진이 아니기 때문이다. (롤랑바르트. 밝은방) ]


사진가들은 매우 실망하겠지만,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사진이 지시하는 대상’이다.


“야~! 여기 어디기에 렇게 아름다울까?”


사진은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로 그곳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림(회화작품)을 바라볼 때는 ‘그림’을 본다. 아무도 그게 어디인지 누구인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흔히 알고 있듯이, 그림(회화작품)은 모델이 되었던 그 사물이나 사건에서 분리된 채 독립해서 혼자 의미 있게 존재할 수 있다. 애초 작화(作畵) 시의 그 모델은 화가에게 영감을 주고 아이디어를 제공하지만, 완성된 그림은 온전히 화가의 숨결이 깃든 그의 창작물이다. 그러나 사진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 현실의 맥락에서 분리된 사진에서는 어떤 ‘숨결’같은 걸 느낄 수 없으며 껍질만 남아 공허하고 말없는 환영처럼 되고 만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닌 근엄하게 생긴 어떤 노인이 있는 사진, 사랑했던 그녀가 아닌 어떤 아름다운 여자 모습이 담긴 사진, 전날 밤 내가 힘들게 산에 올라가서 비박했던 설악산 봉우리가 아닌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어떤 산의 운해사진, 길거리사진가로서 나의 애환이 깃든 그 명동거리가 아닌 짜임새가 있고 멋진 거리사진 등에서 나는 별 감회를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진도 그림처럼, 그 (피사체가 되어 카메라 앞에 놓여있던) 현실에서 독립해서 '혼자 의미 있게 존재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진을 찍기 전에 나는 취미삼아 그림을 그렸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갖추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무슨 대단한 예술작품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비슷하게 묘사하는 정도만 해도 난제였다. 데생을 하려고 비너스 상을 놓고, 처음으로 화판 앞에 앉았을 때 일이 생각난다. 나는 눈앞에 놓인 석고상을 바라보다가 선 하나도 긋지 못한 채 그냥 일어섰다.


하얀 석고상 안에는, 아무리 찾아 보아도, 선이 없었다. 나는 종이 위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비너스 상의 코와 뺨은 면과 면으로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마와 눈두덩이나 입과 턱이 이어지는 부위도 마찬가지였다. 굽이치는 머리카락 다발은 굵고 둥근 뭉텅이일 뿐, 거기에도 선은 없었다. 단순히 연필을 들어서 보이는 대로 선을 긋고 칠을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해석이 필요했던 것이다.


긴 고민 끝에, 나는 그게 '3차원의 공간을 해석해서 2차원의 종이 위에 표현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선이 없는 곳에서 선을 찾아내야 하고, 공간이 없는 평면의 종이 위에 공간을 그려내야 하며, 흑연가루나 물감이 아닌 것들을 흑연가루나 물감으로 표현해야 하는 일이었다. 베끼거나 복제하는 게 아니라 해석하는 일이었다.


체계나 규칙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현실의 외형을 해석해서 조형적 체계를 읽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난해했다. 그것은 곧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는 혁신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눈 앞에 놓인 실제 현실을 바라보고 그것을 조형으로 해석하는 문제 뒤에는 더 어려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선을 제대로 긋는 기술을 몸에 익히는 문제였다.




네모난 종이 위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서 적당한 굵기와 원하는 형태로 선을 긋는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연습과 피나는 훈련이 필요했다. 선이 하나 그어지면, 그 위에 새로운 선이 이어지거나 겹쳐지거나 혹은 엇갈려서 그어졌다. 새로운 선의 위치와 방향과 굵기와 길이는 이제  완성될 그림을 지향하지만, 먼저 그어진 다른 선과의 관계 하에 결정되었다. 그렇게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은, 수없이 많은 선들이 모여서 그림을 이루었다.


손으로 그은 선에는 나의 모든 게 다 담겨 있었다. 선을 긋는 순간의 망설임이나 머뭇거림 같은 게 거기 고스란히 나타났다. 내가 깨작거리면서 그은 선들은 서툴고 무디고 조잡하게 보였다.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먼저 선 긋는 연습부터 따로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그런 난제들을 해결해봤자 그림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를 갖추는 정도에 불과했다. 시나 소설을 쓰기 위해 이제 막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익힌 정도였고, 화가가 되려면, 갈 길이 아득히 멀었다.


그림에는 서툰 내가 보여서 불만스러웠지만, 사진에서는 내 손길이 느껴지지 않아서 허전했다. 그림에서, 나는 내 손으로 그은 선이 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선이 모여서 만들어진 그림도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서툰 그림이 '내 것'이라는 사실 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림 안에 수도 없이 그어진 선 하나하나에 내 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림을 어디에 갖다 놔도 내 그림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진을 찍을 때 나는 눈앞의 대상을 (그림을 그릴 때처럼) 해석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부분을 선으로 표현할 지 판단하거나, 선을 어디에 그을 지 고민할 일도 없었다. 물론 사진 안에 내 생각과 의도를 집어 넣을 방법도 거의 없었다. 나의 성격이나 취향이나 신체적인 특성같은 게 저절로 사진에 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사진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진의 어느 부분에 내 흔적이 들어 있는지 내 스스로도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진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마치 마트에서 집어온 물건처럼, 어떤 제조사의 상표를 달고 나온 것만 같았다.




덕분에 나는 그림(회화)에 대해 일종의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또한 화가의 솜씨를 동경하고 존경심도 갖고 있다. 그림을 잘 그리려면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만 하고, 긴 시간 고된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화가처럼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소질을 타고나지 못했거나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다.


카메라를 이용하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세상을 그림으로 해석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고, 그림 그리는 기술을 익히려고 긴 시간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일은 카메라가 맡아 주었던 것이다. 나는 즉시 카메라를 마련했고, 이후로 화가처럼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카메라가 포착한 아름다운 그림을 보면서, 나는 내 그림솜씨에 취해 무한한 긍지를 느끼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늘 이런 의문이 따라 다녔다.


멋진 사진을 찍은 나는, 내 솜씨나 성과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될까?

멋진 그림을 그린 화가처럼 말이다.


나는 항상 내 사진이 낯설어 보이기만 했다. 내가 찍은 사진을 걸어두고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쳐다보곤 했다. 사진에 신기한 게 찍혀 있으면 나도 신기했고, 놀라운 장면이 찍혀 있으면 나도 놀랐다. 사실 알고 보면 나도, 내가 찍은 그 사진의 관람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창작한 작품이라면, 그토록 낯설게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 대신에 뿌듯해 했을 것 같다.


다양한 의문들이 떠올랐다.


사진에 표현된 이 아름다움은 정말 내가 만든 걸까? 아름다운 사진이 완성되는데 있어서 내가 기여한 바는 얼마나 될까? 카메라는 그저 도구에 불과하고, 그래서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항상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는 있는 걸까? 그러나 실제로 사진의 성패는 장치와 대상이 가진 속성에 의해 주로 좌우되었다. 기회가 가장 중요했으며, 촬영은 현실의 여러 조건들에 의해 심각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사진이 나의 해석인지, 혹은 (사진을 찍은 다음) 이제부터 내가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늘 의심스런 눈길로 사진을 쳐다보게 되었다. 내가 표현한 걸까? 아니면 어디서 온 걸까? 피사체일까, 광학적 현상일까? 이 사진을 찍은, 혹은 사진을 이렇게 찍은, 내 의도는 뭘까? 한 장의 사진을 두고, 찍은 사람의 의도를 묻는다는 게 타당하기나 할까? 어떤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까?




사진그림에 공감할 수 없는 이유.


얼마 전, 소설가 김영하가 한 TV 토크-쇼 프로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진행자는 '근래 일본에서 소설을 쓰는 로봇이 발표되었고, 미래에는 AI가 소설가를 대체할 거라는 얘기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로봇이 사람 소설가를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사람들이 소설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소설가도 우리와 같은 한계를 가진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획일적, 기계적이라든지 개성이나 창조성 같은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그는 그렇게 말했고, 나도 왠지 그 부분이 핵심적인 이유가 맞는 것 같다.


'공감'은 표현을 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정서적 반응일 것이다. 그도 나처럼 어려움을 겪고, 두려움을 견디고, 한계에 부딪쳐서 힘들어 하고, 나태한 자신을 채찍질하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인간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만약 소설에서 죽음, 사랑, 슬픔,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 내가 그걸 ‘로봇이 썼다’는 사실을 안다면, 거기에 무엇이 어떤 식으로 쓰여있든지, 나는 결코 공감지 못할 것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을까?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도무지 '진실성이 결여된 말'을 들을 때처럼, 마냥 짜증스럽기만 할 것 같다. 생전에 어려움이라고는 겪어보지도 못한 사람이 해 주는, '삶에 대한 조언'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영혼 없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같은 이야기를 사진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공지능이 작가를 대체하는 사건은 그림(회화)의 세계에서는 180년 전 카메라가 나왔을 때 이미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을 'AI를 이용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서는 카메라에 붙은 단추만 누르면 '그림'은 그려진다. 카메라 성능이 발달하고 디지털화되면서 사람이 하던 일부 역할까지도 점차적으로 카메라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카메라는 거의 AI에 가깝게 진화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초점을 잡아주고 명암의 분포상태를 분석해서 노출을 맞춰줄 뿐 아니라 사람 얼굴을 인식해서 자동으로 피사체를 추적하고 시선을 감지해서 촬영자가 원하는 목표물을 바라볼 줄도 안다. 사람은 어떤 장소로 카메라를 이동시키고, 위치를 정하고, 장치를 조작하는 데 약간만 개입하면 된다. 선택은 사람이 하지만 그림은 인공지능, 즉 카메라가 그리는 셈이다. 


이런 얘기는 몰론, 사진을 '오로지 그림으로 본다'는 전제가 있는 경우에만 진지하게 논의해 볼 가치가 있다. 사진에서 AI에 의해 자동 처리되는 부분은 단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다. 촬영대상을 선택하고, 장소와 위치를 이동하고, 피사체와 교감하는 역할은 여전히 인간이 하기 때문에 '사진그림 그 자체'보다는 그런 부분에 더 많은 의미를 둔다면, 사진에서 그림은 매우 사소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진의 형식미에 올인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사진은 오로지 그림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 같다. 그건 아마추어 사진클럽에 올라오는 사진들만 봐도 알 수 있다. 후보정을 통해 사진을 (거의 그림을 그리듯이) 고치고 치장할 뿐아니라, 촬영할 때 피사체를 선택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오로지 회화적 구성미 가 전부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러면 무게중심이 ‘AI의 역할’ 쪽에 완전히 기울어서, 사진은 (마치 인공지능이 쓴 소설의 경우처럼) '영혼 없는 그림'이 된다.




그런데 사진이 굳이 그림이 될 필요가 있을까?


[ 회화는 그저 피사체를 재현하거나 가리킬 뿐이다. 그렇지만 사진은 피사체와 닮았을 뿐 아니라 피사체에 대한 봉헌물이다. (수전 손택. on photography) ]


김태희를 찍은 사진은 김태희를 대신할 수도 있다. 나는 동네 마트 선반 위에 놓인 커피믹스 박스에서 그 여배우 사진을 봤을 때, 내 마음이 온통 그녀의 이미지가 풍겨내는 갖가지 정서들로 넘쳐나는 현상을 경험했다. 마음 속에 김태희가 연기한 영화와 드라마 속 인물들이 불려 나왔고, (닮았다는 이유로) 아주 오래된 내 추억에 숨어있던 제3의 인물까지 소환되어 나타났다. 사진에는 그 안에 담긴 대상의 '혼(魂)' 같은 게 깃들어 있는 것 같다.


그림(회화)은 '화가의 해석'이다. 어떤 그림이 비록 눈앞의 현실세계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해도 해석 이상이 될 수는 없다. 그림은 그린 사람의 기술은 물론, 개성과 그가 가진 정서와 신체적 특성 등 온갖 것이 다 영향을 미쳐서 만들어진 '편견 가득한 해석'이다. 그러나 사진은 그렇지 않다. 사진은 그림 이상의 무엇이 될 수도 있다. 사진은 현실의 그것(혹은 그 사람)이 지닌 메시지를 그대로 담아내서, 마치 그것 자체가 여기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아마 광고주도 그런 효과를 노리고, 굳이 그 여배우를 광고모델로 썼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사랑스러운 여인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그녀가 그 동안 출연했던 모든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의 이미지까지 포함되어있다. 어쩌면 개개인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과거의 그녀’에 대한 환상도 그 모습에 포개져 있을 지 모른다. 커피광고에 나오는 김태희 사진을 보면서, 나는 사진의 메시지가 (그림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에 담겨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진은 그녀의 ‘아우라’를 그대로 풍겨내고 있어서, 실제 그녀를 ‘상징’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그림과 사진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사진(혹은 그림)이 그 안에 담긴 대상과의 사이에 얼마나 강한 유대紐帶를 맺고 있는가?’ 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사진 자체와 사진 속에 담긴 장면(그 사실) 간에 서로 어떤 유대관계에 있는가?’

‘그림은 그림 자체와 그림 속에 담긴 장면(그것이 있는 경우라면 그 사실) 사이에 서로 얼마만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가?’


‘유대관계’라고 표현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단순한 ‘닮음’이나 ‘유사성’이 아닌, ‘동일성의 정도’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진(혹은 그림)이 그 대상의 상징물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으며, 그래서 아쉬울 때 그것을 (얼마나 잘) 대신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다. 사진은 그림에 비해 대상과의 유대관계가 더 강하고 상징물의 역할을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다. 지갑 속에 넣어둔 그리운 사람의 사진이, 오래되어 흐릿하게 지워져서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더라도, 여전히 그 체취가 느껴지는 현상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건 비단 사진 속 그림이 실제와 닮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진(寫眞)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진은 사진 속의 그 사람(혹은 사물이나 사건)이 실제 존재했을 뿐 아니라, ‘사진을 찍었을 당시에 그런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우리가 사진을 통해 느끼는 정서는 상당부분 (그림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더 생생하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게 틀림없다.




본질적으로...


사진이 가진 ‘동일성’이나 실물을 대체할 수 있는 ‘상징성’은 ’기계적인 방식으로 복제되었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사진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해석해서 제작한 그림이 아니라, 자연현상에 속하는 광학적 원리에 따라 복제된 ‘빛의 낙인’이다. 그 여배우의 사진은 그녀가 카메라 앞에 앉아 있을 때, 그녀의 몸이 발산한 빛에 의해 만들어진 자국이며 존재의 흔적이다. 그건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나 또는 ‘거울에 비친 그녀’와 같은 것이다. 그녀가 앉았다가 일어난 뒤 소파에 남는 눌린 자국이나 또는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갈 때 흔들리는 공기의 움직임과도 같다.


우리는 흔히 그리운 사람의 사진을 보며 사진 속 얼굴을 쓰다듬기도 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죽은 사람의 사진을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한다. 물질적으로 사진은 인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그 때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사진이 ‘실물의 대체품’ 역할을 하는 셈이다. 따라서 사진을 찍는 내면의 동기도 결국 ‘피사체를 향유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볼 수 있다. 영원한 건 없다. 가질 수 없는 걸 가지거나 좋은 것을 항상 옆에 두고 보려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사진이 그림처럼 되면, 그런 기능은 약화되거나 사라진다.


사진 위에 그림을 그려 버리면, '실물의 영혼'이 사라지면서 사진은 그림이 된다. 또는 별다른 이유없이, 오로지 그림의 관점에서 (형식미만 고려해서) 대상을 바라 보면서, 사물의 외형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미적인 요소만을 쏙 빼내서 사진으로 만드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진은 뺄셈'이라는 말도 있듯이, 원래 너무 많이 담으면 '조형성'을 놓치기 쉽다. 하지만 그래서 빼낸 게 '실물의 영혼'일 수도 있다. 만약 사진가의 의도가 형식미 뿐이고, 그가 따로 뭔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의도에 따라) 사진은 그림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과학적/객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진은 ‘렌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종이 위에 전사(轉寫)한 그림’이다. 핵심은 그것이 자연현상에 의해 복제된 빛의 낙인이라는 데 있다. 이것은 개인의 판단이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엄연한 과학적 사실로서 사진의 물질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그림(회화작품)'이라 여기는지, 아니면 '실제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철학적/주관적인 관점에도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에, 사진을 그림처럼 여기는 관점은 비약이 너무 심하고 거기에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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