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소명인가? 생존인가? Max Weber와 자본주의
사실 별생각 없던 나에게 SA250 수업은 새로운 시각이었다
그래서 더 이런 것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커서
글을 다시 작성하게 되었다.
Max Weber의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윤리적인 신념처럼 기능하는지를 보여준다.
책 속에서 반복되는 문장들
— “The credit is money. Money is of a prolific, generating nature. Money can beget money, and its offspring can beget more. Five shillings turned is six, turned again it is seven and threepence…”
— Benjamin Franklin, Advice to a Young Tradesman —
단순히 경제학적 팩트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미덕처럼 서술된다.
신용 있는 사람
정직하게 약속을 지키는 사람
근면하고 절약하는 사람.
이런 인물상이 마치 이상적인 인간상처럼 제시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서점에서 가장 싫어하는 책들이 딱 그런 책들이다.
‘부자가 되는 법’, ‘부동산으로 성공하는 방법’.
물론 돈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람에겐 최적의 책이겠지만, 우리가 흔히 부자의 성공 요인으로 꼽는 ‘근면’과 ‘성실’이 과연 전부일까?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서 가난한 걸까?
지난 학기 범죄학 수업 시간, 갑자기 한 유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홈리스는 게으르기 때문에 홈리스가 된 것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순간 교수님은 말을 멈췄고, 모두의 토론장으로 바꾸셨다. 이내 강의실은 뜨거운 토론장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의 손이 줄줄이 올라갔고, 그의 의견은 곧 와장창 무너졌다.
한 명의 홈리스가 처음부터 홈리스였던 적은 없다.
밴쿠버의 헤이스팅스 거리. 그곳은 마약과 가난, 병든 사회의 끝자락이 응축된 공간이다.
한 유튜브 영상에서, 위험한 그 거리에서 유튜버를 직접 안내해 준 홈리스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예전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기 시작했고, 재활 중 또 다른 사고를 당해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몸을 써야 했던 직업을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수입은 끊기고 병원비와 렌트는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결국 가족과도 멀어지고, 약물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를 ‘게을러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병원 치료를 받고 회복해 복귀할 수 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노동은 몸이 자산인 직업이었고, 그 공백 동안 그는 소득을 전혀 벌지 못했으며, 사회적 안전망은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
Max Weber는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의 저런 사상들이 자본주의적 태도를 정당화하는 윤리로 자리 잡았다고 본다.
그는 자본의 축적이 단순한 경제 행위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 혹은 종교적 실천처럼 여겨지는 현상에 주목했다.
“The peculiarity of this philosophy of avarice appears to be the ideal of the honest man of recognised credit… the idea of a duty of the individual toward the increase of his capital, which is assumed as an end in itself.”
— Max Weber
자본을 증식시키는 것이 곧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사회.
노동은 이제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고, 청교도들이 신의 소명(calling)으로 여겼던 일은 이제 우리에게는 철창(Iron Cage)이 되었다.
“The Puritan wanted to work in a calling; we are forced to do so.”
— Max Weber
‘자발적 노동’에서 ‘강제된 생존 노동’으로의 전환.
이는 단지 경제적 논리가 아니라, 특정한 종교적 가치와 문화적 구조가 맞물려 형성된 것이라고 Weber는 본다.
그리고 그는 마르크스의 경제 결정론(economic determinism)과 본인의 영적 결정론(spiritual determinism) 모두 일면 타당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어느 쪽도 “역사적 진실”을 설명하는 최종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현상은 언제나 다층적이고, 다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질서.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 ‘근면함’이라는 이름 아래 철창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철창은 어쩌면, 금욕적 이상에서 출발했기에 더 아이러니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삶의 가치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의 무게도 다르다는 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점이라고 말한 것은
너무 치우친 무게를 옮기긴 위한 채찍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의 의견이 맞고 틀리냐는 옳은 질문은 아니다.
과거의 책이 가치 있는 것은
여전히 우리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Max Weber나 Karl Marx 같은 이론가들의 이름 앞에서 경직된 반응을 보일 때가 많다.
그들이 역사 속에서 어떤 정치적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떠나, 그 이론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설명하고, 또 어떤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게 만드는지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누군가 고통 속에 있는 것을 외면할 수 없는
내 안타까움과 희망을 전달하고 싶은 복잡한 감정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모든 인간사회에 대한 존경을 담아서
Won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