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처럼 모든 감각을 충족시키는 단어가 또 있을까.
바스락 빵껍질이 부서지는 소리, 쫄깃하고 부드러운 속살, 구수한 냄새, 윤기가 흐르는 브라운 컬러, 따뜻한 온기.
'빵'에서 파생되는 단어들은 또 어떻고. 입으로 내뱉는 순간 기분 좋은 감각들이 살아난다.
바게트, 크로와상, 깜빠뉴, 뺑오 쇼콜라, 스코온, 패스츄리, 밀푀유, 타르트, 마카롱..
파리, 빵의 도시로 간다.
베이커리 맛집을 따로 찾지 않았던 것은 어딜가나 맛있을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블랑제리: 빵(특히 바게트)를 매장에서 직접 반죽, 발효, 굽는 곳. 법적으로 빵을 직접 만들지 않으면 블랑제리라는 이름을 쓰지 못한다.
파티세리:디저트 전문점. 타르트, 마카롱 등 디저트가 주력이다.
#블랑제리 1
파리 여행 첫날,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좋아서 바토 파리지앵 유람선을 탔다. 바토 파리지앵에서 내리는 선착장에서 에펠탑은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고, 식당을 갈까, 간식을 사서 에펠탑 아래에서 먹을까? 했더니 9살 딸은 “엄마, 파리하면 바게뜨지! 맛있는 바게뜨 사먹자!“라고 했다.
에펠탑 주변 편의점에서도 바게트를 팔고 있었지만, ‘맛있는’ 바게트를 먹어야하니까 근처 블랑제리를 찾아보았다. 수상경력이 화려하고, 역사와 전통이 있는 블랑제리 발견!
작은 가게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빵을 고르고 있었다. 실내 장식은 아르누보 양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좁은 공간임에도 직원들 대여섯명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며 구석구석 보니, 과일이 올라간 패스츄리 위로 벌들이 꿀을 빨고 있다! 파리fly 였다면 위생관념을 의심하며 바로 가게를 나왔겠지만 벌은 또 괜찮았다. 벌이 사라지면 사람도 살지 못한다고, 점차 벌의 서식지가 사라지고 개체수가 줄고 있다는 사실에 도시 속에서 이 정도 작은 공존은 괜찮다고 생각이 들었다.
바게트와 함께 살구, 피스타치오가 들어간 패스츄리도 샀다. 바게트를 옆구리에 끼고 에펠탑 아래 공원까지 걸어가 잔디밭에 준비해간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앉았다. 아니, 누웠다. 샹송을 틀어놓고, 빵을 먹고, 아이는 잔디를 뛰어다녔다. 눅진한 살구와 베어문 패스츄리는 더할나위없이 부드럽고 달콤했다. 블랙 커피만 있다면 몇 개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 우리의 첫 바게트는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갓 나올 시간이 아니어서 그럴지도.
에펠탑 아래 잔디밭에서 아이는 리듬체조에서 배운 백 발란스를 열심히 연습했다. 다른 무리에 앉아있던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언니가 다가와 함께 자세를 취해도 되냐고 물어 보았다. 물론이지!
그렇게 외국인 언니와 담율이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백발란스를 잡았다. 주변에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졌다. 이 순간, 아이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아마도 리듬체조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간단히 준비한 빵과 함께한 피크닉에서, 우리는 잠깐 파리지앵이 되었다.
#블랑제리 2
지하철 역에서 나와 에어비앤비로 가는 길에 블랑제리가 하나 있다.
손님들이 줄을 설 공간이 겨우 나올만큼 작은 가게인데, 손님들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보다 빵 케이스가 훨씬 컸다. 바게뜨를 비롯해 사워도우, 샌드위치, 디저트까지 다양한 종류의 빵을 파는 곳이었다. 쇼윈도우쪽 진열대에는 초코 에클레어, 마카롱, 라즈베리 타르트 등 눈이 즐거운 디저트류가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평소 때보다 조금 일찍 집으로 들어 가던 길, 오후 4시쯤이었나. 구수한 냄새에 이끌려 빵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덨다. 보통 직접 빵을 굽는 블랑제리에서는 오전에 바게뜨가 한번 나오고, 오후 3~4시경에 한번 더 나온다. 어디선가 본 설명에 따르면, 아침에는 주로 크로와상, 뺑오 쇼콜라 등과 같은 버터가 들어간 빵을 먹고 바게뜨는 저녁 식사와 곁들여 먹는다고 했다. 우리 앞에 선 사람들이 다들 바게뜨를 하나씩 사서 나왔다.
그날 먹을 저녁거리를 잔뜩 사들고 가는 길이었지만, 방금 갓 구운 바게뜨를 이길 만한 메뉴는 없었다.
9살 딸과 바게트를 반씩 나눠들고 뜯어 먹는데, 콧노래와 춤이 절로 나왔다.
바삭해!!! 속은 정말 부드러워! 부드럽지만 쫄깃해! 너무 맛있어! 내일 또 먹자! 아직 따뜻해! 엄마는 껍질이 좋아, 속이 좋아? 나는 다 좋아!
속을 파먹었다가, 껍질만 뜯어 먹었다가, 한 입에 먹었다가, 그러다보니 넘쳐나는 감탄사와 함께 어느새 하나를 다 먹어버렸다.
우리는 바게뜨 하나로 충만감에 가득찼다.
# 블랑제리 3
파리시립미슬관으로 가는날.
아침부터 비가 추적 추적 내리더니,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작은 우산 하나로 나눠쓰고 가기에는 비바람이 너무 거세졌다.
“너무 추워, 이러다 다 젖겠어” 걱정스레 걷는 와중에 발견한 오렌지 색 등이 켜진 블랑제리가 눈에 띄었다. 이렇게 반가울수가.
따뜻한 라떼와 브리오슈, 크로와상, 크림 브륄레를 주문했다. 브리오슈는 어찌나 폭신한지. 손으로 잡고 먹는 동안에 엄지 손가락이 빵속으로 구멍을 내고 들어갔다. 라떼는 기계로 내려주는데도 한 잔 더 마시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따뜻하고 달달한 음식이 몸 속으로 들어가니 바깥 풍경이 달라보였다.
그렇게 몸을 데우고 다시 미술관에 가는 길에 비가 고여 강처럼 넓은 웅덩이가 생겼다.
까르르르-. 이게 강이야 길이야? 웅덩이를 둘러 돌아가던 아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빵과 커피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 우리에게 이런 풍경마저 즐거운 비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파티세리 1
앙젤리나. 코코 샤넬의 최애 디저트로도 잘 알려진 유명한 앙젤리나에 갔다.
루브르 맞은편에 위치해 가게 앞으로 항상 긴 줄이 늘어서 있어 평소에는 갈 엄두도 못 냈었었다. 튈르리 공원에서 한참 뛰어논 다음 오후 느지막히 갔더니 대기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유명한 곳을 가면 좀 긴장하게 된다. 바쁜 곳은 직원들의 피로도가 높아 친절을 기대하기는 좀 힘들다. 파리지앵들의 쌀씰맞음은 경험한 바도 있고, 후기로도 충분히 보았다. 자리 배정에 있어서도 은근한 인종차별이랄까. 동양인들만 모아서 테이블을 배치 받은 일도 겪다보니 늘 붐비는 인기 많은 곳은 일부러 피하게 된다는.
그런데 예상과 달리, 입구에서 만난 직원이 너무 유쾌하고 친절했다. 아이에게 몇가지 프랑스어도 가르쳐주고 함박 웃음을 지어주었다.
따뜻한 차, 핫초코, 마카롱, 레몬 타르트를 주문했다.
아이가 내 사진을 찍어주면서 뒤에 서빙하는 직원이 사진에 함께 찍혔다. 직원이 우리 테이블에 다가왔을때, 아이가 그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내 또래쯤 되는 직원은 그야말로 빵 터졌다! 예상치 못하게 찍힌 사진이 마음에 들 리없고, 유머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웃는 모습에 우리도 같이 웃음이 빵 터졌다.. 나는 어릴때 외국인을 만나면 이유없이 주눅이 들었는데, 유머로 상대를 대할 수 있는 너는 그야말로 세계인이구나.
아이의 편견없는 태도, 아이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이 파리와 파리지앵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어 놓았다. 적어도 아이와 함께한 파리는 참으로 친절하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