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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Sep 01. 2023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사진의 제스처

<존 말루프>는 벼룩(경매)시장에서 필름이 가득 담긴 상자를 하나 구입한다.

시카고의 옛 시가풍경이 담긴 사진이 필요했던 것인데, 그 안에 자기가 원하는 사진은 없었다.

하지만 사진이 범상치 않아 보여서, 사진 중 일부를 SNS에 올렸다.

대중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는 궁금증에 사진 찍은 사람을 추적해 보게 된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비비안 마이어>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1950년대부터 시카고와 뉴욕 거리를 사진기에 담았지만, 한 번도 사진을 공개한 적은 없었다.

직업은 보모였고, 당시에 이미 사망했으며, 현상되지 않은 필름을 포함해서, 약15만장 가량의 사진을 남겼다.

그 사진들은 갤러리에 전시되었고 그녀의 흥미로운 삶은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된다.


명동거리

유투브에서 어떤 동영상 강의를 보던 중에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텍스트'와 '콘텍스트'란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그녀의 사진이 사례로 언급된 것이었다. 좁은 의미에서 ‘텍스트’란 ‘언어로 이루어진 문장이나 이야기’ 등을 뜻한다. 하지만 넓게는 ‘해석이 필요한 모든 것’이 텍스트가 될 수 있다. 말이나 글뿐 아니라 한 장의 사진이나 그림 혹은 특정한 사건도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사진은 말이다.‘ 라는 선언은 사진을 텍스트로 보는 관점을 나타낸 것이다. ‘콘텍스트‘란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일종의 단서 같은 것을 말한다.


텍스트는 대게 그 자체만으로는 내용이 충분히 전달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체 글에서 앞뒤 맥락과 당시 상황 등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말을 들을 때는, 앞뒤 맥락이나 상황과 함께,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태도와 어투 등을 참고해야 제대로 진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어떤 사실, 환경, 맥락, 이론 등 텍스트의 진의를 짐작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콘텍스트’라고 부른다. 즉 텍스트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콘텍스트’가 필요하다.


사진의 경우, 흔히 제목이나 캡션이나 기사(보도사진인 경우) 등이 콘텍스트 기능을 하기도 한다. 강의에서 강사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한 장씩 펼치면서, '사진이 뭔가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매우 훌륭한 텍스트로 생각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어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 사진은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비비안마이어>는 무슨 이유에서 그 많은 사진을 찍었을까?

왜 이런 것들을 이런 방식으로 촬영했을까?


그녀는 이미 죽었고, 거의 외톨이로 지내서 생전의 행적조차 알려줄 만한 사람도 거의 없다. 사진을 발표한 적이 없으니, 사진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비평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촬영된 사진들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아 보기도 어렵다. 그렇게 아무런 설명도 단서도 없는 사진은 어떻게 읽고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콘텍스트가 빈약한 텍스트'의 한 예로 강의에 써먹은 셈이다.


이 사진은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나는 동영상을 보면서, 거기서 강사가 가졌던 의문에 대답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 답은 매우 간단하고, 내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답은 바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다. 내가 그렇게 단정짓는 이유는 그 사진들은 '텍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롤랑바르트> 말했듯이, '사진은 기호가 없는 언어'이고, 다른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기호'는 인위적으로 제작된 것이고, 만든 주체의 의도가 있을 때 성립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특별한 의도' 없이 찍혔다. 그러니 굳이 그것들이 하는 말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궁금증을 가지면 공연히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그 사진들은 거의, 거리에 있는 돌이나 꽃과 같은 존재다. 거리에서 돌이나 꽃을 보면서 그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진도 그냥 그렇게 눈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볼 때, ‘무의미하다’고 느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세상의 맥락에서 분리된 한 장의 사진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모든 사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진이 그렇다.


<비비안 마이어>가 찍은 사진들은 한 마디로 ‘맥락이 없다’. 그녀는 사람들이 일상을 보내고 있는 거리에 나가서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특정한 대상을 선택하지도 않았고, 일정한 방법으로 촬영한 것도 아니다. 걸인과 주정뱅이, 부자와 빈자, 여성과 남성, 아이와 어른. 즐거워하는 사람과 놀란 사람, 불쾌한 표정을 지은 사람. 거울이나 유리창에 비친 자화상이나 땅바닥에 비친 자기 그림자도 촬영했다. 사진에는 불행해 보이는 사람들의 남루한 모습도 있지만, 위트가 엿보이는 유머러스한 사진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 무엇이 있든, 그건 그녀가 의도했거나 표현한 건 아니다. 그녀는 다만 현실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마구잡이 식으로 이미지를 수집했을 것이다. 그 사진들에서 일관성이 있다면, 오로지 촬영한 지역과 사용한 카메라가 같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 뿐) 의도한 건 아닐 것이다. 현상조차 하지 않은 채 방치된 사진도 있었고, (전시를 한 일이 없다 보니) 무슨 생각으로 그 사진들을 찍었는지 알 방법도 없다.


물론 그래도 사진을 보면 분명 무슨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진 속 사람들의 표정이, 사진에 담긴 사진가의 그림자가, 쓰레기통 안에 버려진 인형이 마치 나에게 뭔가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 지 짐작할 단서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맥락을 모르는 사람들은 궁금해지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으니, 결국은 자의적으로 해석을 시작하게 된다. 사진과 사진가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해서 여러 가지 추론을 해 나가는 것이다. 만일 작은 단서라도 발견하면, 거기 매달려서 이야기를 부풀리고, 의미를 생산한다.


[ 마이어는 사진을 통해 단순한 지식이 아닌 지혜를 구현한 것 같다. 사진을 찍을 때면 늘 침착했으며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때론 탁월한 선택을 하기도 했고 때론 단순히 실험적인 사진을 찍기도 했다. 출입문, 상자들, 타인의 삶에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 거리, 낯선 이의 뒷모습 등 프레임을 통해 본 세상의 편린에 마이어의 반영이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마이어의 렌즈를 통해 그녀가 비친 모습을 보고 다른 각도에서 같은 사진을 다시 보게 된다. (비비안 마이어 셀프 포트레이트 . 윌북 中) ]


'그녀의 사진은 세상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진과 차별화된다.'

'그녀는 성격이 밝은 사람이었고, 모험적이며 지적인 면이 많았다.'

'성질이 괴팍한 외톨이였으며 외롭게 살았다.'

'그래서 마치 일기를 쓰듯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삶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터무니없는 여러 추측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그런 추론들은 무의미하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아서, (진실을 아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칫 너무 경솔하게 보일 위험도 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만약 그녀 자신이 이런 글을 읽는다면, '뜬금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단언하건대, 그 사진들은 그 안에 어떤 내용도 특별한 의미도 담겨있지 않다. 사진가라면, 아마도 그 사진들이 어떻게 찍혔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보도사진 기자도 아니고 맥락에 따라 사진을 찍는 다큐멘터리 작가도 아니었다. 따라서 특정한 의도를 갖고 일관성 있게 사진을 촬영한 건 아닐 것이다. 그저 별 생각 없이 시선이 끌리는 대로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진 프레임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세련된 감각을 지녔고, 형식미에 관심이 있었을지언정, 카메라 앞에 놓인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나 자기가 찍는 사진의 내용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진 바가 전혀 없다. 어떤 면에서, 그 사진들은 단지 카메라를 이용해서 현실의 한 장면을 수집하듯 포착한 '무의미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카메라 앞에 놓여 있던 그 현실에는 사진의 ‘콘텍스트’ 기능을 할 수 있는 어떤 맥락이 숨어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흉측한 모습을 한 걸인이 거리에 주저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는 장면이 찍힌 사진을 보면 이런 게 궁금해진다. 그가 누구인지, 어쩌다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 가족은 있는지, 햄버거는 어디서 났는지, 쓰레기통을 뒤졌는지 아니면 누군가 방금 그에게 적선을 하고 갔던 것인지... 사진만 봐서는 알 길이 없지만, 현장에 있었던 사진가는 알려고 들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가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또 하나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그건 ‘사진가가 그 장면을 왜 찍었는지’ 하는 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늘 왜냐고 묻는 버릇이 있다.


‘수집의 대상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그건 다소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어쩌면 거기에 사진가의 철학(?)이 깃들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때로는 그 부분이 바로 사진가들의 전문성에 속하는 영역일 지도 모른다. 별 흥미는 없겠지만, 굳이 설명을 해보자면, ‘현실과 카메라가 만나서 빚어내는 미학 같은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사진을 보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바로 그것’이다.


뭔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어서 질문을 일으키는...


사진가는 본능적으로, 남들에게 보여 줄만한 '특별한 것'들을 찾아 다니기 마련이다. 특별하지도 않은 걸 남들 에게 보여주려면, 몹시 겸연쩍을 것이다. ‘특별한 것’이란 흔히 유별나게 아름다운 것들을 포함해서, 새롭거나 잘 볼 수 없는 희귀한 장면들이 된다. 대상이 특별할 수도 있지만, 평범한 것들이 특별하게 보이는 어떤 순간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빛의 변화로 인해 나타나는 자연현상일 수도 있고, 사람이나 동물의 표정일 수도 있다. 사물이 공간에 배치된 상태일 수도 있고, 어떤 동작이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묘한 형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생명력이 느껴지는 좋은 사진은 관객에게 뭔가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런 걸 ‘제스처(Gesture)’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비전(Vision)’이라고 불렀지만, 어쨌거나 전부 모호한 표현이다) 마치 내게 뭔가 말을 건네는 듯한, 멋진 ‘제스처‘를 보면 왠지 시선이 머물고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보여주는 의미있는 몸짓’이고, 그런 게 사진의 피사체가 된다. 사진가란 그런 걸 포착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다. 또한 멋진 ‘제스처’가 성립하는 세상의 비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비비안 마이어>는 카메라를 들고 ‘뭔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찾아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는 그녀 자신도 모른다. 그저 거기 매료되어 피사체를 선택하고 셔터를 눌러서 감각적으로 사진을 찍은 것뿐이다. 아니면 그저 특별해 보이는 대상들을 찾아다녔을 수도 있다. 사진의 제스처나 비전이 사진을 편집할 때 처음으로 발견되는 일은 아주 흔하다.


이 사진은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모든 화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 것처럼, 모든 사진가가 일정한 의도 하에 사진을 찍는 건 아니다. 의도 없이 찍은 사진은, 의미가 들어있지 않아서, 그것을 읽어낼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사진들은 '텍스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진을 텍스트로 보고 싶어 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텍스트가 아닌 사진을 텍스트로 보면서 의미를 궁금해 하는 상황은 마치 '서예작품에서 글자의 의미를 궁금해 하는 경우'나 같다. 서예가는 '글씨'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글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성의 하게도, 그는 자기가 쓴 글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콘텍스트'가 부족해도, 사람들이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든 내용은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생성된 무성한 말들이 사진의 내용과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텍스트’들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 의해 생산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게 대체 뭘 위한 ‘텍스트’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상상력을 통해서 채워지는 내용들이 사진의 ‘온전한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얘기다. 머릿속에서 지어낸 그런 이야기들은, 말로 내뱉는 순간 곧바로 ‘오해’로 판명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의 ‘실제 텍스트’는 카메라 앞의 그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진작가는 <비비안 마이어>가 아니라 <존 말루프>인지도 모른다. 사진을 텍스트로 보면, 중요한건 사진의 형식이 아니라 거기 담긴 내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게 사진 그 자체가 아니라 내용이라면, 작가는 사진의 내용을 창안한 <존 말루프>인게 맞다. 그렇다면 <비비안 마이어>는 단순히 카메라를 작동시킨 도구일 뿐이다. 혹시 <앗제>나 <브레송>의 신화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제스처는 어디에나 있다. 풍경에도 있고, 인물에도 있고, 꽃 사진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제스처가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장소는 주로 사람이 있는 곳인 것 같다. 제스처는 사소하고 예민해서, '우리가 잘 아는 것들'을 통해서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 시내로 나가는 것이지만, 멋진 제스처를 마주치기는 쉽지 않다.


<존 말루프>는 그녀가 찍은 15만장의 사진 중에 몇 장이나 건졌는지 나는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아마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작 사진의 어려움은 편집하고 전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사진의 창작활동 역시 ‘그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까 사진 그 자체는 별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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