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디 Aug 27. 2023

·아마추어 사진의 정체

사진을 위한 사진 - 질문의 탄생

나의 오랜 사진동무인 최 선생의 대답은

'사진에 무엇이 찍혀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신문기자도 아니고,

자료를 수집해 두었다가 뒤에 참조할 일도 없고,

사라져가는 무엇인가를 기록해서

세상에 전하는 일에도 흥미가 없을 테니 그럴 밖에...

최 선생뿐 아니라,

나를 포함한, 대다수 아마추어사진가들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한데, 사진에 내용이 없고,

또 사진가가 자기사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누구인지, 어디인지, 대상이 무엇인지는 물론,

사진을 찍게 된 과정이나 상황과 같은 최소한의 자기 경험조차 덧붙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사진 속 대상을, 그 주변 환경이나 관계에서 분리해서 정체성(identity)을 없애 버리고,

어떤 메시지도 담으려 들지 않을뿐더러,

사진가 자신의 경험이나 사연과의 관계마저 맺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 때 남는 것은 '그림'이다.


사실 우리는...

카메라가 찍어낸 멋진 그림을 원할 뿐이다.

사진에 이야기를 담지 않고,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갖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최 선생이 찍힌 사진은 ‘최 선생’이 아니고

내가 찍힌 사진은 ‘나’가 아니라 모두 ‘중년의 초상’이 된다.

흔히...

사진 속의 장면은 '삶'이나 '작업'이 되고

사진 속의 인물은 '노인'이나 '섭리'가 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 나오는 말이다.


엘시노르성이나 오필리아나 극의 진행을 주관하는 모든 구체적인 장면 없이

햄릿이라는 인물을 생각할 수 있을까?

자신의 역할이 적혀있는 대본 없는 햄릿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이런 모든 것을 제거한 햄릿은 무엇일까?

무언가 공허하고 말없는 환영 같은 것 외에 그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그 무의미를 생각하면, 간혹 몸서리가 난다.


퇴촌(경안천번)


몇 년 전에 야생화 꽃 사진을 찍으러 산에 갔다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말소리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 저 사람들은 모양을 찍는 거야. ”


화야산 등산로 옆 산비탈에서 사진동호인들과 함께 얼레지 꽃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얼레지가 군락을 이룬 숲에서 꽃을 찾는 중이었다. 상태 좋은 꽃송이가 탁 트인 배경 앞에서 좋은 빛이 드리운 채 서있는 장면을 찾느라 산비탈을 헤매고 있었다.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4~5명쯤 되는 다른 일행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이 우리 쪽을 보며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다들 챙이 넓은 벙거지 모자를 쓰고 가벼운 등산배낭을 짊어진 채로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분들도 야생화 사진을 찍으러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꽃의) 모양’을 찍지만, 그분들은 그 밖에 다른 걸 찍으러 다니는 것 같았다. 행색이나 말투로 보아, 아마 그 사람들이 찍는 것은 ‘모양’이 아니라 꽃의 분포나 꽃의 생태와 같은 ‘내용’에 속하는 것들일 터였다. 우리처럼 꽃 사진을 찍으러 오긴 했지만 관심사가 다르고 의미를 느끼는 포인트도 전혀 달랐다. 물론 사진도 다를 것이다.


나는 내가 ‘모양을 찍는다’는 사실을 그 날 처음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 카메라로 ‘모양’을 찍고 있었고, 사진에서 내가 원하는 건 오직 아름다운 그림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멋진 구도를 찾아내고 아름다운 빛을 탐색하느라, 내가 그토록 열심히 산비탈을 뒤지고 돌아다닐 까닭이 없을 터였다. 꽃은 이미 지천에 널려있었던 것이다. 정작 중요한 건 꽃이 아니라 사진이며 그 안에 담긴 아름다운 형태였다.


그 분의 말은 ‘내가 그렇다’는 사실을 알려준, 소름 끼치도록 절묘한 표현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식물을 바라볼 때 거의 '사진의 관점'에서만 보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사진의 관점’이란 ‘조형의 관점’이란 말과 같다. 형태와 패턴을 보고 색과 질감 등에 관심을 가질 뿐, 그 안에 담긴 것의 내용이나 의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물론 다른 피사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관심사는 사진이고 피사체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사진과 관련된 부분뿐이다. 봄이 오기 무섭게 야생화를 찾아 다니는 열정적인 사진동호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분들이 전부 야생화 꽃과 생태에 대해 남 다른 관심을 가진 건 아닐 것이다. 관심이 있다 해도, 아름다운 꽃사진을 얻기 위해서이고, 단지 정보가 필요했을 뿐이다.


물론 꽃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빛의 마법에 걸려서 그렇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종종 경복궁에 가서 궁궐사진을 찍지만, 역사나 건축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남대문 시장이나 명동거리에 나가서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사회현상이나 도시문제 등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와중에 아름다운 패턴을 찾아내고 미적 구성을 탐색하느라 몹시 분주하다. 미적 취향의 발로(露)라고 볼 수 있겠지만, 사진을 찍을 때, 이런 (피사체의 외형에만 관심을 갖는) 식의 태도에는 일정한 한계도 있는 것 같다.


[ 사진은 작품과 다르다.

사진은 현상을 옮기는 것이고 작품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박찬원. 사진, 울림, 떨림 p35) ]


‘현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메시지’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일 것이다. ‘형식과 내용’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작품이 되려면 '내용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에 매우 치우치는 편이다. 피사체를 볼 때 거의 그런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이다. 구도와 구성미를 살피고 빛이 비치는 상태와 사물의 표면에 나타난 질감을 본다. ‘꽃’이 아름답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진’이 아름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꽃은 안중에 없고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느 날 내가 허물어져가는 재개발 지역의 폐허에서 곰팡이가 핀 담벼락에 심취한 채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문외한들은 잘 모르겠지만 곰팡이 자국도 멋진 그림이 된다. 그렇게 피사체에 대한 관심이 오직 ‘사진의 관점’에 집중되다 보니, 피사체를 옮겨 다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또한 내가 재개발지역이나 도시 길거리나 재래시장 등에서 사진을 찍고, 때로는 숲이나 공원에 가서 생태사진을 찍고, 심지어 기회가 되면 모델촬영도 마다하지 않는 식의 태도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진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뿐이다. 나의 주된 관심사가 '사진'에 있기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사물의 관점에서 보느냐 사진의 관점에서 보느냐...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뭔가 얘기를 하고 싶다거나 메시지가 필요하다면 피사체를 ‘사물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하긴 사진에서, 형식(모양새 )을 두고 할 얘기가 뭐가 있겠는가?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라 거기 있던 것이고 그걸 두고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사진작가들은 흔히 어떤 피사체를 하나 골라서 감정이입을 하고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얻고, 생각하고 느낀 점을 사진에 담는다. 의미를 중시한다면, 그렇게 피사체가 되는 '사물'에 관심을 갖고 내용에 치중하는 게 당연할 것 같다. 소재 선택이 기발하고 관찰하는 시간이 길고 생각에 깊이가 있을 때 좋은 사진(또는 좋은 내용)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왠지 그게 '약간 어정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는 그 사진가들이 마치 (지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으로 너무 치우친 생태학자나 섣부른 신문기자 또는 어설픈 세태비평가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니면 설익은 인문학자나 문학가 같기도 했다. 예를 들면, 너무 감상적이고 그 분야 지식은 부족한, '야생화전문가'나 '도자기 전문가' 또는 '소나 돼지 전문가'처럼 보인다. 혹은 전문성이 다소 의심스러운, 신문기자 또는 수필가나 시인처럼 보였다.


나는 식물사진을 즐겨 찍는다고 해서 식물학자가 아니며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물론 도시에서 길거리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신문기자도 아니며 사회문제나 시사 문제에도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다. 어떤 날 우연히, 광화문 광장에서 역사에 남을만한 중요한 시위가 코앞에서 벌어진다 해도, 어쩌면 나는 사진을 찍지도 않고 그냥 지나칠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빛이 좋지 않았다거나 멋진 패턴에 끌리지도 않았다면, 그럴 수 있는 문제다. 나는 단지 사진가이고, 그래서 모든 것을 사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한데 중요한 건 그게 '내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었으므로, 내가 어쩔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는 부분이다. 나는 카메라를 들면, 오직 미적 구성(형식)에만 관심이 집중되었고, 아예 다른 관점에서는 보거나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다. 피사체를 사물의 관점에서 보려 하지 않고, 의미나 내용을 따지지 않았으며, 그저 그림을 잘 그리려고만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다. ‘처음부터 내가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런 현상이, 필시 사진이 가진 구조적인 문제일 것이고 사진 탓이지 내 탓은 아니라고 믿는다. 내가 애써 사물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해봤지만 잘 되지 않았던 걸로 보아, 내 방식이 순리에 맞고, 소위 '사진작가'라는 사람들이 억지를 부리는 것도 같았다. 다만 사진에 ‘내용이 텅 비어있다‘는 인식이 문제가 되었다. 피사체가 된 사물의 관점에서 떠나면 사진은 그림이 된다. 흔히들 말하듯이, ‘빛으로 그린 그림’인 것이다. 거기 내용을 채울 수 있을지, 어떤 내용을 채울 수 있을 지, 그런 방식이 가능하기나 한 지 등이 관건이었다. 




질문의 탄생은 거의 필연적인 결과다.


사물의 외피만 보면서 미적(美的)인 관점에서 형태를 재단해내는 이 일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사진가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

정체성과 의미에 대해 고민이 생긴 것이다.

봇물이 터지자,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내가 따를만한 전범(典範)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렇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으며, 

나는 긴 방황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사진글쓰기의 어려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