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Reflection on 달과 6펜스

그럴 수도 있지~

by 원진

The Moon and Six Pence


달과 6펜스 책을 읽고 나서

달과 6펜스는 폴 고갱의 삶을 모티브를

얻은 작가의 관찰자 시점으로 페르소나인 “스트릭랜드”의 삶을 담고 있다.

어쩌면 작가가 사람들을 분석하고 관찰하는 스타일의 글이라서 그런가

더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더 몰입하고 집중했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열정으로 가정을 버리고 떠난

이상한 아저씨인 스트릭랜드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참 이해하기도 어렵기도 하고

어찌 보면 꽤나 멋있는 말들을 하기도 하면서

작가와 그의 대화 속에서 꽤나 이상하면서도 진리에 가까운 말들을 찾아냈다.

Chapter 1


왜 제목이 달과 6펜스인가?

<달> <6펜스>는 정반대의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달은 우리를 설레게 만들고 신비로움을 주면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려

알 수 없는 충동에 빠지게 한다.

반면 6펜스는 가장 낮은 단위로 유통되었던 은화의 값이다.

돈과 물질의 세계를 의미하며 세속적 가치를 말하면서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고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세속적인 현실을 마주하면서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에게 애써 무시해 온

자유를 향한 생각들과 여정을 스트릭랜드를 통해 투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것들을 6펜스의 세계관에서 완벽하게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그것들을 전혀 보지 못하고 지내기도 한다.

그런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 삶에서 먼가 빠진 것과 같은 기분이 들 때

나는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한다.

이 책은 냉철하기도 하고 어쩔 땐 보면 몽상적인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인생이 이분법처럼 딱 하나가 맞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도 저럴 때도 있고

하는 게 아닌지

모든 인생의 목표가 정확한 것도 좋지만

먼가 결론을 알 수 없는 책을 읽는 사람처럼

마음 깊은 곳의 열망하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은 어떨지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 책의 시작은 작가가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만났을때의 이야기한다.


“솔직히 말해서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위대성은 그 사람의 지위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지 사람 자체가 가지는 특질이라고 할 수 없다.

상황이 변하면

위대성에 대한 평가도 사뭇 달라지게 마련이다.

수상도 그 직을 떠나면 고작 잘난척하는 말재주꾼이었던 게 아닌가 여겨질 때가 많고,

장군도 부하를 잃으면 저잣거리의 보잘것없는 얘기 주인공으로 멀어지고 만다.

거기에 비하면 찰스 스트릭랜드의 위대성은 진짜였다.

그의 예술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튼 그의 예술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책에서 첫 장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글을 보는 순간 먼가 끔찍하게도 비슷한 사람을 만난 것과 같은 냉소적인 태도로 상대를 바라보지만

또 그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그 마음을 느꼈다.

처음으로 모든 책에 파란색으로 긋고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공감했다.


또한 “예술가는 숭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장식물로써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심미감이란 성 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 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 만다.”


정말 모든 부분을 옮겨 적고 싶지만

그렇다면 아무도 이 글을 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용건만 간단히 하겠다...


예술을 바라볼 때의 내 마음은

항상 숭고한 느낌도 있지만

알수 없는 그런 내 안에 있는 그런 미지의 세계를 건드리는 부분도 있다.

예술이라는 게 어찌 보면

가장 교양에 가까운 느낌도 있지만

어쩔 때 보면 나의 내면을 대면하는

위험한 일기장 느낌도 있다.

그래서 그 그림을 마치 작가의 마음을 알아보듯

찾아가는 느낌에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Chapter 2


“작가는 자신의 작가적 본능이 인간성의 기이한 특성들에 너무 몰두하는 나머지

때로 도덕의식까지 마비됨을 깨닫고

당혹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약간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끼기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작가는 논리를 갖춘 철저한 악한을 창조해 놓고 그 악한에게 매혹당한다….


작가는 악당을 만들어내면서

자기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본능-

문명 세계의 법도화 관습이 잠재의식이라는

저 신비로운 구석으로 몰아 놓은 —을 만족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창조해 낸 인물에 살과 뼈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다른 식으로는 방출될 수 없는 자신의 본능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만족이란 하나의 해방감인 것이다.

작가는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데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이다.

내 마음속에는 스트릭랜드를 극도로 혐오하는 마음이 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의 동기를 알고 싶어 하는

냉정한 호기심도 있었다.”


작가는 때로는

악을 지켜보기도 하고

그 악에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내면에 자리 잡은 욕망을 드러내기도하고

해소시키기 위해

통찰하는

즉, 관찰과 분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는 이유는 중에 하나는

분명히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공감할만한 이야기이자

영원히 갈등하고 고민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악을 창조해 내며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드러낼 때,


나는 법이라는 장치를 떠올렸다.


인간 사회는 근본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질서를 어길 때 위법한 행위로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렸다고 처벌한다.


그러나 과연 그 법이 언제나 공정한가?


스트릭랜드는 세상의 질서를 거부했다.

그는 가정이라는 체계, 도덕이라는 규범, 예술의 기성 기준마저 어겼다.


그런 그의 삶을 우리는 위법적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유를 열망한 상대를 보면서

우리는 질서를 어긴 인물로 함부로 판단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법의 질서는

과연 정말 정의로운가?


법은 때때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배제하고

관습은 다수의 생각들을 보호하기 위한 명목 아래에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사회의 질서는 깨는 이상한 사람로 규정한다.

법은 질서를 위한 도구지만

만약 우리가 지키고 있는 질서가 본래부터 결함을 안고있다면

그 질서를 벗어난 사람을 무조건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질서는 악에 대한 두려움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단순하게 타인을 향한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 스스로 빠질 수 있는 공포를 반영하고 있다.

악은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과감히 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마치 문제를 풀지 못했을 때

답안지를 찾아보는 것처럼

단순한 답을 찾음으로써 그것들을 쉽게 풀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와 파괴성의 경계에서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은 맞고

과도한 파괴성은 사회에서 처벌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래서 작가는 악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이 과정들이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본능을 들여다보기 위한 수단 일 수도 있다.

우리는 문명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는 여전히 원초적 충동이 잠재돼 있다.


나 또한 스트릭랜드를 처음에는 참 이상한 성격을 가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기적이고 냉정했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끔 사람들을

엄청난 도덕성 잣대로

그것을 지키지 않는 세계의 질서를 흩트리는 상대를 혐오하고 비난한다.


그렇지만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두 개 다 공존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작가가 이런 악을 창조하는 모습에서

도덕의식이 마비된 것을 깨닫기도 하고

그 행위의 동기도 알고 싶어 한다는 모습


두 가지 다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에서

공감하며 작가의 의도가 이해가 되었다.


물론 그것들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경험하지 못하고 단한번도 보지 못하는 것을 알아야 할의무는 없다.


그렇지만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지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공존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진짜로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있을까?


Chapter 3


그의 그림이 “어떤 중대한 의미를 가진 비밀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고 은근히 암시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비밀은 잡힐 듯 잡힐듯하면서도

이상하게 끝내 잡히지 않았다”.

“스트릭랜드 물질적인 것에서 어렴풋이 어떤 정신적인 의미를 발견했던 모양이나

그것이 너무 이상스러워 불완전한 상징으로 암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주의 혼돈에서 어떤 새 양식을 발견하고

온 영혼으로 괴로워 하면서 그것을 서투르게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지.

나는 표현의 출구를 찾아 애타게 고뇌하는 정신을 보았던 것이다.”



“작가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산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치 이국 땅에 사는 사람들처럼 그 나라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온갖 아름답고 심오한 생각을 말하고싶어도

기초 회화책의 진부한 문장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들과도 같다.

머릿속에는 전하고 싶은 생각들이 들끓고 있음에도

기껏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정원사 아주머니 우산은 집안에 있습니다> 따위인 것이다.

결국 내가 받은 인상이란 정신의 어떤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는 거대한 안간힘이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를 그처럼 당황하게 만든 원인도 바로 그러한 면에 있는 것 같았다.

스트릭랜드에게는 색채와 형태들이 어떤 특유한 의미를 지님이 분명했다.

그는 자기가 느낀 어떤 것을 전달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고,

오직 그것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찾는 미지의 그것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단순화시키고 뒤틀었다”.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전을 찾아 나선 영원한 순례자 같아 보여요.

당신이 어떤 불가사의한 열반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진리와 자유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죠”.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에 대한 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