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발레 앤 오페라 하우스
발레! 유럽에서 발레 공연은 꼭 하나 보고 싶었다.
취미 발레를 하면서 발레 공연이 더 재밌어졌다.
바뜨망, 탄듀, 아라베스크, 점프, 턴 등
1시간 남짓의 취미 발레에도 땀에 흠뻑 젖어 나오는 경험을 해보니, 무대 위 발레리나들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극한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기대를 잔뜩 품고 발레 공연들을 검색했다.
파리 오페라하우스에서 마티스가 그린 천장화 아래에서 보는 발레 공연은 얼마나 근사할까.
그런데, 파리의 여름휴가 기간에는 발레 단원들도 모두 휴가를 떠나서 공연장도 문을 닫는다. 하하하
레스토랑들이 휴가 기간에 문을 닫는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고, 그래서 파리는 8월 말, 9월 초로 일정을 미뤘지만, 오페라하우스의 공연 일정은 9월 중순부터 시작되었다.
그나마 바캉스 시간의 영향이 덜한 런던을 기대했으나 런던 발레 앤 오페라하우스는 올해 내부 수리 중이라고 한다.
너무 아쉬움 마음에, 혹시나 반짝 공연이 생기려나 하는 기대감에, 두 홈페이지를 계속 들락날락 거렸다. 그러다가 런던 발레 앤 오페라에서 발견한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
어린이를 위한 앨리스 인 원더랜드 투어
Children's Alice in Wonderland Adventure Tour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를 주제로 인솔자를 따라서 공연장 곳곳을 탐험하고 무대를 오르는 배우들의 동선, 의상실, 연습실 등 출입제한공간을 볼 수 있는 탐험을 떠난다. 이런 프로그램이라면 발레 공연을 못 보는 아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겠다. 아쉬운 마음이 또 남아 있어야 다음 여행을 또 계획할 수 있으니까.
코벤트 가든에 위치한 발레 앤 오페라 하우스에 들어가서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앨리스 동화에 나오는 토끼처럼 연미복 차림의 인솔자가 나타났다. 아이들을 이끌고 공연장 문을 열고 들어가 동그랗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트 여왕의
“Off with their heads!”(“저들의 목을 베라!”)
대사와 동작을 따라 했다.
체셔 고양이의 이상한 웃음을 지어보았다.
애벌레 캐터필러의 꼬물거림을 연습했다.
모자장수 매드 해터 모자장수 (Mad Hatter)의 티타임 동작을 미리 익혔다.
이제, 인솔자가 매드 해터! 하면 티를 마시고, 캐터필러! 하면 꼬물거리고, 체셔 캣! 하면 씩 입꼬리를
높여 웃으면 된다고 했다.
인솔자가 연극을 한 배우인지 표정과 발성, 연기가 아주 뛰어나서 어린이들을 금세 사로잡았다.
자 그럼, 출발!
엘리자베스 여왕이 출입했다는 특별 동선으로 입장했다. 와우! 샹들리에가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작은 홀 같은 공간이 나오면 간단한 놀이도 진행하는데, 우리나라 전통놀이와 다를 바 없었다.
수건 돌리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보물찾기 등
수건 돌리기 방식으로 진행되는 놀이에서는 담율이 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뛰어서 모두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매드해터의 모자를 써보고 매드 mad 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도 찍었다. 무대 위 올라가는 배우들이 직접 착용하는 거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묵직했다. 이걸 쓰고 공연을 한다고?? 배우들은 생각보다 더 극한직업이었다.
발레리나들의 연습실 앞에서는 발레 슈즈가 있어서 잠깐 신어볼 수도 있었다. 인솔자는 발레리나들의 어마어마한 연습시간, 발레 슈즈 길들이기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해 주었다. 발레를 배우고 있는 꼬맹이들이 많아서 자기 발레 슈즈를 직접 가져와 신어보는 아이도 있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놀이에 참여하고 즐기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조마조마함 한 꼬집, 대견함과 신기함 가득이었다.
노랑머리 인솔자에게 바짝 붙어서 따라가는 아이를 보니, 아이의 타고난 성향이라는 게 신기하면서도 좀 어렵게 느껴졌다. 담율이는 어릴 때부터 참관 수업에 가보면 그렇게 손들고 앞에 나서고 주목받는 것을 좋아했다. 단체로 설명을 들어야 하는 일이 있으면 항상 제일 앞에 나서서 따라다녔다. 여기서는 말도 통하지 않는데 조금은 주눅이라는 게 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말귀를 못 알아들어도 어김없이 인솔자의 코앞에서 머무르고 앞장서서 따라나섰다. 혹시라도 뒤쳐질까 다다다 뛰어서 앞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런 행동들은 무리에서 눈에 많이 띈다. 잘하는 것도, 고쳐야 할 것도. 늘 저렇게 앞자리에서 눈에 띄고 싶어 하면 마음이 힘든 일이 많지 않을까?
"담율아, 좀 뒷자리에 서도 괜찮아. 잘 들리고 잘 보여. 앞자리에서 듣고 싶어 하는 친구가 또 있을 수 있으니까 엄마랑 여기 뒤에서 보자." 시무룩해져서는 "엄마, 제일 앞자리가 아니어도 괜찮은데 그렇다고 제일 뒤에 서는 건 또 싫어." 그러더니 슬근슬근 앞으로 나간다.
적극적이지만 이기적이기도 해. 박수도 많이 받지만 비난도 많이 받아. 뿌듯하지만 속상하기도 해. 이런 양가의 감정 속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려면 너도 나도 참 힘들겠다 싶었다. 나와 다른 성향의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런 부분이 참 어렵다. 나는 육아가 그 어떤 것보다 제일 어렵다. 어떻게 말해 줘야 할까. 어떤 게 맞는 조언일까. 답이 없는 아주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는 기분에 한없이 작아진다. 즐거운 투어 와중에도 머리는 복잡해졌다.
투어는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코벤트 가든과 연결된 골목길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공중 브리지에서 막을 내렸다. 건물을 구석구석 훑고 나니, 도시의 한 겹 더 안쪽까지 경험한 기분이 들었다. 투어를 마치고 난 뒤, 건물 내 레스토랑에 가면 어린이들에게 색칠놀이 세트와 함께 도시락박스도 하나씩 제공된다. 그리고 연극배우들이 쓰는 소품들이 종류별로 있어서 직접 써볼 수 있다. 왕관, 헤어피스 등을 자유롭게 쓰고 포즈도 취해보았다.
도시락 가방을 열어보니 치즈가 한 장 든 식빵 샌드위치, 귤 하나, 물 한병, 감자칩 한 봉지가 들어있다.
“담율아, 우리 오는 길에 한국 음식 파는 식당 엄청 인기 많은 것 봤지. 이거 봐 봐. 우리나라 음식이 얼마나 영양소가 균형 잡히고 건강 음식인지.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이 얼마나 영양이 풍부한 줄 알겠지. 엄마 지금 여기 어린이들이 약간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야." 다행히 이렇게 1절까지만 하고, 그러니까 남기지 말고 잘 먹어! 까지는 가지 않았다. 모든 일에 의미와 교훈을 찾으면 재미없어지니까.
"플랫 아이언 가서 스테이크나 먹자" 런던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 최애 레스토랑이었던 플랫 아이언에서 스테이크 한 접시씩 먹고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 프로그램을 예약하면서 영어가 경험의 장애물이 되면 어쩌지, 따라다니면서 설명해줘야 하나? 걱정되었지만,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는 경험이었다. 표정, 제스처 등 비언어적인 표현의 강력함과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그리고 성향이라는 것이 국내, 해외를 가리지 않고 발현되는 것이구나.라는 것도 알았고.
어린이도, 나도, 함께 자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