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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Oct 11. 2023

ㆍ나는 사진마니아일까?

사진을 위한 사진 : 의미상실

남들은 주로 인간의 삶이나 공동체에 대한 기여 등과 연관지어 ‘의미를 찾았다’고들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마추어 사진가이고, 그런 대승적(?) 의미를 입에 담을 만큼 큰 그릇도 못 된다.

사실 나는, 사사로운 일에 눈이 먼 채, 평생 내 앞가림하는 일만으로도 여념이 없다.

그러니 의미도 그런 맥락에 찾아 보는 편이 낫겠다.


명동


한 때 나는 야구경기를 좋아했지만, 야구 마니아(mania)는 아니었다. ‘마니아가 된다’는 건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공짜 표가 생겼다거나 애인과 데이트하려고 극장에 가는 사람은 영화 마니아가 아닐 것이다. 영화 마니아는 그냥 영화가 좋아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사람이다. 영화를 보는 데, 다른 의도나 목적이 없을 뿐더러, 혼자서도 가고, 시간이 없거나 돈이 궁해도 그는 영화를 보러갈 것이다.


그냥...!


맹목적(盲目的)으로. 그러니까 마니아는 특별한 이유나 목적 없이, 따지거나 계산하지 않고, 아무 조건 없이, 한다. 오직 ‘좋아서’ 할 뿐, ‘의미문제’ 같은 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그러니 나는 한 때 야구에 열광했던 적이 있지만 ‘야구 마니아’는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야구경기에서 더 이상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의미’가 사라지자, 경기를 즐길 수 없었고 야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요즘은 야구경기를 거의 보지 않는다. 가끔 TV뉴스에서 고교야구를 볼 때면, 식어버린 열정의 흔적을 희미하게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학창시절에는 모교 팀을 응원했고, 직장에 다닐 때는 회사 소속 팀을 응원했다. 친구나 직장 동료가 그리고 내가 소속된 단체가 이기기를 간절히 바랐기에 자연히 경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승패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짜릿한 정서적 롤러코스트를 맛보았다.


프로야구는...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괜찮았다. 각 팀은 지역연고를 내세웠고, 주로 그 지역 출신 선수들로 팀을 구성했다. 나는 당연히 부산지역 팀인 롯데 자이언츠에 열광했고, 그러면서 야구에 빠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팀 간에 선수들이 서로 오고 갔다. 외국인 선수마저 유입되었고, 기업들은 구단을 통째로 사고 팔았다. 경상도 팀과 전라도 팀이라는 식의, 지역 색이 점점 희석되어 갔다. 겉으로만 지역을 내세울 뿐, 실제로는 지역과 별 상관이 없게 되었다.


유니폼만 바꿔 입으면 어제의 적이 우리 편이 되었다. 갈색피부의 외국인 얼굴에서 ‘고향사람’이라는 정서를 떠올리기에는 내 상상력이 부족했다. 꼬불꼬불한 곱슬머리와 핑크색 피부를 가진 덩치 큰 백인 투수도 좀처럼 우리 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때로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응원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야구의 승패는 의미를 잃었고 야구에 대한 나의 열정도 식어갔다.



사진가 행세를 하기 전에도 나는 가끔 사진을 찍었다. 물론 그때는 항상 뭔가를 ‘위해서’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입학식과 졸업식과 기념일 등 각종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고 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었다. 결혼 후에는 주로 가족의 일상을 담거나 아이들 자라는 모습을 남기려고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사진 찍기에 뭔가 목적이 있었고 나름의 의미도 있었던 셈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사진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진을 전 보다 훨씬 더 자주 그리고 많이 찍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인지 알 수 없는 사진들만 찍었다. 풍경사진을 찍었고, 꽃 사진을 찍었고, 인물사진을 찍었으며, 각종 축제와 행사와 거리의 일상적인 광경들을 촬영했다.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기념하거나 간직하고 싶은 것들도 아니었다. 사진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관심을 가졌을 만한 것들도 아니었다.


철따라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장소에 찾아 다녔고, 야생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이른 봄부터 알려진 서식지로 꽃을 만나러 갔다. 운해를 보려고 캄캄한 밤에 산에 올라갔고 멀리 있는 일출 명소로 혼자 차를 몰고 달려간 적도 있었다. 자동차에 관심이 없으면서 모터쇼에 가서 자동차 사진을 찍었고 패션에 관심도 없으면서 패션쇼장에 찾아가서 모델 사진을 찍었다. 돈을 걸 것도 아니면서 경마장에 가서 말 사진을 찍었고, 경기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진을 찍으려고 자동차 경주장에 다녔다.


야경사진을 찍으려고 추운 겨울 밤에 한강다리 밑을 서성댔으며 바람이 부는 높은 빌딩 옥상에 경비원을 피해 몰래 올라갔다. 안전을 위해 출입이 금지된 재개발 지역의 빈집에 숨어 들어갔으며, 마치 사진기자인 양 행세하며 스포츠 경기장이나 각종 행사장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행인들에게 불편을 끼치면서 시내 길거리로 나가 사진을 찍었고 가게 주인들의 미심쩍은 시선을 외면하며 상점 쇼-윈도우를 기웃거렸다. 물론 여러 차례 저지를 당했고 항의도 받았다. 분별력 있고 수줍음도 많은 소심한 모범시민이었던 나는, 사진을 위해서 그런 식으로 망가져갔다.


그러니까 나는 사진가가 되면서 매우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나와 관계가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서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나 꽃이  아니라 멋진 사진이 될 만한 풍경과 꽃사진을 찍었고, 아름다운 배경과 조화로운 구성미를 갖춘 장면들을 찾아내서 사진을 찍었다. 거리에 나가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장면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단지 아름답다거나 낯설다는 이유로) 스냅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무엇을 기념하거나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어떤 ‘필요’에 따른 사진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점차로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진을 찍는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단지, 어떤 신비롭고 아름다운 장면과 마주치는 즐거움. 뷰파인더 안을 보며, 미적 구상에 몰두하고, 감각에 온 정신을 집중할 때 맛보는 기쁨. ‘찰칵’ 셔터를 눌러서, 눈앞의 매혹적인 대상을 포획했을 때의 쾌감. 찍어 온 사진을 집에 가져와서 모니터 위에 펼치는 순간, 어떤 가능성을 확인했을 때 느끼는 희열. 그리고 그런 모든 즐거움에 대한 기대감과 마지막에 완성된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바라보면서 누리는 만족감. 그 ‘순수한 재미’가 나를 부추기는 바람에, 아마 나는 그토록 열정에 들뜨게 되었던 것 같다.



TV 뉴스였던가? 혼자 교외로 나가서 오직 그림만 그리면서 살아가는 화가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앵커의 질문에 그가 말했다.


“때로 세상물정 모른 채 이러고 살아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 희열을 느낍니다.”

“나는 오직 그 희열 때문에 살아갑니다.”


희열...


그러나 ‘철이 든다’는 건 곧 ‘재미없는 일도 감수할 줄 안다‘는 뜻도 된다. 단지 필요 때문에 무엇을 한다는 것. 자기 미래를 위한 필요이든, 타인이나 공동체를 위한 필요이든. 인간이 재미없는 일을 꾹 참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만약 세상에 그 화가 같은 이들만 있었다면, 아마도 인간은 이미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의심이 들었다. ‘그저 좋아서 한다’는 그 말은 더 이상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한 사람이 하는 옹색한 변명이 아닐까?


사람들은 ‘그저 재미’라고 말한다. 마치 아주 가볍고, 간단하고, 별 대수롭지 않은 문제이기라도 한 듯이. 그런데 그건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오로지 즐거워서 어떤 일을 계속한다는 게 정말 쉬운 문제일까? 흔히 '취미 삼아 하는 사진이니 의미 문제로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취미'여서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취미활동은 본질적으로 순수예술활동과 전혀 차이가 없다.


예술가와 취미생활자...


둘의 작품에는 현실적인 목적이나 실용적 의도가 없다는 점에서 같다. 둘 다 세속의 가치와 의미를 외면하고, 오직 자기 내면에서 제시한 길을 따라 간다. 자기만족과 감각적 희열만 좇는 것 같지만, 그게 진리고 가치 있는 올바른 길이라고 믿는다. 둘의 작업은 그 동기나 내용 면에서도 같지만, 살면서 겪게 되는 정신적 혹은 정서적 내용에도 전혀 차이가 없다. 다만 놓인 처지가 약간 다를 뿐이다. 예술가는 우산을 내던지고 들판에 나가서 온전하게 비에 젖지만, 취미생활자는 우산도 있고 피할 처마도 마련된 상태에서, 한다.


강도(强度)는 다르겠지만, 아마 둘 다, 거의 습관적으로, 이런 질문으로 시달릴 것이다.


돈이 벌리지 않는 데도, 즐거운 마음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세상의 지지와 인정을 받지 못하는 데도, 기꺼운 마음으로 지속할 수 있을까?

남을 불편하게 하거나 주변인들을 괴롭히면서까지,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할 이유는 뭘까?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즐거움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마르지 않는 샘처럼 언제까지나 솟아날 수 있을까?

꿋꿋하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강한 의지가 필요할까?

자기 성찰과 자기 합리화가 담긴 주문은 또 얼마나 더 자주 외워야만 할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의 행복과 불행이 나의 그것과 무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세상의 기대를 저버리고, '재미'나 '희열'만을 위해 살려면, 자기 성찰과 자기 합리화는 꼭 필요한 법이다. 주변사람들의 희생을 바라보며 죄의식을 다스리기 위해 자기변명을 만들어 내는 일로 열정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고집불통이 되어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우선 자기 합리화에 능해야 버티기에 수월할 것이다. 자기혐오로 우울증에 빠지지 않으려면 깊은 성찰에 이르는 수양을 통해서 건강을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에 대한 어떤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그런 자세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희망이나 기대는 아득히 멀리 있고, 보상이라고는 오로지 지금 현재 맛보는 '희열'뿐인 것이다. 물론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의미를 찾아내면 그 '의미'에 꼭 들어붙어서 버티면 된다. 나는 아마 삶에 구멍이 뻥 뚫린 것을 느끼고, 그 공허한 부분을 메울 수 있을까 해서 사진을 시작했지 싶다. 물론 그런 구체적인 생각을 했던 건 아니지만, 그런 의식이 은연중에 나를 사진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미를 잘 느끼지 못하고, 허전함은 그대로 남아 있다. 만족감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응원할 팀이 없는데도 야구경기를 즐길 수 있을까?’


그건 아마 진정한 마니아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응원할 이유가 사라지자 열정도 사라졌고 야구경기에 더 이상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마니아가 될 만큼 야구를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야구'라고 생각했던 그 열정의 대상은 알고 보니 '야구'는 아니었던 셈이다. 혹시 사진도 그런 식이었던 걸까? 그래서 자꾸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나는 정말 사진을 좋아하는 걸까?

내가 정말 좋아했고, 지금 좋아하는 게 ‘사진’이 맞긴 한 걸까?

그리고...

언제까지나 좋아할 수 있을까?


'사진을 위한 사진'


나는 가끔 이 맹목적인 활동의 무의미를 생각할 때면 마치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다. 사진은 어디 쓰일 일도 없고 (그런 목적으로 찍지 않았기에) 쓰일 수도 없다. 내게는 어떤 계획이나 (무엇을 하거나 무엇이 되겠다는 식의) 목적의식도 없다. 현실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건 명백히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재미가 제공했던 그 열정도 임계점에 도달한지 오래다. '의미를 찾는 일'은 단지 남들에게 사진을 보여주기 위한 명분 때문에 필요한 건 아닐 것 같다. 전문사진가가 되기 위한 자격요건을 갖추는 일과도 무관할 것이다. 그 보다는 이 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동력이나 명분을 얻는 일'이기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누구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처음에는 ‘무작정’ 시작했더라도, 언젠가는 의미를 찾아서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맹목’은 ‘포기’로 이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무엇으로 계속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어떤 '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의미란 네가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식의 조언만은 듣고 싶지 않다. 그건 마치 우울증 환자에게 ‘즐거움은 이미 네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 최면에 여간 능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의미를 찾는 일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런 말은 마치, 이미 물리적 동력을 잃었는데 정신력으로 버티라는 충고처럼 들린다.


그 보다는 차라리 진정한 마니아가 되어, 언제까지나 마르지 않고 샘솟는 재미를 유지할 방법을 알아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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