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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귀성 설날, 시어머니께 대단한 오해를 사 버렸다

변명도 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by 파슈하 Jan 31. 2025

빨갛고 길게 채워진 1월 말의 달력을 들여다보며, 이번 설날에는 옷은 몇 벌을 챙길지, 책은 몇 권을 챙겨서 부모님 댁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1월 초 무렵. 시댁에서 전화가 왔다. 부모님께서 우리 집으로 방문을 하신다는 것이었다.


시댁은 시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한 부산에 위치해 있는데, 우리 집이 있는 수원에서 가려면 역시 기차를 타는 것이 제일 편하다. 2시간 반 남짓 걸리는 거리지만 이미 6시간 비행기도 잘 타보았던 아이들인지라 이동이 걱정스러운 건 아니었는데, 4명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2명이 움직이는 게 편하지 않겠냐며 시부모님이 우리 집으로 오시기로 한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남편도 외동인지라 우리 집은 명절이라고 해도 북적북적한 그림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이 모두 모인다고 한들 우리 가족이 움직이거나 부모님이 움직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번에는 후자로 하기로 했다.






명절 직전의 주말에 친정을 다녀오며 바로 마트부터 들렀다. 냉장고가 그야말로 <텅 비어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2~3일분 먹을 것만 사두고 냉장고는 비어두는 편을 좋아하지만, 어머님 댁에는 커다란 팬트리도 있고 냉장고도 3대 있다. 우리 가족이 놀러 간다고 하면 대형마트 두 군데와 시장까지 다녀오시며 냉장고를 채워두신다. (덕분에 부산 맛집을 하나도 못 가 봤다)


그 사랑에 보답해 보고자 우리 집도 이사 온 뒤 처음으로 냉장고를 가득 채워봤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불빛이 음식에 가려 어스름해진 것을 보니 절로 숨이 턱 막혔다만, 돌이켜보니 잘한 일이었다. 연휴 내내 폭설이 와서 외식도 못하고 배달음식도 시켜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만 있다면 가볍게 빵 한 조각 먹고 끝났을 아침밥도 빵, 삶은 달걀, 샐러드, 고구마, 후식으로는 차와 커피, 과일, 과자까지 풀코스로 식탁이 채워졌다. 신혼 때 구입해서 지금까지도 쓰고 있는 코렐 그릇을 전부 다 꺼내야 했다.


우리집 명절 음식

6명분의 (떡)국을 끓이는 것도 이 집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압력밥솥과 하나뿐인 냄비를 동시에 인덕션에 올려야 했다. 평소에는 국을 한 끼 이상 분량 끓이지 않으니 큰 냄비가 아예 집에 없기 때문이었다. 소형가전과 냄비, 그릇, 접시를 종류별로 갖고 계시는 어머님이 불편해하시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신혼 때부터 미니멀라이프를 하는 걸 알고 계셔서 그런지 별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식사 후 차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머님이 갑자기 화장실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런데 말이야, 청소 같은 거 너무 싹싹 할 필요 없어."


"네?"


"화장실 말이야. 아이 있는 집 화장실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깨끗하다니. 나도 예전엔 청소 솔로 박박 문지르고 매일매일 했는데 그거 나중에 다 팔에 무리 가고 그런다. 그렇게 할 필요 없어."



억울(?)하다. 나는 화장실 청소를 비롯한 모든 청소를 전부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실 화장실 평소에 안 써서 물건도 많이 없고, 청소할 것도 많이 없어서 그래요."


"에이, 안방화장실도 깨끗하던데 뭐. 진짜야. 너무 힘들게 청소 안 하고 살아도 돼. 내가 살아보니까 그러더라."



참고로 우리 집은 화장실에 청소 세제도, 청소용 솔도 없다. 내 청소에 대한 열정이 딱 이 정도다. 청소도구는 교체 전에 쓰던 칫솔과 교체 전에  수세미가 전부고, 세제는 보통 쓰지 않는다. 대청소를 해야겠다 싶을 땐 주부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는 <발을 씻자>나 치약 정도만 사용한다.



"부엌도 그렇고. 어쩜 상판이 먼지하나 없이 반짝반짝하잖아."




이것도 오해다. 우리 집 부엌은 소형가전을 비롯한 물건이 많이 없을 뿐, 각 잡고 청소를 하지는 않는다. 유일하게 하는 부엌 청소는 설거지할 때 거름망과 싱크대 주변을 닦는 게 전부다. 식탁을 닦고 난 행주를 뒤집어서 인덕션 한 번, 인덕션 주위 한 번을 닦기도 하지만, 심지어 이건 매일 하지도 않으니.


화장실, 부엌이야 그렇다고 쳐도 거실 또한... 부끄럽게도 나에겐 청소 루틴이라는 게 아예 없다.


예전에 온라인 글쓰기 모임 채팅방에 집에 대한 이야기를 쓰며 집 사진을 공개했더니 살림 엄청 잘하는 것 같다고, 살림 루틴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문제는 나에게 루틴이란 게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 장난감을 놀이매트 위로 다 던져놓는 것 정도가 루틴이라면 루틴이랄까? 뒷일은 로봇청소기에게 맡긴다. 로봇청소기가 청소하는 걸 지켜보는 것만큼 가슴 답답한 일은 또 없기에 일부러 외출해 있는 평일 오전에만 돌아가게 세팅을 해 뒀다.


그러나 5년 정도 사용한 로봇청소기가 고장이 났는지 요즘엔 수동으로 청소기를 밀어야 하는데 그 조차도 매일 하지 않는다. 청소 좀 해야지, 하면 꼭 잘 시간이 되어버려서 아랫집에 대한 예의도 지킬 겸 자꾸 청소기 돌리는 것을 미루는 것이다.



청소기 사정이 이러하니 물걸레질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다른 분들이 "일주일에 한 번 걸레질 겨우 한다"고 할 때 진짜 부끄러워 미치는 줄 알았다. 우리 집에선 아이들이 음식을 흘리는 덕분(?)에 식탁 밑 말고는 걸레질은 한 달에 한 번... 아니, 두 달에 한 번은 했던가? 그것도 집 전체를 닦는 게 아니고, 루는 침실, 다른 날에 거실, 또 다른 날에 서재, 이런 식으로 하니 바닥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다 한 번 닦이는 것이다.




다행히 걸레질할 때도 걸레에 시커멓게 묻어나는 게 없길래 아 뭐야~ 역시 자주 안 해도 문제없네! 속으로 킬킬거리며 또 미루고 미루고 했는데. 때 아닌 오해를 사 버렸다.


"아니요, 어머님.. 저 진짜 게으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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