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명절 선물에 대한 단상
책이 먼저였는지, 애니메이션이 먼저였는지, 드라마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대학생시절 <노다메 칸타빌레>를 참 재미있게 봤는데 코믹스, 애니, 일드 셋 다 열정적으로 보았다. 그냥 본 게 아니고 정주행을 몇 번이나 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니 이제는 주인공 이름만 생각이 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외에 기억나는 대사가 딱 하나 있다.
"동정할 거면 돈으로 주세요"
정확하게 어느 맥락에서 이 대사가 튀어나왔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이 대사를 보고 배꼽이 빠져라 웃었으며, 맞네 맞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추억만이 남았을 뿐이다. 사실 고개는 끄덕였지만 그 대사의 깊은 속을 이해했다고는 볼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어렸으니까.
이 문장의 참뜻을 이해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
나는 막 사회초년생으로 회사에 갓 입사한 지 겨우 몇 달이 지난 상태였고 민족 대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있었다. 명절상여금이 통장에 입금되었고(감사합니다!) 노조에서 마트 상품권이 나왔고(감사합니다!!), 동호회에서 백화점 상품권이 나왔고(감사합니다!!!) 회사에서 참치기름세트가 선물로 나왔다.(엥?)
반찬투정하는 것 같아서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 사실 나는 캔참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생참치는 좋아하는 편이지만. 남편 역시 캔참치를 크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굳이 참치캔으로 요리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콩기름과 카놀라유, 건강에 안 좋다고 해서 집에서 굳이 굳이 비워냈는데 새 카놀라유가 리필되어 버렸다. 할 수 없이 손품을 더해 동네 맘카페에 저렴한 가격으로 팔아치웠다.
그다음 명절엔 어땠냐면. 명절상여금(감사합니다!), 노조에서 마트 상품권(감사합니다!!), 동호회에서 백화점 상품권(감사합니다!!!) 회사에서는 햄 세트가 나왔다.(엥?)
햄... 물론 가끔 먹으면 맛이야 있지만. 고기가 먹고 싶다면 생고기를 저렴할 때 대량구입해서 얼려놨다가 조금씩 해동해 먹는 것을 선호하지, 굳이 초가공식품인 햄을 찾아먹지는 않는다. 게다가 무게는 어찌나 무거운지! 이걸 들고 집으로 돌아갈 일이 까마득했다. 이걸 우리 집 프라이팬에 구워내는 장면은 상상으로라도 그려지지 않았다. 사무실 직원분들 중 필요한 분이 있으면 자유롭게 가져가시라고 했더니 다행스럽게도 몇 명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눠 챙겨가셨다.
또 어느 해에는 지역에서 갓 수확한 배가 선물로 나왔다. 정확한 품종은 모르겠는데 엄청 크고 단단한 것이, 베어물 때마다 달콤한 과즙이 잔뜩 흘러나왔다. 총무팀에서 배만 십여 종류를 구입해서 직접 다 시식하고 골랐다더니, 그 당도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전년도에 받은 햄과 비교하면 서너 배는 되는 무게였다. 아마 나같이 차 없는 직원들은 퇴근버스에 오르며 나와 비슷한 (썩은)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한쪽 손은 배 박스를 들고, 나머지 손으로 흔들거리는 버스의 손잡이를 잡고 있자니 어렸을 때 노다메가 외쳤던 '동정할 거면 돈으로 주세요'가 무슨 뜻인지 확 와닿았다. 이쯤 되니 꿋꿋하게 상품권을 하사해주는 노조와 동호회가 너무 감사했다. 무게는 깃털처럼 가볍지만 그 활용처는 무궁무진하니. 무게와 가치는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삶의 진리를 그날 버스 안에서 여실히 깨달았다.
총무팀에 젊은 직원들이 대거 유입되었던 어느 해인가, 총무팀 명절선물 담당자가 사무실의 여직원들을 불러 모으더니 이번 명절 선물은 어떤 것을 하면 좋을지 넌지시 물어왔다. 그때 당시엔 나를 포함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명절 선물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가계에 보탬이 되는 것이다 보니 주부이기도 한 직원들 당사자의 의견을 묻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인 것 같았다.
우리들은 총무팀의 혜안에 찬사를 보내며, 그럼 올해는 <상품권>으로 달라고 했다. 이런저런 선물 다 받아봤자 역시 최고는 돈이더라, 재래시장에는 가기 어려우니 온누리상품권 말고, 특정 마트상품권은 근처에 살지 않은 직원들도 많으니 그것도 말고, 백화점과 마트에서 모두 통용된다고 하는 특정 회사까지 콕 찝어주며 여기 상품권이라면 직원들 그 누구 하나 토 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까지 정성스레 첨언했다. 담당 직원 역시 힘들게 마트에 가서 선물 사 올 필요도 없고 상품권을 산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직원들의 소중한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고, 그날 오후에 사장님께 구두 보고되었다.
....... 그리고 그 해에는 명절 선물로 김세트가 나왔다.
명색이 명절인데 가벼운 손으로 사무실을 나가게 할 수 없다는 윗분들의 의지를 결국 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당신들은 차가 있잖아요! 저녁메뉴로 무얼 할지 고민도 하시지도 않잖아요!
속으로만 눈을 흘기며 김세트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다행히 김은 참으로 가벼웠고, 맛도 제법 좋았다. 아이들 밥 먹이는 데에는 김만 한 것이 없기도 하고, 냉동실에 보관하면 눅눅하지 않은 채로 오래 보관할 수도 있으니 나쁘지 않은 선물인 건 분명했다. 아이의 입이 오물오물 움직이며 김을 바쁘게 집어삼킨다. 잘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래, 윗분들이 살림에 대해 무얼 알겠어, 이해심 많은 내가 참아야지.
지금은 회사에 다니지 않으니 그 김세트도 누릴 수 없다. 구시렁거리며 김세트 받아온 게 엊그제같은데. 마트에서 내돈 주고 김을 사다가 예전 명절선물들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하지만. 역시 선물은 상품권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표지사진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