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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다협동조합 Jan 05. 2022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비진학 청년 1인 주거 이야기 - 정래의 홈―에세이 10

다소 이상론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단 하루를 살아도 문제 없는 집에서 문제 없이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내일 죽을지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인데다, 인생은 기껏해야 순간의 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모든 순간을 단단한 지반 위에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난 한 주 동안 경상도 모 도시에 위치한 본가에 다녀왔다. 연말연시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밀린 독서를 하며 여유롭게 소일했다. 한데 씁쓸한 점이 있었다. 본가에 도착해 거실 불을 켰는데 켜지지가 않았다. 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니 고장이 난지 꽤 됐다더라. 거실 전등 뿐만이 아니었다. 세탁실 전등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화장실 보조등도 켜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집에 하나 있던 체중계도, 부엌에 달아놓은 시계도 더는 작동하지 않았다. 집안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요소들이 성하지 않은 것이었다. 온 집안을 둘러본 내가 한마디 했다. “이제 이 집에는 늙어가는 것밖에 남지 않았네요.” 그러니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아니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늙어가시는 분들’이라고 해야지.” 우리 부자는 멋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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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과 부모님을 싸잡아 ‘늙어가는 것’ 취급한 내 말이 좀 심하고 무례하다 싶기도 하지만, 영 틀린 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둘 있는 자식 가운데 나는 서울에 올라가 살고 있고, 지금껏 본가에 살던 동생도 내년부터는 독립해 수도권에 산다고 하니, 부모님 두 분만이 본가에 남게 된다. 그러면 정말 본가엔 낡은 집과 늙은 부모님만 남는 셈이었다. 큰병은 없어도 점차로 세월을 맞아가는 부모님의 삶이, 큰 하자는 아니지만 사소한 문제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하나둘 나타나는 본가 집 구석구석과 닮은꼴이었다. 괜히 아련하고 공교로운 마음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해온 집이,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가족이 나이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있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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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께 그랬다. “(전등을) 고치기라도 하지 그러셨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안 그래도 전등을 한 번 고치기는 하였으나 금세 다시 고장이 났다고 하셨다. 그래도 다시 고치면 되지 않느냐고 얘길 하려다 말았다. 정영수의 단편소설 <더 인간적인 말>이 떠올랐다. <더 인간적인 말>에서 ‘이모’는 주인공 부부에게, 자신은 곧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를 할 예정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안락사를 결정한 이모의 집을 둘러보며 사람이 새로운 물건을 사는 걸 그만두는 시점은 언제인가, 하고 묻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소비를 자제하게 된다. 죽을 때 싸들고 갈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쌓고 만드는 유무형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부모님도 그런 생각으로 집 구석구석을 성치 않은 그대로 두는 걸까. 사람은 자기에게 얼만큼의 시간이 남았을 때부터 새로운 물건을 들이지 말고 고장난 물건도 고치지 말아야 하는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아직 젊으신데. 그렇지만 비단 젊고 늙음의 문제만은 아닌 것도 같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 서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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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 부모님이 20년만 젊으셨더라면, 혹은 지금처럼 낡은 집이 아니라 본가가 신혼집이었다면, 그래도 전등이나 집기를 고장난 채로 뒀을까. 아마 아니겠지. 다소 이상론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단 하루를 살아도 문제 없는 집에서 문제 없이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내일 죽을지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인데다, 인생은 기껏해야 순간의 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모든 순간을 단단한 지반 위에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모든 순간을 단단한 지반 위에 놓는다는 게 말이야 쉽고, 말처럼 되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게 아버지와 나의 공통된 지론이기도 했다. 당장 나조차도 내일이 있으리라 믿고 오늘의 시간을 희생하는 일이 잦은데 어떻게 부모님께 순간순간을 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 일단 나를 돌아본다. 나는 언제고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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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앞으로 쭉 ‘어른’일 것만 같던 부모님이 ‘어르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또 고등학교 은사님의 은퇴를 맞으면서 요새 부쩍 잘 늙어간다는 게 뭘까, 이른바 ‘웰-에이징(Well-aging)이란 어떤 것일까, 같은 생각을 하는 때가 늘었다. 새해가 되니 더 그렇다. 누구건 그런 생각을 안 하겠냐만은. 잘 늙어간다는 게 뭘까?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어딘가 하나둘 고장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세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잘 늙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잇값은 해야지, 하는 태도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하는 태도 사이에 고민은 늘어간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새해다. 다들 한 살 더 먹었을 텐데 그런 고민을 해보면 좋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잘 늙어갈 수 있을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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