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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연춘추 Sep 04. 2021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를 읽고

가우타마, 아리아인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왕중왕 캄비세스2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마기 또한 가우타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방경일 선생은 페르시아의 반군 수장 가우타마와 불교의 창시자 가우타마를 동일인물로 이해했으나, 가우타마 자체가 흔한 이름이라 딱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페르시아의 마기 가우타마를 불교 창시자라 생각할 경우, 우리는 〈베히스툰 비문〉에 나오는 기록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오래된 비문 아래 남겨진 기록을 살펴보면 다리우스1세는 자신이 반군 수장 가우타마를 죽였다고 기록해 두었다. 또한 당시 교통로 문제 또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페르시아에서 인도 편자브 지역까지 정비된 포장 도로가 깔린 것은 다리우스1세가 인도를 정복한 이후의 일이다. 이전까지 페르시아의 세력은 박트리아 지역을 넘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가우타마라는 이름에 얽매일 필요 없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싯다르타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다. 그가 사캬모니의 본명이 가우타마 싯다르타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는 싯다르타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불교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설파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헤르만 헤세는 왜 그를 브라만 계급에 속한다고 설정했을까? 이는 싯다르타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배울 수 있는 브라만 계급이어야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교의적 가르침으로는 진리를 전할 수 없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소설에서 싯다르타는 “사캬모니” 가우타마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가우타마의 학설-“세상 만물은 인과로 이어져 있다”을 높이 평가할지라도 만약에 완전한 세계의 연결고리 가운데 생소한 존재가 나타날 경우 이 완전함이 무너지는데, 그럼 이 세상은 완전해질 수 없는 것이 아닌지 물어보았다. 이와 같은 물음과 함께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 고빈다를 뒤로 하고 강을 건너 어떤 도시로 들어섰다.


그 도시에서 그는 부유한 창녀인 카말라-그녀의 이름부터 사랑을 뜻하는 “카마”에서 파생되었다-를 만났다. 싯다르타는 카말라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녀를 스승으로 삼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싯다르타에게 “사람이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면 즐거움을 얻을 수도 없다”는 가르침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 탁발승에게 흥미를 느꼈던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부유한 상인 카와스와미를 소개해주며 그를 도우면 재물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다행히 싯다르타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브라만 계급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풍기는 아우라에 힘입어 카와스와미의 신임을 빠르게 얻었으며, 나름 재산을 가진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매번 카말라에게 비싼 선물을 주어 그녀와 성관계를 가졌으며, 재물이 많아지자 마침내 도박에 손을 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헤르만 헤세는 남성의 본능적인 욕구 중 하나가 바로 여성의 환심을 사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성욕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본능적이면서 가장 갈구하는 욕구이기에 여성의 아름다운 자태와 부드러운 입술, 그리고 그녀가 구사하는 다양한 체위는 싯다르타를 세속의 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마치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엔키두를 유혹한 여자와 같이 여성이 성인聖人을 유혹하는 예는 여러 문화권에서 등장하기에 헤르만 헤세 또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느 날 중년에 접어든 카말라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싯다르타는 카말라의 입에서 “나도 나이가 들면 불교에 귀의하고 싶다”는 말을 듣자 그간 자신이 성욕과 재산에 얽매여 진리로부터 멀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그날 밤 잠이 든 싯다르타는 꿈에서 카말라가 키우던 새가 죽자 그 새의 사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길바닥에 버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런 성욕과 물욕에 빠진 스스로를 너무도 부끄러워한 나머지 강물에 빠져 자살하고자 했으나 자신의 오랜 친구의 고빈다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고빈다는 싯다르타가 입은 화려한 옷 차림과 향내를 맡고 그와 같은 구도자를 본 적이 없다며 싯다르타를 떠난다. 싯다르타는 이제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며 진리를 찾기 위해 산속을 헤매다가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나 그와 함께 생활하며 자연의 소리를 듣는 연습을 하게 된다.


가우타마가 열반에 들 날이 가까워지자 카말라는 자신과 싯다르타 사이의 아들과 함께 가우타마의 임종을 지켜보려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카말라는 숲속에서 독사에게 물렸으며, 아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싯다르타는 자신의 애인 카말라를 발견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독은 이미 그녀의 온몸에 퍼졌으며, 가우타마의 임종을 지켜보려 했던 그녀는 자신의 애인이었던 싯다르타의 품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실의에 빠진 싯다르타는 지푸라기라고 잡는 심정으로 카말라와 자신의 아들인 작은 싯다르타와 함께 살고자 했으나, 이미 풍요로운 삶에 익숙한 작은 싯다르타는 자신의 아버지를 저주하며 숲속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사는 카말라의 정원 문 앞까지 도착했으나 여기서 그는 자신도 자기 아버지를 떠나 수행 길로 들어섰음을 기억하게 된다. 인과응보라 생각한 까닭일까? 결국 그는 자신의 아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숲속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바주데바에게 자신이 아들을 찾으러 갔다가 돌아온 사실을 이야기하자 바주데바는 싯다르타와 싯다르타의 아들은 다른 세상에 속해 있으며,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자신들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바주데바는 강물의 비웃음 소리를 들었다는 싯다르타에게 강물 소리를 다시 들을 것을 청했고, 베주데바와 함께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 과정에서 다양한 소리가 하나로 연합하여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었음을 알게 된 바주데바는 자신의 오두막에 싯다르타를 남겨놓고 묵묵히 숲속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장에서 싯다르타는 다시금 자신의 오랜 친구 고빈다와 만나 그를 자신의 오두막에 초청한다. 그는 깨달음을 설법해달라는 고빈다의 요청에 사람들이 번뇌한 까닭은 모두들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표만을 향해 달라가다 보니, 눈앞의 풍경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비록 이 세상에는 인간의 가치 판단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지만 사실상 악인에게도 불성이 존재하기에, 인간은 시간이 흐를 수록 불성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조차도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설명한다. 결국 모든 사물에게는 불성이 존재하며, 이 불성을 가진 세상만물이 “나”와 동등한 자격,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기에 “나”는 사물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고빈다는 가우타마가 사물을 사랑하지 말라 했다며 반론을 제기하지만, 싯다르타는 싯다르타가 말한 사랑과 자신이 뜻하는 사랑은 다르다고 설파했다. 전자가 자신이 설정한 인생의 목표라면, 후자는 나와 사물이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모든 만물이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구성함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자신의 이마에 키스할 것을 요구했으며, 고빈다가 싯다르타의 이마에 키스하는 순간, 싯다르타가 부처와 같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은 이 책에 나온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불교 교리로 이해하기 보다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때 유행했던 자연신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의식은 잉그리드 버그만의 영화 작품 〈제7의 봉인〉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불교보다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지식인 사회의 신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는 편이 정확할 듯하다. 이 글에서 저자는 플라톤주의에 입각한 그리스도교 사상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선이란 바로 완전함을 뜻한다. 신은 완전하며 그의 완전한 속성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글에서 불완전함조차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며, 그 불완전함과 완전함이 결합을 이루면서 완전한 세상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결국 세상은 신의 속성(아트만)을 가진 사물이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의 완전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완전한 모습을 찾으려는 그리스도교의 노력은 진리에 근접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목표에 스스로를 얽매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저자는 경고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신과 인관의 관계도 헐어버렸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성이 만물에 존재하는 까닭은 만물이 바로 신으로부터 잉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 신은 만물을 잉태하는 필연적 기반(Npostasis)이며, 그는 완전하며 불변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오히려 그리스도교 교부 테오필로스가 비판한 플라톤의 주장-“만물에는 신의 속성이 들어가 있으며, 만물은 신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을 다시금 제기한다. 심지어 그는 싯다르타와 고빈다와의 마지막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시간 개념을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인간의 몸속에 하느님의 영이 내재해 있다고 믿지만,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완전함을 추구하며, 시간의 끝에 이르러 (아시리아의 타티아누스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과 함께 신과 완전히 연합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 불완전함조차도 이 세상의 완전함을 구성하는 요소라 역설하며, 시간이 지나갈수록 완전함에 이른다는 그리스도교의 테제를 정면에서 부정했다.


이와 같은 플라톤주의에서 비롯한 자연신론은 서구 역사에서 두 차례 유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틸리히 〈그리스도교 사상사〉 참조), 한 차례는 계몽주의 운동이요, 다른 한 차례는 2차 세계 대전 전후 시대다. 물론 이는 불교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서구 사상가들이 불교를 접하는 과정에서 자연신론과 불교의 유사성을 인지하고, 불교를 자연신론 사상으로 곡해한 결과물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그러나 이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이 만든 “도덕적인 인간상”을 목표로 달려오던 서구 세계가 도덕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비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잔혹하다는 사실에 직면한 지식인들이 직면한 문제-“인간의 타락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들어있는 대답이 아닐까? 결국 그 불완전함조차 이 세상을 완벽하게 구성하는 하나의 파편에 불과하며, 인간은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보니 나 자신과 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이 사실상 그 완전함을 구성하는 조각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음을 말이다.


오늘도 인간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완전한 자아를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피안에 있다 믿지만 정작 그 완전함은 바로 완전함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연합 가운데 이루어짐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웃음과 울음, 분노와 기쁨, 슬픔과 즐거움은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세계를 영원히 만들어 가지 않을까? 이 불완전하면서도 거룩한 세계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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