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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Aug 29. 2023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선택의 예술

사진작업 과정은 나무나 돌을 깎아서 형상을 만드는 조각가의 작업과 닮았다.

모양새가 비슷한 재료는 손이 덜 가고, 결이 좋은 재료는 다루기에 쉽다.

조각가가 좋은 재료를 찾아내서 끊임없이 잘라내고 깎아서 형상(形象)을 만들듯이

사진가는 적당한 피사체를 선택한 뒤에 계속해서 선호하는 관점만을 선택해 나간다.

그건 마치 열매에서 엑기스를 뽑아내거나 원석을 가공해서 보석을 만드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따라서 사진은 '선택의 예술'이다.


선택하는 과정은 '선택되지 않은 뭔가를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계속 걸러내서 찌꺼기를 버린 뒤에 원액이 남듯이,

사진가가 남기는 건 결국 '세상과 사물의 정수(精髓)'일 것이다.

그래서 흔히 '사진은 뺄셈'이라고들 말한다.

사진세계의 룰에 의하면 덧셈은 반칙이다.


메타세콰이어


사진 제작의 요소들 (어떤 판사의 생각)


사진 저작권 소송에 적용되었던 한 판례를 살펴 보았다. 누군가 이미 촬영한 풍경을 뒤에 다른 사람이 다시 찍었는데, 먼저 찍은 사람이 자기 저작권을 침해했다면서 소송을 걸었던 것이다. 2011년도에 실제로 있었던, 그 저작권 소송에서 법원은 저작권을 침해 당했다고 주장하는 (원고의) 사진을 놓고, 제작과정에 따른 요소들을 아래와 같이 나열했다. 내용을 보면, 사진을 바라보는 판사의 관점(사진에 전문성이 없는 일반적 관점)을 알 수 있다.


1. 피사체 선정

2. 구도 설정

3. 빛의 방향과 양 조절 및 셔터찬스 포착

4. 카메라 각도 설정

5. 셔터속도 기타 촬영방법

6. 현상 및 인화 등 과정


그러니까 사진은, ‘피사체를 선정’하고, ‘구도를 설정’하고, ‘빛의 방향과 양을 조절해서 셔터찬스를 포착’하고, ‘카메라 각도'를 정하고, ‘셔터속도와 기타 촬영방법’ 등을 이용해서 촬영한 다음, ‘현상 및 인화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작권을 침해 당했다고 주장하는) 원고의 사진을 보면서 각 항목별로 개성과 창의성이 있는지 살폈고, 개성과 창의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피고의 사진이 그 부분을 베꼈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서 저작권 침해여부를 판정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2. 구도설정’ 항목에서 원고의 사진에 개성과 창의성이 인정되는 경우, 만일 피고가 찍은 사진이 그 구도를 따라 했다면, 저작권 침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베낀 항목이 많은지, 얼마나 유사한지, 그 정도를 참고해서 최종 판단을 하게 된다.


만일 ‘사진이 찍는 것인지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같은 재판부에 접수되었다면, 아마 비슷한 방식으로 진실을 규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을까? 사진이란 게 그저 자동화된 기계로 '찍어내는 것'이라면 창의성을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만드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또한 제작과정에 독창성이 있다면 사진은 '만드는 것'으로 봐야 하겠지만 아니라면 '찍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이 제작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거기 창의성이 깃들 여지가 있는지 확인을 해보면, 본질적으로 사진이란 게 찍는 것인지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득 그 판례가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판례에 언급된 방법이 사진의 창의성을 판정하는 좋은 사례인 것 같지는 않다. '창의성'이나 '개성'이란 게 그렇게 환원적(還元的)인 방법을 써서 규명하기는 힘들 것 같기 때문이다. 세포를 전부 다 규명했다고 해서 생명체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러나 ‘사진은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식의 질문은 너무 막연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예 논의를 시작 할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생각의 실마리라도 잡아보려면 제작에 포함된 요소들을 하나하나 해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밖에 없겠다. 예를 들어, 어떤 사진을 한 장 두고, '피사체 선정은 창의적인가?', '구도 설정에 독창성이 인정되는가?' 라고 물으면, 일단 이야기를 시작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판례에서 방법을 한 번 빌려와 본 것이다.




‘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안셀 아담스 Ansel Adams) ‘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라는 질문의 의미


그러고 보니, ‘찍는 것’, ‘만드는 것’의 명확한 의미를 짚어보지도 않은 채로 이야기를 시작해 버린 것 같다. ‘찍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만든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지? 그리고 그 말이 어떤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한 번 짚어봐야겠다. 과거 유명 사진가가 했던 그 말이 사진가들 사이에서 자꾸 반복해서 회자되는 까닭은 무엇이며 사진가들의 언어중추는 이런 질문에 왜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내 생각에 사진가들은 '사진을 만든다’는 정의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다. 왠지 '찍는다’는 말에는 사진과 사진가를 비하하는 듯한 느낌이, ‘만든다’는 말에는 사진가의 노력과 솜씨가 더 부각되는 듯한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아니면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가 그저 '(자기 손이 아니라) 카메라의 솜씨를 빌어서 그림을 그린다’는 사진가들의 양심적 자각에서 비롯된 일종의 자격지심 탓인 지도 모른다.


아무튼 '찍는다’ 는 말의 뜻은 ‘도장을 찍는다’ ‘인쇄물을 찍는다’, ‘낙인을 찍는다‘ 처럼,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손대지 않고, 틀을 써서 그대로 복제하는 걸 말한다. 그러니까 '찍는 것’이라는 말에 내포된 의미는 사진이 ‘단순 기록행위’라는 뜻이 된다.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에 굳이 ‘take’나 ‘make’ 같은 외국어를 들먹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진이 그저 ‘찍는 것’이라면, 사진가는 자기 생각이나 의지 없이, 오로지 본능에 따라 셔터를 누르는 좀비 같은 존재로 비칠 수도 있다.


그리고 '찍는’ 행위에는 찍은 사람의 실력이나 개성이나 창의성이 개입할 여지가 적어서, 누가 찍어내도, 아무리 반복해서 찍어내도, 항상 같은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사진이 ‘만드는’ 것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만든 사람의 솜씨나 정서나 개성 혹은 창의성에 따라 사진에 차이가 나타날 것이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창조된 물질(사진)은 사람의 생각과 의도가 표현된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진은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의심 가득한 내면의 질문이 수시로 불쑥불쑥 떠오르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너는 정말 사진이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고 믿는가? 마치 도장을 찍거나 낙인을 찍듯이, 그저 카메라를 작동시켜서 렌즈 앞의 세상을 찍어내는 게 사진 아닌가? 세상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사진이 찍히기 마련이고, 그 때 사진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지 세상이 아름답기 때문 아닐까? 따라서 사진은 ‘찍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근거는 무엇이며, 사진가는 그 자동화된 처리과정 중에 어떤 식으로 개입해서 자기 흔적을 남기고, 의도를 표현하고, 개성과 창의성을 사진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걸까?


혹시 (글씨를 쓰면 필체가 나타나듯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 순간에 저절로 그런 게 사진에 배어든다고 믿는 걸까? 하지만 다이얼을 돌리고 단추를 누를 뿐인 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어쨌거나 '만든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사진에서 만든 사람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개입한 흔적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 사람의 의도는 물론 개성과 창의성 등이 반영되어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다. 한데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그런 게 사진에 개입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답을 하려면, 역시 저작권 침해여부를 판정했던 그 재판에서 했던 것처럼 사진작업의 요소들을 하나씩 나열해서, 각기 개성과 창의성 유무를 따지는 방법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연출에 대한 부분은 일단 접어두는 게 낫겠다. 그 부분은 사진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기도 하지만, 예로 든 그 재판에서 고려되지 않은 부분이라, 지금 거론하기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진 후보정의 범위를 넘어서는 '디지털 그림 그리기'도 마찬가지다.


그런 기능들은 사람이 직접 개입해서 '만드는 방식'에 해당하는 게 명백하고 개인의 솜씨나 개성이나 창의성이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이 논쟁에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단지 그런 기능들이 사진의 본성에 부합되는 지 그리고 사진을 평가할 때, 그 부분에 대해 얼마나 많은 가치나 의미를 인정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만 따로 검토해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연출해서 찍은 사진이나 디지털후보정을 통해서 그려진 사진은 제외하고 소위 '순수사진(스트레이트 사진)'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논쟁의 성격 자체가 본질적인 부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세 번의 선택


아마 이런 사소한 문제를 두고, 나처럼 ‘진상을 한 번 확인해 보자‘는 식으로, 진지하게 파고드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혹자는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가지고,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달려드느냐?'며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여기서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이건 사진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핵심 철학'같은 것이다. 원래 철학은 행동을 위한 지침이 되므로 사진활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진에서 단 하나 유효한 행위는 오로지 선택뿐’이라는 것이다. 사진은 사진의 피사체인 대상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차례 다양한 선택행위를 거친 끝에 최종적인 사진으로 제작되는, 그래서 ‘일련의 선택을 통한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사진이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라는 질문과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그 질문의 요지는 결국 사진이 '사람이 개입할 수 있는 매체인지', 사진에 사람이 개입한 '흔적이 남을 수 있는지?' 하는 부분이다. 사진이 ‘찍는’ 것이어서, 단지 기계가 작동해서 흔적을 남기는 것뿐이라면, 사진에는 장치의 특성에 따라서 차별화된 기계의 흔적이 남을지언정, 사람의 자취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사진이 ‘만드는 것’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사람이 개입한 흔적이 남게 된다. 물론 그 개입과 흔적은 '유의미한 것'어야 한다.


개입해서 남긴 흔적이란 게 별 의미가 없어서, 어떤 가치나 창의성을 인정할 수 없는 사소한 것이라면 굳이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가 사진에 개입하는 유일한 방법인 그 선택행위들에 주목해서 그 의미를 일일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선택행위들이 사진에 어떤 자취를 남겼으며 그게 얼마나 '유의미한 개입'이 될 수 있는지 따져보면, 결국 사진이 찍는 것인지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답도 나올 것이다.


흔히 '만든다‘고 하면, 뭔가를 쌓거나, 덧붙이거나, 형태를 뜨거나, 칠을 하는 식으로, ’추가하고 변형시키는 방식'만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무엇을 ’빼거나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도 뭘 만들어 낼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원석으로 보석을 가공하거나, 나무나 돌을 다듬어서 조각 작품을 만드는 등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 작업은 일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이 곧 선택행위이며, 선택행위에는 매 순간 사람의 의도가 개입한다.


마찬가지로, 사진가가 사진을 찍을 때도 자기 개성과 취향 등에 따라 필요한 것은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사진은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그 선택행위를 통해서 뭔가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진은 '만드는 것'이 되고, 만드는 수단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세상이 원석이라면 사진은 거기서 쓸모없는 것들을 배제하고 남겨진 '세상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다. '쓸모 여부'는 물론 사진가의 주관적 판단에 따를 것이고, 그 때 그의 견해와 개성과 취향 등이 반영될 것이다.




(사진을 만들어 가는) 그 '선택행위'를 크게 세 가지(혹은 세 단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선택 (사진의 대상)


앞의 판례에 있던 항목들을 다시 나열해 본다.


1. 피사체 선정

2. 구도 설정

3. 빛의 방향과 양 조절 및 셔터찬스 포착

4. 카메라 각도 설정

5. 셔터속도 기타 촬영방법

6. 현상 및 인화 등 과정


먼저 1~4의 항목 즉, 피사체 선정, 구도 설정, 빛의 방향과 양 조절 및 셔터찬스 포착, 카메라 각도 설정은 한 마디로 사진의 피사체인 ‘대상을 선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선택행위에는 어떤 사물을 선택하는 것뿐 아니라, 사진 프레임을 이용해서 어떤 사물의 부분 혹은 전체 등의 범위를 지정하는 선택도 있고, 바라보는 위치에 대한 선택도 있다. 그리고 그 사물이 놓인 장소에 비치는 일정한 빛의 조건처럼, 상황에 대한 선택도 있으며, 흔히 ‘셔터찬스‘라고 말하는, 특정한 시점(Timing)의 선택도 있다.


1~4의 항목은 피사체 선택, 범위(프레임) 선택, 위치(거리와 바라보는 각도/앵글 등)선택, 상황선택 등의 선택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시 한 마디로 표현하면, 대상에 대한 사진가의 ‘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점은 사진가의 판단이 개입되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선택이다.


[ 야외에서 사진을 찍을 경우 사진가가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재배치되는 시각적 병치의 복잡한 그물망과 마주치게 된다. 한 걸음을 옮기면 숨어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걸음을 떼면 전방에 있던 한 대상은 후방의 다른 사물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압축되기도 한다. 한 발자국에 의해 깊은 공간이 드러나는가 하면 다음 발자국에 의해 그 공간이 모호하게 사라진다. 이런 형편을 감안할 때 사진가는 하나의 장면을 구성(compose)한다 기 보다 오히려 한 장면을 해석해 나간다(solve)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 스티븐 쇼. 사진의 문법 ) ]


어떤 ‘장면을 구성하거나 해석하는’ 과정뿐 아니다. 어떤 사진가는 특정한 대상만을 골라서 자기 사진의 피사체로 삼는가 하면 다른 사진가는 특별한 상황에 집착할 수도 있다. 회화적 구성미를 중시해서 명암의 대비가 강한 장면을 좋아하는 사진가도 있고 사진 품질에 집착해서 항상 빛이 부드럽고 광량이 풍부한 상태를 선호하는 사진가도 있다. 전자는 사진을 중시하고 후자는 피사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튼 사진을 보면 사진가의 그런 성향과 행태가 다 드러난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어떤 대상을 선택하는지, 어떤 프레임과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순간에 바라보았는지?


나는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을 기회가 생기면 은근히 어떤 기대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같은 피사체를 같은 조건에서 촬영한 남의 사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나나 일행들의 사진에서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오직 무엇을 선택해서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부분 뿐이다. 그러면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내가 보지 못한 방식으로 바라보았던 다른 누군가의 시각을 엿볼 기회가 생긴다. 그 때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들' 목록에 카드를 한 장 추가할 수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 사진적 기량을 높이는 기회를 얻게 된다.


사진의 대상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은 틀림없이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내 생각에, 이 부분이 사진작업의 모든 과정 중에서 사진가가 자기 개성과 창의성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과정인 것 같다. 기록을 위한 사진이나 보도사진의 경우는 객관적인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지만,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사진가는 얼마든지 사진에 개입해서 자기 의도를 표시하고,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선택(사진 촬영술)


'5. 셔터속도 기타 촬영방법’ 은 한 마디로 ‘사진 촬영 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초점을 맞추고, 피사체의 움직임과 심도 표현을 고려해서 셔터속도와 조리개를 조절하고, 필터와 같은 각종 보조적인 촬영 장치를 활용해서, 실제로 셔터를 눌러서 사진을 찍는 단계를 뜻한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을 ’만드는‘ 행위라기보다는 대체로 ’찍는‘ 행위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 때도 사람이 개입할 수는 있으되, (사람의 개입이) 크게 의미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장치를 오로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혹은 ‘표준적인 방식’으로만 사용한다면, 여기서 창의적인 부분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진은 자동화된 장치에 의해 거의 기계적으로 '찍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이 하지 않는 특별한 방식으로 장치들을 활용한다면, 이 때도 창의성이 깃들 여지는 있다. 그러니까 (기계의 자동화 기능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이 의도를 가지고 장치를 독특하게 조작한다면, ‘만드는 행위’를 하는 걸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런 수단을 써서 뭘 '만들었다'거나 어떤 것을 '표현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미흡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사진 문외한이나 사진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사진가들은 특히 이 부분에 큰 기대를 걸고, 지나친 환상을 갖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와! 사진 참 잘 찍으시네요. 어떻게 하나요?" 그러니까 훌륭한 사진가들이 멋진 사진을 만들어내는 비법이 바로 이런 기술에서 나온 것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마치 마술의 비밀을 모르는 관객의 입장과 비슷하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니고, 별 것도 없다’는 사실은 금세 밝혀진다. 카메라는 기계장치일 뿐이고, (유기체인 사람과 달리) 그 작동방식에 일정한 틀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카메라를 조작해서 사진에 차이가 나타날 수는 있지만, 매우 '제한적'이라고 봐야 한다. 현실적으로 장치 조작은 피사체가 놓인 외부조건에 맞춰서 적용할 수밖에 없으며, 상당히 많은 경우 (창의적인 목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외부의 여러 촬영조건들에 맞춰가는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심도를 얕게 만들려고 조리개를 활짝 여는 경우보다는 촬영환경이 어두워서 (셔터속도를 확보하려고) 할 수 없이 조리개를 열어야 하는 식의 상황이 더 흔하다는 뜻이다.


사실 사진에서 ‘특별한 기법’이라고 할 만한 것도 그리 많지 않다. 카메라 조작으로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변수(變數)는 고작해야 조리개와 셔터 둘 뿐이다. 조리개를 열어서 배경을 흐리게 한다든지, 느린 셔터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사물의 궤적을 만들거나 아예 사라지게 만드는 방식 혹은 주밍, 패닝, 다중노출 등,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는, 몇 가지 진부한 수법이 전부이고, 그 수법 자체만으로 창의성 운운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장치와 외부조건에 의존적이어서 사진가의 의도를 자주 벗어날 뿐 아니라 이미 같은 방식이 너무 많이 행해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렌즈 왜곡을 이용하거나 필터 등 다양한 보조장치들을 활용한다거나, 혹은 다른 기계적인 수법으로 사진을 특수하게 찍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진가들도 많이 있다. 그 사람들은 ‘사진의 본질이 현실을 왜곡하는데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사진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거의 자연스럽고 표준적인 방식만을 고집한다. 기계/광학적 특성들을 활용해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들지도 않을 뿐더라 그런 데서 창의성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 사진가들은 이 부분을 '만드는 행위'라기보다는 ‘찍는' 행위에 속한다고 볼 것이고, 나도 그렇다.


따라서 ‘사진촬영술을 이용해서 창의적인 표현을 한다’고 말하기 보다, 사진가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대상과 상황을 선택할 때, 자기가 의도하는 관점을 좀 더 잘 나타내기 위해 활용하게 되는, 그러니까 일종의 보조적인 수단 정도로 보는 편이 무난할 것 같다. 예컨대 역광에서 조리개를 조여서 노출 부족상태로 사진을 찍으면, 프레임 전체가 어둡게 찍히면서 유독 밝은 광선이 닿은 사물들의 윤곽 부분만 흰 선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리개를 조여서 노출을 어둡게 설정하는 사진술 자체를 창의적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그런 아름다운 선이 만들어지는 대상과 빛의 상황을 간파한 사진가의 안목에 창의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뜻이다.


사진찍기는 '대상인 피사체가 카메라 앞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손을 대지 않고 이미지를 도출해 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선택 과정이고, 일부만, 전부를, 옆에서, 멀리서, 가까이서, 위나 아래쪽에서, 실루엣으로, 질감이 살아있는 디테일까지 포함해서 또는 배경이 없거나 약화된 상태로 등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밖에 장치 선택과 카메라 조작을 통한 사진술도 같은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 부분을 사람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다. 창의성 운운하기에는, 장치와 외부상황에 의존적이며 선택의 범위가 매우 좁고 활동의 성격이 너무 피동적이다.




세 번째 선택(현상 및 인화)


'6. 현상 및 인화 등 과정‘ 은 필름이나 디지털 원본사진을 가지고 최종사진을 만드는 과정이다.


만일 ‘만든다‘는 의미가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로이 창조한다‘는 뜻이라면, 사진에서 그런 게 가능한 과정은 이 단계뿐이다. 그것도 디지털사진에서나 비로소 가능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사진적 수법’을 이용한 현상과 인화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 과거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변형들은 ’빼는‘ 행위였을 뿐 ’더하는‘ 행위는 거의 없었다. 불필요한 디테일을 제거하고, 방해가 되는 명암 톤을 조절하고, 부적절한 색은 약화시킨다. 따라서 이 때 일어나는 ’빼는‘ 행위는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한 또 한 번의 선택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디지털 사진에서는 '더하는 행위'도 빼는 것만큼이나 간단해졌다. 이제 책상 앞에 앉아서 색이나 명암 톤을 조절하는 수준을 넘어, 사진을 수정하거나 합성해서 전혀 다른 사진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촬영과 무관하게) 마냥 좋은 그림을 만드는 쪽으로 치닫는다면,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될 게 빤하다. 특히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진가일수록 완벽을 기하려고 들 것이다. 그는 흠이 있거나 잘못된 그림을 절대로 참지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려고 애를 쓸 것이며 결국 (사진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물론 사진을 합성하거나 없던 것을 새로 그려 넣는 건 명백히 창작행위라고 할 수 있고, 누구라도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사진적 수법과 거리가 좀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수긍할 것이다. 물론 그런 관점을 '고리타분하다'는 식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잃게 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사진에는 사진 만의 특성과 장점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고유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스스로가 처음에 굳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시작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잃게 된 게 사진일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처음에 '사진'을 시작해 놓고서는 이제 와서 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 고민 끝에 결국 열심히 작업해서 얻어낸 '예쁜 그림'에서 별 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궁극적으로는 가치를 크게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때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문제다. 물론 그렇지 않고, 굳이 '사진'에 집착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물론 디지털 아티스트나 화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이 과정은 맨 처음 대상을 발견하고 관점을 표현하는 단계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둘은 서로 협력관계에 있어서 서로 잘 연결되어야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즉 후보정을 통해 촬영 시의 의도를 좀 더 잘 표현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후보정에서의 경험이 촬영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후보정은 사진가가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하는 핵심적인 과정이고, 피사체를 선택하고 사진을 촬영하는 전(前) 단계를 보조하고 강화하는 한편, 사진가는 여기서 피사체와 촬영환경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진촬영술에 응용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와 영감을 얻게 된다.


실제로 나는 사진가들이 후보정 작업과 촬영을 서로 연계해서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서 보다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반적으로는 촬영단계에서 본 것을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후보정을 하게 되지만, 반대로 후보정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진적 현상을 촬영 시에 참조하기도 한다. 이런 순환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차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진적 시각의 목록을 늘려가는 것'이 결국 사진 솜씨가 향상되는 과정인 것 같다. 현상과 인화, 특히 (요즘 시대에는 필름사진조차 반드시 거치게 되는) 이 디지털 후 보정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도외시 한다면, 아마도 사진에서 일정한 수준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사진은 ‘만드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택을 통해 무엇을 만들어 나가는 행위’다. 그리고 사진에서 단 하나 유효한 행위는 오직 ‘선택’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말은 곧 (선택에서 제외된) 다른 것은 버린다는 뜻도 된다. ‘사진은 뺄셈’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뜻이다. 그리고 사진가의 선택은 생각보다 훨씬 정교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여려 차례 반복된다. 단순히 좋은 것만 고른다거나 보기 싫은 걸 프레임에서 배제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정제한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정제하기 전의 원본은 '세상'이다. 따라서 사진은 사진가의 시선과 관점으로 정제된 세상이다.


[ 일상적인 대상들을 흔치 않은 것으로 보여주기 위해 당신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난 그 일을 ‘의식적 주목’이라 부른다. 촉수를 다듬어 안테나를 세우는 일이다. 안테나를 세우면 그 전에 걸리지 않던 신호가 다 잡힌다. 아마 누구나 거리를 걷다가 한동안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 오르는 순간, 공간과 시간을 손으로 만지는 듯한 순간. 모든 것의 실체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그런 감각의 밀도를 카메라의 종류나 사진가가 취하는 어떤 선택들을 통해 사진에 새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앤 셀린 제이거.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p51. 사진가 ‘스티븐 쇼어‘의 인터뷰 내용 중) ]


오로지 대상을 선택하고 특별한 관점을 보여주는 방법만으로 창의성을 드러내는 예는 사진의 역사 속에서도 수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기형아의 모습처럼, 독특한 피사체를 선택해서 사람들이 평소 그냥 스치고 지나치던 것들에 주목하게 만든다든지, 사물을 남과 다르게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고,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한 순간을 포착해서 새로운 관점을 알아 차리게 해주는 등, 사진적 창의성을 드러낸 사진들이 사진의 역사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 중, 어떤 사진은 만든 것이고 어떤 사진은 찍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관점은 물론이고, 새로운 시각을 창조한다는 것도 꽤 의미 깊은 일이다. 흔히 우리가 시각에 대해 착각하는 부분은, 눈만 있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처럼 믿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학에 의하면 시각은 훈련 받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고 누구나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같은 걸 보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이 보고 있는 건 아닌 셈이다. 만약 과거 사진가들이 보여준 그 사진들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지금 볼 수 있는 것들 중 상당 수는 볼 수 없을 것이고, 평생 동안 훨씬 적게 보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발견해서 사진을 찍는다는 건, 이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새로이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고, 의미 있는 창작활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진이 예술작품인가 아닌가' 하는 부분은 약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작 창조된 건 사진이 아니라 '사진가의 시각과 관점'이라고 봐야 하고, 사진 그 자체는 단지 기계적/자동적 활동의 결과물로서 제작된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동화된 장치를 통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사진은 인간이 신체로 일일이 자기 생각과 의도와 신체 기능을 반영해서 표현한 다른 예술작품들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물질로서의(인화된) 사진 그 자체를 두고 '예술작품'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공산품'으로 볼 수도 있을 지 모른다.


그림(회화작품)에는 그린 사람의 (지우거나 없앨 수 없는) 흔적이 배어 있다. 그림은 온전하게 화가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지며, 물질에 새겨진, 몸의 흔적이고 정신의 흔적이다. 그러나 사진은 그런 예술작품들과는 명백히 다르다. 사진은 상당부분 피사체와 외부환경에 의해 제작되며, 거기서 창조된 것도 무게와 질감을 가진 물질이라기보다는 영상(Image)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사진의 가치는 인화된 사진 그 자체보다는 그 사진을 찍게 된 사진가의 행위에서 찾아봐야 한다. 사진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탓도 있지만, 복제와 모방에 취약한 특성 때문에라도, 그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물질(사진)보다는 사진가의 생각과 관점과 아이디어 쪽에 기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론을 말하자면, ‘사진은 활용하는 사람에 따라 찍는 것이 될 수도,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사진은 다양한 방식으로 찍히고, 다양하게 쓰인다. 흔히 기록을 위해 쓰일 때 사진은 ‘찍는 것’이지만, 각각의 선택과정에서 사진가가 의도를 품었다면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사진가의 의도는 물론 주관적인 것이어야 하고, 의도가 없거나 필요에 맞춘 객관적 의도 뿐이었다면 '찍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데 이런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나는 솔직히, 이 부분이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왜 굳이 이 빤한 답을 두고, 질문과 주장들을 남발하는 걸까?’


사진은 어렵거나 복잡한 구석이 전혀 없으며 그야말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수도 있는 분야다. 그런데 성질이 전혀 다른 온갖 사진들을 구분 없이 뭉뚱그려서 말을 하다 보면, 얘기가 복잡해지고 답이 없어 어렵게 보이는 경향도 있다. 복잡할 수 없는 것을 복잡하게 칭칭 감아서 쓴 글들을 나는 사진분야에서 유난히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장황한 글이 될 줄 알면서도, 한 번 정리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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