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진학 청년 1인 주거 이야기 - 정래의 홈―에세이 9
큰 바위를 이고 올라가는 남들을 보던 눈이
이제는 내가 올려야 하는 바위의 크기를 훑는다.
마찬가지로, 커다랗다. 무겁다.
그렇지만 이제 피할 수 없다.
나는 삶으로 다가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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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천변 산책로에 사람들이 하나둘 지나간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사람들을 지나보낸다. 일찍 퇴근하고 집근처로 돌아온 저녁, 홍제천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흘러가는 물을 구경하고, 고가차도 위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구경을 한다는 말을 사람들은 다양한 의미로 쓰는가본데, 내게 사람구경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저 시야 안에서 흘려보내면서, 얼마나 다양한 마음들이, 얼마나 숱한 삶들이 걸어가고 있는지 상상해보는 것 말이다. 예컨대 지금 내 눈앞에 걷는 사람은 홍제천을 걷기까지 매일이라는 시간의 아귀가 맞은 때문에 내 시야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내 눈앞에 있기까지 오늘 아침에 일어나야 했을 것이고, 그러려면 일단 편히 쉴 잠자리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밥을 먹어야 했을 것이고, 그러려면 식탁에 식사를 올리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을 테다. 이런 일들이 어제도, 그저께도, 지금까지 저 사람이 지나왔을 모든 날에 일어났다는 말인데. 그런 과정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그리다보면 참 어마어마한 일로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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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예전에는 모든 게 작아보였다.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삶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시시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주어진 시간을 참신하고 창의적으로 써야 곧 사람답게 사는 거라 믿었고, 그래서 많은 꿈을 속으로 그렸다. 모든 게 작아보였으니까. 모든 게 작아보였으므로 그에 비해 나는 커보였다. 그때의 ‘나’는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작은 세상에 기다려라, 내가 간다, 이런 느낌. 오만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살다가 어느 순간 세상 앞에 서니 이젠 반대로 모든 게 커보였다. 먹고 자는 생활의 모든 부문에 돈과 시간이 들어갔다. 이제는 단 하루를 살아도 그 시간의 무게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너무 대단하게 보였다. 어떻게 이만한 무게의 삶을 견디고 사는 걸까 싶었다. 당연히 나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모든게 커다랗기만 한 세상에서 ‘나’는 날마다 작아졌다.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당장 간단한 전표처리조차, 서류를 정리하고 챙기는 일조차 힘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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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도, 내 눈앞에 놓인 모든 걸 작게 보느냐 크게 보느냐 따진다면 크게 보는 쪽이다. 아직도 나한테 세상은 너무 크고 복잡하다. 배운 것은 있다. 바로 존중과 환대의 자세. 커다란 삶의 무게를 이고 여기까지 온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존중받고 환대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깊게 박혔다. 남을 대하기 위해 분명 필요한 요소였다. 그렇지만 숙제는 남았다. 깡그리 작아져버린 ‘나’를 어떻게 다시 키울 것인가 하는 숙제. 그 숙제를 나는 자꾸만 미뤄두고 있다. 핑계는 많다. 나는 아직 역량도 모자라고, 적응할 시간이 더 필요하고,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고……. 그렇게 말하면 일단은 나를 속일 수 있다. ‘작은’ 내가 ‘큰’ 다른 사람들 등 뒤에 숨어있을 빌미가 된다. 커다란 세상 일은 커다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예를 들어 잠을 잔다거나 정처없이 거리를 걷고 시간을 보내는 따위의, 일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고 끽해야 소일(消日)이나 하며 살아도 된다는 변명거리. 그런 변명이 남에게는 모르겠고 일단 자신에겐 먹힌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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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숙제는 숙제다. 밀린 숙제를 언젠가는 해야만 한다. 나는 더 커져야 한다. 내가 도맡는 일의 범위를 넓히고, 내가 지는 책임의 무게를 늘려야 한다. 해야 한다, 는 당위로만은 아무것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삶을 바꾸는 건 당위가 아니라 실천이다. 그래도 당위를 되새긴다.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가 받은 형벌, 즉 바위를 산꼭대기로 영원히 밀어 올리는 벌과 우리네 삶을 동일시한다. 이유도 없이, 그저 형벌이라는 까닭으로 끊임없이 바위만큼의 무게를 굴러 올려야 하는 일이, 의미는 없으되 힘들기만 한 삶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시지프가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즉시 바위는 다시 산아래로 쿵, 하고 떨어져 내려간다. 그걸 다시 시지프는 올려야만 한다. 카뮈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깊게 동의한다. 정해진 목적 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순간의 집합이 삶이다. 여기에 ‘바위를 올려야만 한다’, ‘즉 매일을 살아내야만 한다’는 당위가 있다. 바위는 그 무게다. 바로 삶의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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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홍제천변으로 돌아와보자. 여기, 수많은 시지프들이 천변길을 걷고, 달리고 있다. 나는 지금껏 실컷 관조했다. 아, 그렇구나. 여기 삶이라는 형벌을 받은 숱한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그게 나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면서. 그 형벌의 무게를 어떨 때는 작게 보고, 어떨 때는 크게 보면서 비겁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이젠 더는 그런 식으로 삶과 멀리 떨어진 체로 살 수는 없을 테니까. 시야가 남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진다. 큰 바위를 이고 올라가는 남들을 보던 눈이 이제는 내가 올려야 하는 바위의 크기를 훑는다. 마찬가지로, 커다랗다. 무겁다. 그렇지만 이제 피할 수 없다. 나는 삶으로 다가가기로 했다. 이말은즉슨,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기로 했다. 숱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꼭대기에 바위를 올리는 순간 바위는 쿵, 하고 다시 굴러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할 테고, 그때마다 나는 “자, 다시 한번!” 하고 삶의 무게를 이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바로 삶일 것이므로. 나는 그렇게 바위를 밀고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