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는 성적 욕망을 닮아있다.

한국 교육의 아이러니와 어쩌면 해결책?

한국에서 입시는 단지 교육 제도의 한 갈래가 아니다. 그것은 곧 사회적 욕망의 총합이며, 계급 이동의 유일한 통로로 신화화된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회가 계급 고착이 아닌 계급 이동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작동한다.

입시를 둘러싼 열망은 흔히 ‘자녀의 미래’나 ‘행복’을 위한 것처럼 포장된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이 오히려 부모 세대 자신의 사회적 지위 유지, 혹은 상승 욕망과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자녀는 일종의 성적 대리자가 되고, 입시는 사회적 자존감 투사의 무대가 된다.

이 욕망은 매우 원초적이다. 마치 성적 욕망이 본능의 연장선에 있듯, 입시에 대한 집착도 이성으로 조절되지 않는 심층적 충동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이 비합리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학원에 아이를 보내고, 모든 가족 자원을 몰아준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성에 속는 본능, 그것이 바로 입시의 실체다.

한국에서 입시가 유독 ‘광기’처럼 전개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사회 계급이 오랜 역사 속에서 이미 고착되어 있어, 대학이 계급 이동의 수단으로 절대화되지 않는다. 반면 한국은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며 사회 구조가 평탄화되었고, 그 빈자리에 교육이 계급 사다리의 거의 유일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 구조는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도 관찰된다. 슬럼가의 아이가 수학과 과학에 재능을 보이면, 그것은 순식간에 전 지구적 계급 격차를 역전시키는 통로가 된다. 얼마나 ‘싼 티켓’인가!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경쟁은 더 치열하고, 더 잔혹하다.

입시는 그렇게 한국 교육의 블랙홀이 되었다. 아무리 다양한 교육 정책이 시도되더라도, 이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교육의 본래 목적은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계급 이동의 사다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불의다. 대신 우리는 경쟁의 시점을 유예해야 한다. 다시 말해, 대학 입시는 존재하되, 그것이 아이들의 유년기를 침식하지 않도록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제안: 입학은 넓게, 졸업은 어렵게

대학 입학은 연령 제한 없이 넓게 열어두자. 입시는 중고등학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학문적 의지가 생긴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물론 고등교육의 예산은 대폭 증가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미 우리의 고등교육 예산은 처참한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연구 중심의 공간에서 '시민적 고등교육의 공간'으로 하방할 필요가 있다. 교수도 굳이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 만을 뽑을 필요가 없다. 코세라와 같이 온라인 수업도 적극 활용하자.

실질적 '지식의 용광로' 역할은 대학원에 맡기자. 그리고 정말 빠방하게 지원해주되, 간섭하지 말자. 특히 공무원은 나가 있길.

적어도 국공립 대학의 네이밍은 평탄화하자. 한국1대학, 2대학 이런 식으로. 제발 대학이 명품 브랜드처럼 소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입학 선발의 자율권은 대학에 맡기되, 졸업 기준은 엄격하게 하자. 학문적 성실성과 탐구 능력을 갖춘 자만이 졸업할 수 있도록 설계함으로써, 실제적인 학문적 노력이 사회적 이동과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공교육은 입시 준비 기관이 아니라, 시민적 자질을 기르는 공간으로 복원되어야 한다. 유년기는 탐구와 놀이, 성찰과 공동체 감각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이어야 한다.


이런 전환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란 말이 공허한 구호가 아닌, 사회 구조의 실제 원리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원초적 욕망은 억누를 수 없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다만 욕망은 적절한 때와 장소에 발현되어야 광기가 아닌 삶과 사회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장 지배의 자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