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일 차 / 로스 아르코스 ~ 로그로뇨)
순례 7일 차(9.30)인 숙박지인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마을을 출발하여 ▷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 ▷ 비아나(Viana) ▷ 로그로뇨(Logrono)까지 27.6km를 8시간 동안 4만 3천 보를 걸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우중에도 행진을 계속하여 장거리를 기진맥진한 상태로 로그로뇨의 한 펜션에 투숙하였다. 숙박지인 로그로뇨(인구 13만 명)는 라 리오하 주의 주도(州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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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아르코스를 숙소를 출발하면 축구장 대여섯 개를 훨씬 넘는 포도밭을 좌우 날개로 하여 그늘이 없는 평지길을 걸어야 했다. 단조롭고 지루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려서 비옷을 입고 출발해서 거추장스러웠지만 더운 햇빛보다는 다행이다.
산솔(Sansol)을 지나자 날씨가 개더니 무지개가 떠서 하늘에 아치 다리를 만들었다. 월리엄 워즈워드의 시 “무지개”가 뇌리를 스쳐갔다.
-찬란한 무지개를 보고 있노라면 내 가슴은 뛰 누나 / 내 아직 어렸을 적에 그러하였거늘. 어른 된 지금도 마찬 가지어 늘 / 내 늙은 뒤에도 그러하리라-(이하 생략)
늙은 내 가슴에도 무지개가 뜨며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린이와 노인은 공통점이 있다. 단것을 좋아하고 이빨이 없으며 잘 운다는 점이다. 그 공통점에서 무지개를 보자 가슴이 뛸 것을 워즈워즈는 알아 차린 모양이다. 순례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무지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산솔(Sansol)에는 "순례자의 물의 기적"이 전해지고 있다. 중세시대 긴 여정으로 지쳐 있고 심한 탈수증에 시달리는 순례자가 산솔에 도착했다. 옛날 옛적에 이 마을은 카미노(길)를 따라 있는 다른 많은 마을과 마찬가지로 환대로 소문이 났지만, 우물이 말라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순례자들이 물을 구할 수 없어서 괴로워했다. 절망한 한 순례자는 마른 우물 옆에 무릎을 꿇고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의 안녕을 위해 기도했다. 그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자 우물에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고 기뻐하며 귀중한 물을 마셨다. 이 우물은 "순례자의 우물"로 소문이 났고, 이 물은 그것을 마신 사람에게 힘과 치유를 제공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5km쯤 더 걸어가자 산길로 들어설 즈음에 털보 아저씨가 초라한 극장의 매표구 정도 크기의 미니바에서 음료수와 과일을 팔았다. 보면 볼수록 구제불능적으로 못생긴 과일 들이라서 입맛이 당기지 않아 눈요기로 긑냈다. 배고픈 상태로 6km쯤 더 걸어 아담하고 아름다운 비아나에서 순례자 메뉴로 점심식사를 포식하였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그림 같은 마을인 ‘토레스 델 리오’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묘 교회(Iglesia del Santo Sepulcro)로 유명하다.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연상시키는 팔각형 모양이 독특하다. 이 교회는 12세기에 신비로운 지식과 건축적 솜씨로 유명한 기사단이 주도하여 건설했다. 기사단 기사들에게 주어진 신성한 환상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받았다. 그 환상은 그들에게 정확한 크기와 구조를 잉태하여 교회를 강력한 영적 등대로 만들게 했다. 하지만 교회건축자들은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했고, 구조물은 계속해서 무너졌다. 그들은 절박한 상황에서 신의 가호를 청하는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밤, 신비한 순례자가 나타나 지시를 했고, 이에 건축가들은 더 이상 큰 문제없이 교회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들이 순례자에게 감사를 표하려고 했을 때, 그는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그를 신이 보낸 천사라고 믿게 되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 있는 역사적인 마을인 '비아나'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체사레 보르자’의 삶과 죽음은 이 마을의 전설로 남아 있다. ‘체사레 보르자’는 르네상스 시대의 권모술수에 능했던 인물이다. 그는 야망이나 군사적 위력,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서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영토인 '파플로나'의 주교로 일하다가 아버지가 교황이 된 1492년에는 발레시아 대주교가 되었다. 마키아벨리가 독재자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군주론" (Il Principe) 제7장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군주의 전형적인 모델로 꼽았다.
마키아 벨리는 체사레 보르자가 행동과 전략을 통해 효과적으로 권력을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필요할 때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고 적들을 제거하는가하면 동맹을 맺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면서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자기가 이미 생각했던 군주상을 체사레 보르자가 실천한 사례로 들었다. 체사레 보르자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는 필요하면 동맹을 형성하기도 하고, 배신을 통해서 적을 제거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의 실패에서도 교훈을 얻으라 했다. 체사레 보르자는 운이 다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지만, 이러한 현상은 그의 전략이나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외부 요인들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성공하려면 체사레 보르자와 같은 능력을 갖추며,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예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507년, ‘체사레 보르자’는 비아나로 피난을 왔다. 그는 나바라의 후안 3세 국왕의 매제였는데 반군으로부터 그 지역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숙련된 군사 지도자로서 사명을 달성하려고 군대를 지휘했다. 하지만 비아나 성벽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배신당해서 매복 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갑옷을 벗겨있었고, 흘린 피는 굳어 있었으며, 눈은 뜬 채로 전장에 버려졌다. 후안 3세 왕은 그의 눈을 감겨주고 자기가 입고 있던 진홍빛 망토를 벗어 그의 유해를 덮어 주었다. 비아나의 마을 사람들은 사령관의 유해를 ‘산타 마리아 교회’로 가져왔다. 그의 악명 높은 명성으로 교회가 모호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별다른 의식 없이 매장되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체사레 보르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를 물어본 내 스페인 발음이 나빠서 못 알아들었는지도 모른다.
중세 시대 스페인에서의 교황과 황제의 갈등은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전개되었다. 스페인은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직접적인 교황-황제 간의 대립보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진행된 기독교 왕국들의 재정복 운동(레콩키스타)과 그 과정에서 교황의 권위와 스페인 왕국들 간의 관계가 중심이었다.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무어인)을 축출하고 기독교 왕국들이 다시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일련의 전쟁과 정치적 움직임을 말한다. 교황청은 이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교황들은 기독교 왕국들에게 무슬림 세력에 맞서 싸울 것을 권고하며, 이들에게 성직자 파문 면제와 영혼의 구원을 약속했다. 이 과정에서 교황은 군사적 지원뿐만 아니라 이념적, 영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강화했다.
스페인에는 여러 독립된 기독교 왕국(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등)이 있었으며, 이들 왕국은 각각 교황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교황은 스페인 내 왕국들의 왕위 계승, 영토 분쟁 등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이를 통해 스페인의 정치적 지형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11세기와 12세기 동안, 특히 클루니 수도회와 같은 종교 운동의 영향으로 스페인 왕국들은 교회의 개혁과 강화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교황은 스페인 왕국들의 세속적 통치자들과 협력하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이들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알렉산데르 6세(로드리고 보르자)는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발렌시아 출신으로, 아라곤 왕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교황청에서의 경력을 쌓았으며, 1492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서 아라곤 왕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카톨릭 왕들)와의 외교 관계가 중요했다. 그들은 알렉산데르 6세의 교황 선출을 지지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의 정치적 이익을 도모했다.
체사레 보르자의 군사 활동과 정치적 야망은 스페인의 정치적 전략과도 연관이 있었다. 그는 스페인 출신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스페인의 지지를 받았고, 아버지의 교황청을 통해 스페인의 이익을 도모했다. 결론적으로,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보르자는 스페인 북부의 아라곤 왕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스페인의 정치적 이익을 도모했다. 그들의 영향력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정치적 관계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세기 후반, 이사벨 1세(카스티야)와 페르난도 2세(아라곤)의 결혼으로 스페인이 통일되면서, 교황과 스페인 왕국 간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통일된 스페인은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세력이 되었고, 교황은 스페인의 왕들과 협력하면서도 때로는 그들의 권력 확장에 제동을 걸고자 했다.
1492년, 스페인 군주들은 그라나다를 정복하며 레콩키스타를 완성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를 축하하며, 신대륙 탐험의 권리를 부여하는 교황 칙서(Inter caetera)를 통해 스페인 정부의 해외 확장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스페인 왕국들은 교황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적 정체성을 강화했지만, 동시에 세속적 권력과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계산을 병행하였다.
오늘의 목적지인 로고료노에는 4개의 성당이 있는데 그중에서 산티아고 엘 레알 성당(Iglesia de Santiago el Real)은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이 성당은 클라비호 전투(Battle of Clavijo)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9세기부터 짓기 시작했다.
클라비호 전투는 844년에 스페인 땅에서 기독교 왕국과 무어인 간의 역사적인 전쟁을 겪었다. 이 전쟁의 배경은 당시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후, 기독교 왕국들이 반격을 시작하게 된 시점이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왕 라미로 1세는 무어인들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전투 중 성 야고보가 전투에 나타나 아스투리아스 군을 도왔다는 전설이 있다. 클라비호 전투는 기독교 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는 기독교 왕국들에게 사기를 크게 불어넣었다. 이 전투는 나중에 스페인에서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로 성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클라비호 전투는 이후 레키스타(재정복 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스페인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1513년 라미로 1세부터 가톨릭 왕(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시대에 본격적으로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6세기에 마무리하였다. 이 성당의 현관은 바로크 양식인데 벽감 안엔 거대한 산티아고 마타모로스(Santiago Matamoros; 전사 산티아고) 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산티아고가 무어인들과의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 밑단에는 조가비를 매단 순례자 복장을 한 산티아고의 조각상도 볼 수 있다.
가톨릭교도가 아닌 나에게는 이슬람에 대하여 용맹스러운 장군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사도로서 산티아고의 이미지가 상반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의 목적지인 로그로뇨는 중세 시대에 무어인의 침략 위협을 받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신의 목숨과 도시를 파괴를 두려워하며 ‘산티아고 엘 레알 교회’에 모여 보호해 달라고 성 야고보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날 밤, 무어 군이 도시에 기습 공격을 준비하던 중 거위 무리가 교회 주변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지인 로그로뇨는 중세 시대에 무어인의 침략 위협을 받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신의 목숨과 도시를 파괴를 두려워하며 ‘산티아고 엘 레알 교회’에 모여 보호해 달라고 성 야고보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날 밤, 무어 군이 도시에 기습 공격을 준비하던 중 거위 무리가 교회 주변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거위의 울음소리가 크게 지속적이라서 마을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 도시의 임박한 위험을 알게 되었다. 주민들은 재빨리 무장하고 방어군을 조직하여 침략자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성 야고보가 거위를 보내 공격에 대해 경고했다고 믿었고, 그들의 구원을 성인의 신성한 개입의 은혜로 돌렸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성 야고보와 교회에 계속 경의를 표하고 매년 행렬과 축제로 이 기적적인 사건을 기념했다. 산티아고 엘 레알 교회는 현재 로그로뇨의 중요한 랜드마크로 남아 있으며, 거위의 전설은 여전히 지역 주민과 순례자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다.
중세 교회 건물은 고딕 건축의 아름다움의 실체이며 성 야고보에게 바친 많은 예술 작품과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레스토랑에서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했다는 주민이라는 할아버지가 이 지방 로그 노료의 ‘산마테오 축제(The San Mateo Festival)에 대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하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매년 9월 21일 리오하의 성인 마테오의 업적을 기리면서 포도 수확을 시작을 알리는 축제란다. 코로나 때문에 지난 2년 동안 축제가 개최하지 않아 너무 아쉬웠는데 지난달 개최된 축제는 예전보다 관광객이 적어서 이 지방의 경제 사정이 안 좋다고 한숨을 쉬었다. 축제 때 왔다면 더 좋았을 터인데 아쉽다며 위로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에 왔다면 알베르게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토를 달았다. 축제에서는 포도 밟기, 와인 시음, 주악 퍼레이드, 음식 던지기(?),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가 벌어지는데 자기도 포도 밟기에 동원되는 마을의 선수였다고 자랑했다. 이 지방 포도를 원료로 만든 비누, 향수, 로션, 핸드크림 등등 상품도 다양하다고 기염을 토했다. 갈 길이 바쁜 나는 그의 장광설을 하염없이 듣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레스토랑을 떠나며 그에게 이별의 악수를 하면서 힘주어 말했다.
“나는 순례길에서 맛있는 스페인 와인을 엄청 마시고 다닌다. 내가 일생동안 마신 포도주의 양 보다 순례길 한 달 동안 마신 포도주 양이 더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 와인 마니아들에게 리오하의 포도주를 선전할 것을 당신에게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