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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Sep 02. 2023

·완전 100% 자연산 사진과 실제현실의 가치

스트레이트사진의 가치 탐색

만약 세상이 (조형적으로) 완벽하다면 사진가는 할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원래 아름다운 것들은 어차피 아름다운 사진으로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흠이 있는 세상을 요리조리 조절해서 완벽한 조형으로 만들어내는 게 사진가의 역할이다.

또한 나도 카메라를 들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탐색하느라 애를 쓸 필요도 없겠다.

굳이 사진을 찍어서 남에게 보여주고 세상에 남긴다는 게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흔해 빠져서 세상에 만연하다면, 비단 ‘아름다움’이라 해도, 진부하게만 보일 것이다.


이건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명동거리


1. 완전 100% 자연산 사진


내가 그 사진동무의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포토샵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포토샵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가 여러 차례 말했지만 그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사진들은 ‘완전 100% 자연산’이 틀림없고, 그건 내가 보증 할 수 있다.


포토샵에서 간단하게 실행할 수 있는, 사진 표현들을 그는 렌즈의 광학적 성질과 피사체가 놓인 외부 상황에만 의존해서 어렵사리 구현했고,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면 해결할 수도 있을 간단한 후보정작업마저 생략해서, 사진을 보기 좋게 꾸밀 기회가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가라앉은 듯 차분한 색상과 톤은 피사체에 원래부터 깃들어 있던 현실의 빛이 렌즈를 통과하면서 만들어진 자연적인 색상이며, 흐릿하고 부드러운 배경의 질감은 활짝 열린 조리개가 빚어낸 광학적 효과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의 사진 속에 나타나 있는 모든 느낌이 ‘그가 사진을 찍었던 그 순간, 눈으로 보았던 그대로 임에 분명하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사진을 보면, 그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내가 마치 그 옆에 나란히 붙어 서서, 뷰파인더 안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사진의 조형적 구성미에 다소 미흡한 점이 있어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고, 의도했던 효과가 미약해 보여도 아쉽거나 모자란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래 우리 눈앞의 현실은 그런 것이고, 약간 과장하는 카메라의 표현능력을 감안해도, 인기있는 파워블로거의 사진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울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편에 서서 변명까지 해주고 있었다. 평소 남들 사진을 볼 때, 까다롭게 굴며 흠을 찾던 나의 시각이, 그의 사진 앞에서는 공정성을 잃고 편파적이 되고  것이다. 구도나 색상 같은 외형상 미흡한 부분에 대해 너그러워졌으며, 사진에 담긴 내용도 좀 더 쉽게 읽히는  같았다. 좋은 표현이 눈에 보이면, 실제 표현된 상태에 비해 더 큰 울림이 느껴지기도 했다.




디지털 후보정을 통해 아름답게 윤색된 사진들에 익숙해진 탓인지, 나는 은연중에 사진에서 완벽한 구성미를 기대했다. 구성미가 모자라면, 사진가의 솜씨가 서툴다는 생각이 앞서면서, 사진을 더 이상 눈 여겨 보지 않게 되는 경향도 생긴 것 같다. 그런데 유독 그의 사진을 볼 때면 그런 관점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던 것이다.


원래 현실이란 그렇게 완벽한 그림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


나는 특정 사진에 대해서만 관대한 태도를 갖는 건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내 판단과 느낌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실제로 바라보았을 그 현실은 이 사진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사진에 나타난 특별한 느낌이나 표현들이 최소한 ‘그려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고, 그런 믿음이 일종의 가치로 환산되어 나타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이미지의 외형적 아름다움이 주는 가치 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무장하고 달려드는 적들을 무기도 들지 않고 맨손으로 물리치고 있는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무기를 빼내 들 수 있을 것이고, 그때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해 질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별 근거도 없는 희망을, 내가 스스로 마음속에 품어버린 것 같았다.


[ 훌륭한 사진은 사진가의 의도와 목적을 궁금해 하는 퍼즐이 아닙니다. 훌륭한 사진은 황금 비율 같은 디자인과 균형의 다양한 보편 법칙들을 가지고 선이나 모양을 만든 것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순수 사진가 랄프 클레벤저의 인터뷰 - 크리스 오르위그. 소울포토 p285) ]


‘사진에서는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하다.’ 는 사진가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사실 사진가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종이나 모니터에 전사된 그림뿐이다. 관객은 그림을 통해 사진에서 전해지는 느낌에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진가들이 아름다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것뿐일까?


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고 열광하고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이미지의 외형적 아름다움뿐일까? 그렇다면, 연출하지 않고 수정하거나 그리지도 않은 사진이 주는 그 느낌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별 실체도 실속도 없는, 착각에 불과한 걸까? 일부러 칼을 뽑지 않고 적을 물리치는 영화 속 주인공의 액션처럼, 또 하나의 허황된 연출일 뿐일까?


2. 실제현실의 가치


남대문시장

나는 렌즈 뒤에 숨어서 사진을 찍었다.

나와 피사체가 되는 세상 사이에 마치 투명한 막이라도 있는 듯이 행동했다.

내가 거기에 어떤 영향도 끼쳐서는 안 될 것만 같았던 것이다.

피사체가 나의 존재를 알아채면 사진이 무효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거기에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 나는 항상 어떤 절박감에 시달린다. 사진의 성패는 기회에 달렸고, 눈앞의 기회를 그냥 흘려 보내면 안 된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강박 같은 것이다. 내가 사는 이 도시의 거리 풍경은 평소 산만하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다. 이질적인 온갖 것들이 정신 없이 난무하는 상황이라, 체계를 갖춰서 조화로운 상태를 이루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사진의 관점에서, 그러니까 '눈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혼란의 와중에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고 세상이 완벽한 조형으로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


기회가 온 것이다.


기회는 주로, 특별한 빛과 함께 찾아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소중한 순간이다. 진부하고 평범했던 거리가 (사진에 담고 싶을 만큼) 특별하게 변한 것이다. 내가 그 순간을 간절하게 붙들고 싶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 이런 게 있어요. 이것 좀 보세요!” 나는 내가 보았던 장면을 사진으로 포착해서 남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건 잠깐 나타났다가는 곧바로 사라지고, 재현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 아름다운 빛과 멋진 장면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그래서 그 순간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기에 나는 절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적극적인 활약’으로 이어지지 않는 건 유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힘들게 찾아 다니거나 안달하며 기다리는 대신, 원하는 그림을 간단하게 얻어낼 수도 있는 문제였다. 연출을 약간만 곁들이면, 발 품을 덜 팔아도 되고 기다리는 시간을 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좀 더 완벽한 사진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명백한 사실인 걸로 보이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어떤 인위적인 노력도 나는 하려고 들지 않았다.


마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만 하는 신문기자나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사진을 찍는 것이다. 중요한 건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그 시간과 공간이었다. 사진이란 ‘세상의 실제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라는 신념 하에, 피사체에 대한 나의 개입을 스스로 금지한 것 같았다. 사진을 ‘기록하고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 보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솔직히 나는, 세상의 실제모습이나 사건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 사진이 정직한 보도자료나 정확한 기록물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는 쓸모 있는 정보라고는 거의 담길 수 없는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다. 고작해야 거리의 사람은 (XXX씨가 아닌) 그저 ‘행인’이고, 꽃은 (XX꽃이 아닌) 그냥 ‘꽃’일 뿐이다. 그 때 그 순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 지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모양새에만 집중한다. 따라서 사진은 당연히 ‘무의미한 그림’처럼 찍히고, 절대로 의미 있는 기록이나 증명자료는 될 수 없다. 사진이 거기 찍힌 사물이나 사건에서 분리되어,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 것이다. 그게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지 몹시 궁금했다.


형식미가 중요하다면, 연출이든 뭐든, 피사체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마치 ‘사진에 내 그림자가 얼씬거리기라도 하면 전부 다 망친다’는 듯이 굴며, 연출하기를 꺼리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담으려고 들었다. 마치 겉으로는 ‘실제기록’에 집착하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기록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것이다. 이러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얘기다. 꾸미거나 조작하면 기록이 손상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구는 이유. 피사체에 손을 대면, 마치 증거가 오염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김이 새는 것만 같은 그 이유 말이다.




오래 전에 로베르 두아노(Robert Doisneau, 1912 - 1994.4.1, 프랑스 사진가)가 찍은 사진 한 장이 ‘연출된 장면을 찍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논란이 된 일이 있었다. 남녀가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찍은 그 사진은 잡지에 실려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사진 속 장면이 연출된 것이라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 것이다. 그러자 대중은 그를 비난했고 사진은 외면당했다. 사진가 스스로가 당시 연극을 전공하던 두 남녀에게 모델료를 주고 연기를 시켜서 그 사진을 찍었다고 실토했던 것이다.


사진가의 거짓말이 드러났으니, 대중의 비난과 실망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물론 한 번도 ‘연출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연출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은 ‘실제장면’인줄로만 알고 그 사진을 좋아했으며, 그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농락당했다’고 느꼈을 것이고, 일종의 ‘미필적 고의’가 성립한 셈이다. 어쩌면 그 부담감(혹은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실토했던 건지도 모른다. 너무 늦게 자백해서 대중들 실망과 비난의 크기가 가중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 기사를 보았을 때, 선뜻 이런 질문부터 떠올랐다. 만약 그 사진가가 처음부터 ‘연출해서 찍은 사진이라’고 밝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장담하건대, 아무도 그 사진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흘끗 쳐다보고 지나친 다음, 잡지 페이지 안에 묻힌 채, 아무도 사진을 다시 들춰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사진 속 장면이 실제상황’이라는 데서 가치를 느낀 걸까? 이번에는 사진가의 거짓말에 실망할 일도 없었으니, 그렇게 볼 수밖에 없겠다.


대중이 그 사진을 보고 가치를 느낀 원인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는데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연출해서 만든 장면을 찍은 사진은 안 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사진의 ‘기록적 속성’에 관심이 있고, 그 부분에서 사진의 가치를 느낀다고 봐야 할까? 그렇게 볼 수밖에 없겠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약간 필요할 것 같다. 요점은 '사람들이 실제나 사실에 대한 기록 그 자체를 좋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다.


사진가니까 할 수 있는, 아전인수식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그 사진을 평가할 때, 기록 그 자체보다는, ‘사건의 희소성’과 ‘촬영의 난이도’를 더 많이 고려한 것 같다. 그러니까 사진에 담긴 장면이 ‘가능성이 희박하고, 실제 현실에서는 만나거나 사진찍기 어려운 순간’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느꼈을 거라는 얘기다. 다시 말해, 대중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라, 사진가가 (확률이 희박한 현실의 조건아래 분투하던 중에) 운 좋게도 그런 극적인 장면을 만났다는 점.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절묘한 솜씨로 사진을 찍었다는(그렇다고 믿었던) 데 많은 가산점을 주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남녀가 도시 길거리에서 멋진 포즈로 키스하는 장면을 연출을 통해서 재현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진가의 사진이나 영화 필름 등을 뒤져보면, 그보다 더 멋진 사진이 여럿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현실의 공간에서 그런 완벽한 장면(?)이 출현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게다가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을 준비가 된 사진가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훨씬 더 희박하다. 물론 이건 멋진 순간을 사진에 담아 보려고, 도시 길거리에서 고군분투해본 적이 있는 사진가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남녀의 외모나 스타일이 충분히 세련되지 않다거나 포즈가 어설플 수도 있고, 좋은 배경 앞에서 그 일이 벌어져야 하고 그 순간 앞에 행인이 지나갈 수도 있다. 운이 좋게도, 좋은 빛(자연광)이 비쳐야 하며, 두 인물이 선 방향과 거리, 촬영 각도와 위치 등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니까 사진가는 현실에서는 매우 드물고 확률이 희박한 장면을 만나서 완벽한 사진을 찍은 셈이다. 물론 연출을 했다면, 몇 번이고 재현하고 포즈나 위치 등을 얼마든지 수정해서 손쉽게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장면을 영화에서 봤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까지 감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사진을 두고 연출했는지 여부에 따라 가치평가가 달라지고, 사진을 보는 마음가짐이 바뀌는 까닭을 나는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절묘한 사진 속 장면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지만, 사진가 앞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또한 그 순간이 사진으로 남게 된 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가의 솜씨덕분이다. 따라서 대중은 사진가가 얻은 행운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을 것이고 그의 성실성과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솜씨에 점수를 주었을 것이다.


결국 그 사진의 가치는 ‘그 장면이 실제현실’이라는 데 있고, 내용을 들여다보면, ‘가능성이 희박하고 포착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그런 평가방식은 비단 사진속 장면이 사회문화적, 역사적,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면이 아니라도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진의 희소성과 난이도는 그 장면이 지닌 의미에도 있지만, '형식미'에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장면인 경우 희소성이 더 높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런 사진은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연출되지 않은 실제현실의 공간에서 그런 절묘한 '그림(형식미)'이 등장하는 경우 역시 흔치 않다. 또한 사진가가 그런 광경과 직접 마주쳐서 사진을 찍어내는 일도 쉽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굳이 거기 담긴 내용에는 크게 치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사진의 가치는 '사진가가 난해한 여러 현실적 상황들을 극복하고, 드물게도 세계가 완벽하게 미적인 구성을 이룬 그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했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용은 별개의 문제이며, 그 부분은 그게 필요한 사람들에게나 중요할 것이다. 물론 이건 아마추어사진가의 관점일 뿐이고, 내가 사진에서 의미를 느끼는 방식도 그런 식이다.




사진이 ‘절묘하다’면, 그건 대부분 ‘의미’가 그래서가 아니라 ‘모양새’가 그래서일 것이다. 단지 미(美)의 관점에서 본, ‘형태’에 대한 평가라는 얘기다. 실제 현실에서 우연히 성립한 아름다운 구성을 발견해서, 어렵사리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 사진의 가치나 의미는 거기서 발생하고 느끼는 것이다. 나도 아마 그 때문에 (지레 연출하려 들지 않고) 힘들게 발 품을 팔거나 지루하게 기다리게 된 것 같다. 피사체에 손을 대면 마치 김이 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현실의 공간에서 미적 형태를 찾아내고, 여러 난관들을 극복해서 사진으로 포착하는 그 일에는 상당한 난이도가 있고, 나는 그걸 즐기는 것이다. 물론 ‘우연이나 행운’도 일부 작용하고, 그 부분 역시 짜릿한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 솔직히, 사진에 담긴 사회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의미 등은 신문기자나 다큐멘터리 작가가 관심 가질 일이지, 나와 같은 아마추어사진가와는 무관하다. 나는 그런 의미를 눈곱만치도 생각하거나 의도한 적이 없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멋진 조형으로 빚어내서, 누구나 볼 수 있게, 가시적 공간에 드러내는 일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게 인위적으로 연출된 장면이거나 (포토샵 등으로) 그리거나 수정한 경우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건 ‘실제’가 아니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언제라도 재현할 수 있어서 ‘희소성’이 없고, 구현하기 쉬워서 난이도가 낮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진은 또 다른 관점에서, 가치나 의미를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당연히, 연출하거나 만든 행위 자체에 독창성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실제’의 가치...


그러니까 어떤 '실제'나 '사실'이 지닌 가치란 게 비단 그게 '기록이나 증명의 수단'이 될 수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 보다는 일종의 '희귀성에 대한 가치'로 봐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좋은 사진'은 현실에서 흔하지도 않지만, 사진가가 사진으로 포착하기도 쉽지 않은, 그런 사진인 셈이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어떤 장면이 실제 현실에서 일어났다면 그건 엄청난 사건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있었던 엄청난 사건이 영화화된다 해도, 그건 (그 자체 만으로는)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브레송(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1908~2004. 프랑스)은 사진에서 미학적 완전성을 추구하면서도 일체의 인위성을 배제했다. 연출은 물론이고 플래시 사용이나 트리밍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 사진에서 ‘자기 기술’에 집착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나도 내 솜씨를 확인하고 싶다. 조형의 관점에서 볼 때, 마냥 혼란스럽기만 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식별해내는 내 눈썰미가 얼마나 뛰어난지, 그 난해한 상황에서 카메라로 아름다움을 추출해내는 내 솜씨는 또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어느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지, 얼마나 부지런하고, 끈기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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