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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

Achille Mbembe- Necropolitics

by 원진

미키 17을 보고 나서 자연스럽게 내가 지금 공부했던 이야기랑 계속 연관해서 생각이 났다.


Mbembe의 Necropolitics를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Necropolitics란 "누가 살고 누가 죽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권력"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국가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집단은 살게 두고,

어떤 집단은 죽음에 방치하거나 폭력으로 지배하는 방식이다.


이개념은 Foucault의 biopower (생명권력)에서 파생되어 확장된 이론이다.

Foucault가 "Make live and let die"라면, Mbembe는 "Let live and make die"라고 말한다.

현대적 의미의 necropolitics는 물리적인 죽음 그 자체 보다,

'존엄성의 박탈', '주체성의 상실'이라는 방식으로 우리 일상에 강하게 뿌리 박혀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게 둘 것인가

누구는 인간으로 대우받으며 보호되고,

누구는 발전이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 대체 가능한 존재로 무기력하게 소비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정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걸 모른 채 살아간다.


Mbembe는 이런 구조가 특히

racialised, colonised, marginalised 된 사람들에게 이런 necropolitics는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Nazi 수용소처럼 권력이 죽음을 관리할 수있는 공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폭력적 지배가 가능한 세계

그 안에서 버려진 존재는 보호받아야 마땅함에도 '죽음'마저 빼앗긴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미키 17이 이 책과 강하게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불쾌하고 역하고, 다큐인지 위트인지 모를 그세계.

복잡적인 감정이 들면서 책상 위에 앉게 만들었다.

미키 17 속 세계는 '죽음'을 통해 인간을 통제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그건 낯설지 않았다.

우리사회 역시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죽이지 않지만,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대체 가능한 노동력으로 취급받는 인간들.

누군가를 위해, 사회를 위해, 발전을 위해.

권력은 효율과 생산성을 말하고,

인간성은 점점 사라진다.


다시 재생산될 수 있잖아

하는 생각들이 어찌 보면 우리 사회 속에 있는

모든 대체할 수 있는 노동력을 가진 모두를 지칭한다고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시스템 속에서 미키가 무기력했지만 점점 자기에게서 나온 미키 18과

주변인들을 통해 '죽음조차도 상품화된 세계'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그래서 어쩌면 개인적으로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미키 자체가 어찌 보면 우리를 말하는 것과도 같아서



파리보다 못한 목숨으로 죽음마저 상품화되고, 인간성마저 대체 가능한 자원으로 보는 사회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끝까지 지키려는 일은 그 자체로 치열하고 소중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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