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선생께서 아브라함 헤셀의 《안식》을 선물해 주셨다. 이 책은 11월에 이미 다 읽었지만, 오늘 다시 서평을 쓰기 위해 읽으면서 표시한 내용들을 다시 읽어봤다.
나는 헤셀의 글을 읽으면서 틸리히의 《종교신학》에 적힌 내용이 떠올랐다. 틸리히에 따르면 이 세상의 종교는 공간의 종교와 시간의 종교가 있는데,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시간의 종교 범주에 들어가고, 동일하게 역사의 시간성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또한 이들과 연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론적 의의를 질문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일 누군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비문을 보았다면, 그중에서도 센나케리브의 테일러 석주의 내용을 읽었다면, 누구나 그가 자신이 정복한 공간이 얼마나 되며, 어떤 식으로 정복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아시리아 시대의 비문이 그렇듯이 테일러 석주 또한 센나테리브가 언제 그들을 정복했는지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시간의 정복은 아시리아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고대 민족이 자신이 시간의 지배자임을 나타내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 황제들의 경우, 자신에게 천명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연호를 지정하고 주변국에게 중국식 달력과 연호를 사용할 것을 강제했다. 한때 중국 학자들은 漢武帝 元鼎이야말로 중국 최초의 연호라 생각했으나, 최근 元鼎 이전에 사용되었다 알려진 연호가 새겨진 명문이 발견되면서 이와 같은 학설은 뒤집혔다. 그러나 중국 황제에게 있어 역법은 제국의 통치를 뜻하는 중요한 상징물이자 “하늘에게 천명을 받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정치적 행위였다. 따라서 제왕은 왕조가 바뀐 다음에 반드시 역법과 복식의 색깔을 바꾸어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음을 알려야 했다. 물론 한무제 시기에도 장수왕과 같이 사사로이 옛 역법(황제의 조율력이나 하나 사실상 은력이다)을 고집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런 이들은 전제군주가 다스리던 중국에서는 처벌 대상이었다. 이처럼 역법은 오로지 황제만이 정할 수 있는 천명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비단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인더스강 유역의 사카팔라바스 정권과 쿠산왕조도 자신들의 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학자들은 사카팔라바스가 지배하던 시기에 출현한 기년 문제를 놓고 고심했으며 지금도 명확한 해답이 없다. 혹자는 셀레우코스 원년, 또는 파르티아 원년, 사카의 지도자 아제스 원년 등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모두 근거가 빈약한다. 아울러 혹자는 굽타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전설적인 행적을 자랑하는) 찬드라 굽타2세가 후나인을 격파한 것을 기념한 비트라마디티야 기원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와 같은 가상의 기년에 대해 학자들은 이미 15세기에야 이르러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된 기념이라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그나마 중국 역사기록과 대조할 경우, 가장 가능성 있는 기년은 대월지인들이 박트리아를 점령한 해라는 주장인 것 같다. 당시 대월지는 흉노와 오손에게 쫓겨 박트리아로 도망쳤는데, 이곳에서 그들은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박트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는 분명 그들의 역사로 비추어 보아 기념할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인들의 시간은 여전히 공간의 지배권을 나타내는 상징이거나 공간을 지배하기에 (수반하는) 시간도 지배한다는 느낌을 준다. 중원 대지의 지배자가 바뀔 때만이 새로운 역법을 만들고, 유목민족인 대월지인들의 박트리아 정복을 기념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사고체계 속에서 시간은 공간의 부속물이라는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시간은 특정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적 주권이 임하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통치라 임하듯이 그리스도교는 공간이 아닌 시간을, 대지가 아닌 인간에게 보다 중심을 두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플로티누스의 플레로마처럼 하나님의 빛은 우주의 한 가운데에서 강력한 빛을 발휘하며, 빛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은 선포될 수 있다. 그의 주권은 공간의 구속을 받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플레로마와 우리의 거리, 그리고 빛이 도달하는 시간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뿜으시는 빛이 작아 보일지는 몰라도 그의 빛은 공간의 경계에 구속받지 아니하고 판노니아 평원의 아바르족 전사와 같이 끝없는 지평선을 향해 달라가고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기념하는 방식을 달리 하시기를 원했다. 성소라 불리는 특정한 장소에 가야만 비로소 볼 수 있던 고대 근동의 신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통치가 공간적 한계에 구속받지 않고, 시간에 속한 모든 존재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싶었다. 따라서 그는 거룩한 시간을 구별하여 자신의 크로노크라토르적 속성을 나타내고자 하셨다.
또한 안식일은 우리에게 신적 영혼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상징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하고 영원하신 질서는 공간에 구애받지 아니한다. 그것은 시간이 끊임없는 운동성을 지속하는 한 영원하며, 종말이 선포되기 전까지 영원한 완전성을 향해 달려간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는 특정 시기의 특정 민족에게 주어진 임시방편이 아니요, 시대를 초월하는 영속성을 가지고 있다. 만일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인간상이 그 시대에 국한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진리의 상대성과 대립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주장한다면 그 또한 안식일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진리는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노예 해방 운동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여성 인권 신장의 외투를 입을 수도 있으며, 아동 노동시간 제한 법안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천부인권적 사상에 입각하여 보면 이들의 본질은 같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티베트 고원 위에 우뚝 서있는 탕글라 산맥의 작은 연못에서 발원하는 강이 있다. 이 강은 티베트 고원을 지나 사천 평원에 이르러 갑자기 여러 강물과 하나가 되어 천리를 가로지를 기세로 三峽을 경유해 武昌 옛 성을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감싸듯이 두른다. 동정호와 파양호의 물길과 합류하면 유속은 느려지지만 이미 거대한 바다 같은 유량을 자랑하는 하수가 되어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양자강의 모습이다. 비록 양자강이 흐르는 공간에 따라 그 모습과 이용세는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양자강이 저 멀리 있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진리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논어∙자한편》에 나오는 공자의 “逝者如斯”라는 한탄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당연 불친절한 중국 선진시대 텍스트의 특성상 학자들은 “逝者”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자는 강물이라 하고, 다른 이는 시간이라 하지만 필자의 졸견으로 보아 이는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묵묵히 흐르는 강물을 통해 보여지는 자연 질서, 그리고 이 자연질서와 같은 속성을 지닌 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중국인들은 진리가 자연의 법도로부터 나왔다고 믿었으며,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만이 우주 운행의 법도를 깨우치는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공자의 “逝者”는 단순히 강물만을 뜻하기보다는 보다 실존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堯舜과 周公旦의 시대라 할지라도, 桀紂와 周厲王의 시대라 할지라도 진리는 여전히 시간 속에서 신율적 통치가 임하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안식일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가? 이를 시간의 건축술이라 한 헤셀의 문학적 비유는 탁월하다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궁 앞 계단과 같은 존재요, 공간의 숲에서 헤매는 인간에게 이정표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가 공간에 국한되지 않으며, 진리가 온전한 승리를 거두는 세상이 오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달려갈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인간의 부도덕과 음란한 행위, 적자생존적 경쟁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종말을 향한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때로 그것은 반전운동의 옷을 입기도 하며, 때로 그것은 혁명의 외투를 걸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그 가운데에서 영원한 질서를 항해 지금도 달려가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 안식일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쉬지 않고 달리시는 영혼의 상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부록: 아브라함 헤셀 《안식》 초
아브라함 헤셀 저, 김순현 번역, 《안식》,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 2007년 1월 초판
기술 문명 속에서 우리는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 시간을 들인다. 우리는 공간의 세계에서 우리의 힘을 증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실존의 핵심이다.
-41쪽
원시적인 지성은 상상력의 도움이 없으면 관념을 깨닫기가 어렵다. 상상력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은 공간의 영역이다. …… 왜냐하면 공간의 사물은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더럽혀질 수없을 만큼 신성하다고 해도 공간의 사물은 훼손되지 않을 만큼 신성한 것이 아니다. 신성한 것을 존속시키고 신의 현존을 영속화하기 위해 신상이 제작된다 하지만 만들어진 신, 감금된 신은 인간의 그림자일 뿐이다.
-44쪽
성서는 공간보다 시간에 더 관심을 갖는다. 성서는 세계를 시간의 차원에서 본다. 성서는 나라들과 사물들보다는 세대들과 사건들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지리보다는 역사에 더 관심을 보인다.
-47쪽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심장한 형식의 예술, 곧 시간의 건축술이야말로 유대교 전례의 특징이다.
-50쪽
하나님을 닮은 것은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공간은 하나님과 공통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산꼭대기에는 자유가 충분치 못하고, 고요한 바다 속에는 영광이 충분치 못하다. 하나님을 닮은 것은 시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간은 변장한 영원이다.
-62쪽
카도쉬라는 고귀한 단어는 창세기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창조 이야기가 끝나는 대목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에서 보듯이, 이 단어가 시간에 적용되었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창조 기록 속에는 공간 속의 어떤 대상이 거룩함의 특성을 부여받았다고 언급하는 대목은 없다.
-51쪽
외부의 사물들, 눈에 보이는 재산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적절한 마음가짐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사물들과 재산을 소유하되 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 말하자면 안식일만이라도 기술 문명으로부터 독립하여 사는 것이다. 안식일에 우리는 공간의 사물을 개조하려고 하는 모든 행위는 삼간다. 자연을 정복하는 인간의 왕 같은 특권은 일곱째 날에 중단된다.
-82쪽
광포한 시간의 대양, 격렬한 수고의 대양 한가운데 고요의 섬이 떠 있다. 우리는 그 섬의 항구로 들어가서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한다. 그 섬은 일곱째 날이자 안식일이며, 사물과 도구와 실용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영을 사모하는 날이다.
-83쪽
랍비 시므온의 신조는 “오직 하늘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의 신조를 반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도 있어야 하고, 그 밖의 만물도 있어야 한다.” 그의 호전적인 분노는 “너희가 나의 세계를 파멸하려고 온 것이냐?”고 하는 음성에 꺾이고 말았다. 랍비 시므온은 현세를 폄훼했고, 하늘 음성은 현세를 지지했다.
-109쪽
유대교 신앙에 의하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이분하는 것은 정신과 물질이 아니라 성과 속이다. 우리는 속된 것을 너무 오래 가까이했으며, 영혼을 기계 장치로 여기는 습관에 젖어 있다. 안식일 규례는 육체와 정신의 방향을 성의 차원으로 돌리고자 애쓴다. …… 안식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영이다.
-149쪽
시간 속의 거룩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은 안식일을 기념하는 방법 속에서 드러난다. 일곱째 날을 준수하는 데에는 제물이 필요치 않다. …… 안식일에는 상징들이 불필요하다. 안식일 자체가 상징인 까닭이다.
-159쪽
창조는 옛적에 단 한 번 일어난 행위가 아니다.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행위는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은 세계를 존재하게 하셨다. 그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개개의 순간은 또 하나의 창조 행위다. 한 순간은 종점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섬광이자 그 신호다. …… 시간은 하나님이 공간의 세계에 주시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