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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Aug 31. 2023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 대한 주관적 분석

순수(스트레이트)사진의 가치 탐색기

그 위대한 ‘브레송’이 

나나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과 같은 부류라는 걸 확인하고

나는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명동거리


[1946년 7월 그가 촬영을 위해 뉴올리언스로 갈 때 동행했던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한다. “한번은 뉴올리언스의 거리에서 작업하는 그를 보았다. 그는 마치 흥분한 잠자리처럼 보도 위에서 거의 춤을 추다시피 했는데, 석대의 라이카 카메라가 끈에 매달려 그의 목에서 흔들거리고 있었으며 한 대는 그의 눈에 붙어 있었다. 찰칵, 찰칵, 찰칵 - 카메라는 마치 그의 몸의 일부처럼 보였으며, 그는 거의 종교적인 몰입상태에서 강렬한 기쁨에 넘쳐 사진을 찍고 있었다.” 1962년 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이 등장했는데, 그는 정말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줄리엣 해킹. 위대한 사진가들.) ]


나는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이 거리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왜 그토록 희열에 찬 채로 몰두해서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사진을 찍었는지 알 것 같다. 왜냐하면, 나도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갔을 때, 그런 식으로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춤을 추는 잠자리’ 같았지만, 나는 간혹 내가 ‘빛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 같다’고 생각했다. 카메라를 손에 쥔 채, 기우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앞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어깨와 머리 위에 타오르는 빛만 보였다. 나는 그 빛을 탐색하느라 거의 미쳐 있었다.


[ 그는 여기저기를 걷다가 순식간에 사진을 찍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다시 걸음을 걷는다. 이처럼 동작이 날렵하기 때문에 험악한 꼴을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피에르 아술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을유문화사) ]


나도 그랬다. 물론 내 지질한 아마추어적 행태를 들어,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위대한 사진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게 외람된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와 그의 사진에 대한 글을 읽을수록, 나는 왠지 우리가 서로 비슷한 정서적 기반 위에 놓여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뿐 아니라, 주로 순수사진(스트레이트 사진)을 즐기는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을 통해 기하학에 대한 관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냈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금 분할 법칙에 충실한 그의 이미지 위에 구성 도식을 적용해 가며 이 사실을 설명하곤 한다. (클레망 셰루.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생각할 수록 <브레송>은 우리와 같은 부류임에 분명하다. 그도 우리가 찾는 것을 찾고 있었고, 우리가 본 것을 보았을 것이다. 물론 그건 바로 기하학적 구성미를 갖춘, 현실 속 그림이다. 사진행위는 결국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그런 그림들을 찾아 다니는 일종의 '숨은그림 찾기'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차를 몰아 아름다운 풍경이 출몰하는 장소로 찾아 다니고, 이른 새벽부터 신발에 이슬을 적시면서 들판을 훑고 다닌다. 밤에 삼각대를 들고 건물 옥상 위로 올라가거나, 한강 다리 밑에서 조명이 켜지기를 기다린다. 혹은 요즘 나처럼, 더위를 무릅쓰고 사람이 붐비는 도시 길거리에서 변화하는 빛을 탐색한다. 물론 얻어낸 성과물이라고 해 봐야 고작 아름다운 한 조각 그림이고, 그건 렌즈를 통해 필름에 비친 현실의 겉모습이다.


뭔가 기록을 하거나 취재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건 아니다. 현실 세계를 뒤져서 그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것이 목적이다. 모양을 찾아내고 선을 찾아내고, 독특한 패턴이나 색과 구성을 찾아내서 사진을 찍는다. 그게 무엇인지, 거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근데 이런 행위에, 혹은 이런 사진에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데는 각기 나름의 의도와 목적이 있다. 보도사진가는 특종을 위해, 상업사진가는 상업적 목적을 위해,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사회문제를 들춰내서 사람들 앞에 제시하려고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나와 내 사진동무들은 단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 상황을 즐기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다. 사실 '아름다움'이라고 해 봐야, 대부분 남들 이목을 끌만큼 대단한 ‘아름다움’도 아니다.


사진(특히 스트레이트 사진)은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이상적인 수단은 아니어서, 미적 이미지로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카메라 앞에 놓인 현실의 모습은 완벽하지 않기에 거기엔 항상 우리의 미적 감성에 부합하지 않는 부족한 면도 있기 마련이다. 뷰-파인더에 비친 현실의 모습이 불완전하면 사진도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사진가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한계는 있다. 진정,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고 싶다면, 당연히 그림을 그려야 한다.


즐거움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당초 카메라를 들게 만들었던 사진찍기의 즐거움은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카메라라는 '자동그림제조장치'에 대한 관심과, '세상과 나와 카메라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사진이 찍히는 그 신기한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찰칵 찰칵”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경험이 새로움을 희석했고, 사진에 대한 지식이 자라면서 호기심을 먹어 치웠다. 즐거움의 발화점은 점점 높아지는 한편 열정은 점차 줄어든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진을 찍는데 드는 노력과 비용을 조금씩 줄여 나갔다. 제법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열정이 저질러 놓았던 방만한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겁고 거창한 장비들을 처분했고, 번거로운 유명 촬영지 순례도 그만 두었다. 그래서 남은 것이 겨우 ‘일상의 주변을 탐색하는 거리사진‘정도다. 나는가끔  서류가방에 소형카메라 한 대만 넣고 접근성이 좋은 시내로 나가서, 사진에 대한 남은 열정을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거리에서 열정을 불태운 날, 빌딩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을 등지고 돌아올 때, 나는 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아무 쓸데없는 사진이다.” 상업적으로 써 먹을 의도도 없고, 기록하거나 취재할 목적도 아니라면, 기댈 곳이라곤 오직 ‘예술’뿐이다. 한데 이런 일에 무슨 예술의 분자가 깃들 수 있을까?




[모든 예술작품의 조형과정에서 예술가의 적극적인 개입은 그것이 예술적 표현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홍상현. 사진도 예술입니까? p25) ]


예술적 표현에는 만든 사람의 ‘의도적인 개입행위’가 필요한 법이다. 물론 그 ‘의도’는 순수해야 한다. 순수하다는 건, 상업적이거나 실용적 목적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목적이 있으면 의도가 왜곡되어, '키치(kitsh)'로 흐르기 쉽다. 그게 통념이다. 나와 내 아마추어 사진동무들의 의도는 순수하기 짝이 없으니, 그런 면에서, 우리들의 사진은 예술작품이 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내가 얼마나 개입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카메라가 제작한 이미지를 사랑하고 존중해서, '되도록 건드리지 말자'는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순수(스트레이트) 사진'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그 때문에 사진에 개입하는 길이 막히고 자기표현의 여지가 줄어들어, 예술적 표현에서 멀어지게 되는 게 아닐까?


스트레이트 사진에서는 사람의 의도적인 개입행위가 깃들 수 있는 곳은 오직 ‘촬영행위’뿐이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을 연출하지 않고 필름(원본사진)에 그림을 그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피사체를 선택하고 앵글과 프레임을 결정하고 카메라를 조작하는 과정이 전부다. 그러니까 그 행위 어딘가에 개성과 취향과 (순수한) 의도에 따른 자기표현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자기표현’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단지 길거리에 떨어져있는 '아름다움'을 주워온 것뿐이다. 그건 내 의도와 무관하게 있었고, 만일 거기 그런 게 없었다면, 나는 사진을 찍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진은 셔터를 누르면 순식간에 찍혔고, 나는 이미지가 제작되는 과정에 개입할 방법도 기회도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 세상 주변을 빙빙 돌면서 피사체를 탐색하고, 카메라를 작동시키는 것만으로 '예술작품을 제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거기 어디 자기표현이 깃들 여지가 있을까? 나는 내 행동과 사진에서 어떤 가치나 의미도 떠올릴 수 없었고, 그만 풀이 죽고 말았다. 실용적 목적도 없으면서 예술적 가치도 없다면, 남는 건 무의미뿐이었다.




사진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에 가보면, 주로 회화적 기법을 차용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포토몽타주나 포토콜라주처럼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오려 붙이는 등, 사진을 활용해서 만들어진 그림이었다. 디지털적인 관점에서 보면 ‘합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그런 작업 대부분은 명백히 ‘그림’이었지만, 묘하게도 ‘사진’이란 이름으로 제시되었다. 뿐 아니라, 사진이 등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성격의 예술활동(주로 개념미술)까지 사진에 발을 걸쳐 놓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것들은 명백히 자기표현이 깃든 ‘예술작품’이었다. 하지만 그게 왜 '사진'인지, 나는 몹시 의아했다.


사진예술가들이 ‘사진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빙자해서 행위예술에 열중하는 와중에 본연의 사진을 그대로 고수하는 축은 대부분 아마추어사진가인 나와 내 사진동무들이다. 아마추어사진가가 카메라 셔터를 눌러서 촬영한, 스트레이트 사진에도 예술적 표현이 묻어 있을까? 혹은 나중에 그렇게 될 가능성은 있을까? 비록 지금은 (아직 서툴러서) 아니라 할지라도... 그래서 나는 <브레송>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브레송>은 우리와 같은 부류처럼 보였고, 그가 '의미 있는 스트레이트 사진'의 전범(典範)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사진을 찍는 동안이나 암실에서 잔재주를 피워 사진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속임수들은 안목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실히 드러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권오룡 (옮긴이). 열화당 中) ]


그는 연출되지 않은 실제 세상만을 대상으로 삼아 사진을 찍었고, 필름 원본을 트리밍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연출도 하지 않고, 카메라가 찍은 그대로 인화했으면서도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주는 바람에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그로 인해 사진계의 전설이 된 것이다. 카메라가 만들어낸 사진을 그대로 존중하고, 찍은 상태에서 더 이상 손을 대지 않는 것을 가치로 여겼던 셈이다.




<브레송>의 사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사람들은 그 사진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는 그 사진에는 어떤 예술적 숨결이 깃들어 있을까? 어쩌면 한 장의 스트레이트 사진과 거기에 기대어 활동하는 아마추어적 사진의 의미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가장 큰 역설은 그가 가장 열정을 품었던 대상이 사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사진이 아닌 드로잉과 회화를 선호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작가 중 한 사람인 그에게 사진은 단지 빠르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일 뿐이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을 알기 힘든 이유는 그가 스스로에 대해서나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모순되거나 도발적인 이야기를 종종했기 때문이다. 카메라 뒤에 숨은 그는 실제로는 뻔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엣 해킹. 위대한 사진가들. p95)]


하지만 기대와 달리, 정작 그 자신은 사진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지 스케치 하듯이 빠르게 '그림을 그리기 위한 수단'으로 카메라를 사용한 것뿐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사진은 단지 '그림'이었다. 한데 그 부분은 나나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이 찍는 사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카메라가 만들어낸 그 그림이 가진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도 우리처럼, 사진에서 오로지 그림의 형식미만 추구해왔다면, 본질적으로 우리와 다를 바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는 간혹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 듯한 말을 슬쩍 비치기도 했다. 마치 길거리에서 라이카로 포착한 사진에 조형미 외에 다른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 ‘결정적 순간’ 곳곳에서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건의 의의가 시각적으로 이해되고 소통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미지의 ‘기하학적’ 혹은 구성적 측면을 통해서” 라고 주장한다. “나에게 있어 내용은 형태와 분리될 수 없다. 나에게 형태란 표면, 선 그리고 가치가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엄밀한 조직을 의미한다. 우리의 개념과 감정이 구체화되고 소통 가능하게 되는 것은 오직 이 조직 안에서이다.” (데이비드 데이비스. 사진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


<브레송>은 사진적 표현의 핵심이 ‘기하학적 감각’이라고 말한다. ‘기하학적 감각’은 카메라를 사용해서 3차원의 현실 속에서 2차원의 조형을 포착하기 위해 사진가가 갖춰야 할 필수적인 감각이다. 사진의 구성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적절한 순간에 사진으로 포착하는 것은 사진가의 본능과 직관이다. 결정적 순간에서 '결정적'인 것은 '현실의 공간에 그려진 그림'이고, 그의 재능은 그런 것을 발견해서 카메라로 포착하는 솜씨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내용은 형태와 분리될 수 없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용'은 '사진 속 현실에 담겨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이고, 따로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별다른 메시지가 담기지는 않은 것이다. 한데 기록물이나 보도자료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도 아니면서, 단지 세상 한 귀퉁이를 비추고 있는 그 거울 이미지가 가진 의미는 뭘까?


그런 의문을 가졌지만, 나는 그의 사진에서 '기하학적 감각으로 포착한 시각적 구성미‘ 밖에 읽지 못했고, 그는 끝까지 자기 사진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따라서 나는 결국 사진은 '실제 현실에 존재했던,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튜디오와 같은 인공적 세상이 아닌 실제 세상에서 따낸(?) 조화로운(혹은 거의 완벽하게 아름다운) 구성에서 사진의 의미를 느낀 것이다.




<브레송> 사진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오직 카메라로 찍기만 하고 다른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

보조장치의 도움을 받거나, 현상/인화 과정에서 특별한 (회화적)효과를 내지 않았다.


2. 사진의 피사체가 연출하지 않은 그대로의 실제현실이라는 점.


3. 그러면서도 사진의 형식미가 뛰어나다는 것.

마치 연출을 했거나, 화가가 구상해서 그린 그림같은 구도를 보인다.

물론 현실을 ‘그대로’ 기록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색을 제거해서 흑백으로 표현했고, 현상/인화하는 과정에서 명암 대비를 조절했다.

물론 그 정도는 사진에서 관습적으로 인정되어 왔던 수준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는 콘트라스트가 심하거나 흐릿한 인화 상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다 선명한 쪽을 선호한다. 그는 특히 회색조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피에르 아술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그는 중간 톤이 풍부한 흑백사진을 찍었다. 또한 거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조형미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을 재빨리 포착했다. 이미지 측면에서 보면, 이런 사진의 시각적 효과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1. 흑백사진이 주는 효과

흑백이미지는 통일성과 낯 설음을 제공한다.

그림이 아닌 현실세계는 조화롭지 않은 색으로 가득하다.

색을 빼거나 단색으로 처리하면 색상 면에서 통일성을 기할 수 있다.

또한 색이 없는 세상은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다.

현실세계에는 그런 장면이 없기 때문에, 색이 없는 세상은 우리 눈에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비치는 것이다.


2. 정지된 장면(대상)을 주시하는 효과

프레임이 갖는 의미는 그 안에 있는 것을 '주의를 기울여서 잘 들여다 보라'는 것이다.

어떤 순간이든 혹은 어떤 대상이든, 프레임에 가둬서 바라보면,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 의미를 새삼스레 곱씹게 된다.

더욱이 움직이는 세상을 정지된 상태로 보는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다.

그건 마치 영화관에서 필름이 끊긴 스크린을 보았을 때처럼 묘한 느낌을 준다.

흘러가던 것들이 갑자기 멈추었을 때, 우리는 더 자세히 보려고,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물론 보도사진에서도 움직이는 인물을 느닷없이 포착한 이미지를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장면을 미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시선은 확실히 드물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보면서 자꾸 의미 문제를 들먹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현상’일 뿐이다.

사람의 시선을 끌 수 있도록, 일정한 형식미만 갖추면, 어떤 사진이나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는 없다. 단지 형식미뿐이다. 하지만 별다른 의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사진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 카르티에 브레송은 인물 초상사진 분야에서 '운이 좋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잘못 알려졌다고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운'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우연의 일치가 존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매순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귀를 열어놓고 손에는 항시 라이카를 쥐고 있노라면, 때론 운명이 포착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대를 호흡하고, 순간의 진면목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유연성을 갖추고, 인내심을 잃지 않은 채 기다리다 보면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한데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 모든 자질을 가장 잘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순간에 한 데 집중시킬 줄도 아는 인물이다. (피에르 아술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결정적 순간'은 '운명이 포착되는 순간'도 아니고, 나는 그가 '시대를 호흡했던 것' 같지도 않다. 다만 그는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얼핏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이 조화롭게 보이고, 진부한 현실이 아름답게 비치는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할 수 있었다. '결정적 순간'은 그렇게 '세상이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구성을 이루는 순간'을 뜻한다. 그리고, 그건 바로 나와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이 열정적으로 찾아 다니는, 바로 그 것이다.


[ 인간은 진화를 거치면서 생물학적으로 발전했고, 이에 따라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유일한 생명체가 되었다. 인간은 모든 작용에는 원인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 속에서 방향을 설정하고 세계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우르반.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 P86) ]


우리는 '의미 붙이기'를 좋아하고, 무의미를 잘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의미가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숲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를 듣고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할 줄 몰랐던 존재들은 전부 고양잇과 동물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때 살아남은 조상의 후손이다. 그래서 (아무리 내용이 빈약하더라도) 기어코 의미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의미 전문가'인 사람들은 그의 사진에서도 역시 의미를 상상해 냈고, <브레송>은 그런 관심에 부응해서, 말을 몇 마디 건넸을 것이다. 아마 별 의미 없이 던진 말 중에 서로 엇갈리는 말이 있었을 것이고, 그게 다시 신비로운 제 3의 의미를 탄생시킨다. 그 뒤로도 '의미 전문가'들은 무수히 많은 의미를 만들어냈고, 마침내 지금과 같은 ‘브레송의 신화’를 창조했을 것이다.


만일 그의 사진들이, <안셀 아담스>가 그랬듯이, 현상/인화하는 과정에서 (‘존 시스템’ 같은 기술을 이용해서) 명암을 주도 면밀하게 조절해서, 미적 표현 효과를 극대화한 결과물이라면,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의 사진 속 장면이 마치 영화를 촬영하듯이 배우나 모델을 동원해서 연출한 것이라도 마찬가지다. 


사실 사진 결과물 그 자체만 놓고 (그림을 평가할 때처럼) 본다면, 그의 사진은 그렇게 '대단하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브레송>이 연출을 하거나 조명을 사용했다면, 혹은 현상/인화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공을 들여서 이미지를 조절했더라면, 그의 사진이 보여준 형식미가 지금처럼 각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그의 사진에 별 다른 의미가 없다면, '그림'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런 기준에 따라 평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사진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카메라에만 의존해서 사진을 찍은 그의 ‘고지식한 행동’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가치'는 바로 거기서 나왔고, '의미'도 거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브레송>은 온갖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면서도, 끝까지 무기를 빼지 않고, 맨손으로 상대하는 영화 속 영웅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가치는, 얼마든지 더 강해질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는, ‘허세’나 '결벽증'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수전손택(미국. 소설가, 평론가. 1933~2004)은 <브레송>의 사진찍기를 두고 이렇게 설명했다.


세계의 구조를 찾아내는 것.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

형상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는 것.


소박한 표현을 쓰면 이렇게 된다.


‘현실 세계에서 시각적 형식미를 찾아내는 즐거움.’


나는 그게 <브레송> 사진의 정수(精髓)라고 생각한다. [손택]은 그것을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확하게 설명했다.


[ 카르티에 브레송을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수필가 장 프랑수아 르벨은 이렇게 말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 어떤 합리적 설명보다도 강력한 수단을 써서 동료 사진작가들을 무력화시켰다. 바로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내가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다른 사진작가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그는 사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할 말이 없다고 했다. ( 피에르 아술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사진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진은 ‘사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예술작품을 만들려면 사진이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진이 계속해서 사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면, 사진은 언제까지나 예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부정해도 사람들은 그의 사진이 '예술작품'이라고 고집한다.


예술작품은 사람들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 지도 모른다. 아니 ‘가슴속’이라고 해야 하나? 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하고 '사람들이 예술이라고 믿는 것이 예술이라'고 주장한 <뒤샹> 이 맞는 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이론과 상식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어쨌거나, <브레송>이 순수 스트레이트 사진을 즐기는, 나나 내 아마추어 사진동무들과 같은 부류인 건 분명하다. 


아마 그 때 태어났다면 우리 모두 <브레송>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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