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일 차 / 로그로뇨 ~ 나헤라)
해가 뜨기 전에 로그로뇨 숙소인 펜션을 체크 아웃하고 마을 중심지의 불 켜진 제과점을 찾아 빵과 우유로 아침 식사를 때웠다. 아침저녁으로 살 빠지는 소리가 이베리아 반도에 메아리치고 있다.
오늘(10.01)은 순례길 33개 구간 중에서 가장 장거리인 29.4km 코스이다. 로그로뇨(Logrono)를 출발하여 ▷ 나헤라(Najera)까지 29km를 7시간 동안 걸었고 종일 4만 8천 보 가까이 걷느라고 힘든 날이었다.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온 후, 솔밭 길을 지나니 이제 밀밭과 포도밭이 불규칙하게 번갈아 나타났지만 하염없이 밋밋해서 지루하다. 장거리를 연이틀 걸은 탓에 아물어가던 발가락에 다시 물집이 잡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순례길목에 이름 모를 나무들이 완두콩보다 큰 주황빛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순례자들의 눈길을 끌어 모으지만 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충북 제천시에 있는 ‘의림지’를 연상케 하는 저수지가 나타났다. 그 이름이 '그라헤라 호수'란다. 호수 속에 아침 해가 달처럼 떠있다. 호수의 한 구석지에 오리 열댓 마리가 물놀이를 하고 있다. 이런 정도의 호수야 우리나라도 없지 않지만 ‘라 리오하’의 포도원의 "생물 다양성 시범공원"이란 간판이 서 있어서 그 특징을 찾아보지만 내 느낌으로는 별거 아니다.
10월이 시작되는 날. 순례길을 품고 있는 포도밭 평원은 끝없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네 포도철은 여름인데 이 나라 포도는 지금이 한창인가 보다. 보랏빛 포도송이들이 가을 햇살에 묵묵히 영글어 가고 있다.
포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포도송이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 같다. 요한복음 15장 5절을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중요성과 그로 인한 영적인 결실을 강조하는 문구 같다. 순례자들은 예수님이 지휘하는 방향을 따르면 포도들처럼 송이를 이루게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순례길 포도나무들이 좌우로 도열하여 순례자들을 소리 없이 환영하고 있다.
스페인에서 이름난 포도의 고장 ‘리오하’ 답게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포도나무들의 잎사귀들이 햇빛에 주눅이 들어 축 늘어져 있다. 일 년 내내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는 포도나무 군단들의 운명이 너무 가없다면 나만의 상상이 것이다.
순례길목에서 만나는 포도밭들은 엄청나게 광활하다. 10여 년 전에 미국 여행 때 들렸던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의 크기를 방불케 한다. 오렌지 나무는 포도나무보다 키가 커서 수확하려면 작은 사다리를 놓고 나무에 올라가 하나하나 따야 했기에 기계화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프랑스 포도주의 본고장인 보르도에서 왔다는 장년의 멋쟁이 순례자는 포도를 키우는 농민이고 와이너리를 갖고 있는 농부라며 자기를 소개했다.
그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포도주가 맘에 들어 전업을 했다고. 포도수확 철이라 바쁠 텐데 왜 밭일은 안 하고 순례길을 걷느냐고 물었더니 리호아 지방만 일주일 동안 다니면서 포도를 팔러 다니면서 순례를 한단다.
그에 따르면 포도 수확은 거의 차량에 탐재된 기계로 작업을 하기 때문에 편하게 농사를 짓는단다.
지난 세기까지는 포도밭 규모가 가로 세로 100m 이상으로 넓어서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고생깨나 했지만 지금은 기계화되었다고 말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인간의 지혜로 포도 농사를 지을 각종 기계와 트랙터를 만들어 농부의 일손을 덜어주고 있단다. 포도 수확 차량으로 포도나무 숲에 들어가 포도송이를 기계로 따서 잎사귀와 꺾어진 줄기는 추려내 제거하고 열매만 골라서 덤프트럭에 실어 발효 탱크로 가져간다는 거다.
포도 밭은 포도 추수 작업을 차량으로 할 수 있도록 줄 간격을 충분히 떼어 놓고 식재했기 때문에 포도나무 숲에는 좁은 골목만큼이나 넓은 길이 포도나무 대열과 나란하게 가고 있다. 포도나무 간격이 꽤나 넓어서 햇빛을 고루 받기 때문에 양질의 포도가 생산된단다. 포도 수확차량이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포도나무의 키를 조정하는 것 같아서 인간의 욕심에 포도나무가 고생한다 싶어 왠지 씁쓸하다.
내가 제1직장을 퇴직한 후에 5년간 살았던 충북 영동군은 전국 포도 생산량의 약 13%를 차지하여 ‘와인 특구’로 지정된 고장이다. 연간 포도생산량은 3만 3천 여 톤 정도라는데, 이를 포도송이로 계산하면 1억 송이나 되는 물량이라고 들었다.
영동의 포도농사는 규모가 작아서 기계 영농을 하지 못하고 하루 일당이 10만 원~15만 원이나 줘야 하는 동남아 노동자들을 인근 대전에서 모셔 온다고 했다. 이토록 생산비가 비싸게 치이다 보니 수지가 맞지 않아 포도농가들은 아우성이다.
외국산 포도와는 가격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포도농들의 엄살이려니 했지만 막상 스페인에 와서 포도밭의 거대한 실상을 확인한 결과 영동을 비롯한 우리네 포도농가가 경쟁력을 갖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때문에 10년 전부터 영동에서는 포도나무가 수지가 안 맞는다고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블루베리’나 ‘아로니아’를 심는 농가가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프랑스 농부 순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지역의 포도 농사는 프랑스 보르도 사람들이 질병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여 척박한 자갈밭에 포도나무를 심고 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스페인의 포도 경작면적은 세계에서 제일 넓지만 땅이 척박한 관계로 그 생산량은 세계 4위에 정도를 차지한다고 했다.
이 지방의 포도주는 ‘리오하 와인 비노’라는 이름을 붙여지는데 나이와 공정에 따라 세 종류 상품으로 만들어 시장에 출하한다. 우리나라 토속 막걸리처럼 상대적으로 브랜드화가 덜 된 포도주들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 순례자들의 식탁에 올라 그들의 여독을 풀어주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 같다.
포도밭 중에는 순례길 쪽으로 울타리가 있는 곳은 드물다. 포도밭이 하도 크고 넓어서 간이 울타리를 만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포기한 것 아닐까? 싶다. 그런데 포도밭 크기가 매우 작은 우리네 영동 포도밭에는 울타리가 있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작은 것은 나름대로 아름답고 소중하게 대접받는데 큰 것은 때때로 홀대받는다?
울타리가 없는 포도밭의 포도송이에 순례자의 손길이 스쳐간 흔적이 남아 있다. 길옆에 있는 나무에 매달린 포도송이들은 순례자들의 손을 탄 송이들이 많아 보인다. 포도 서리를 해 가며 스릴을 느끼고 싶었을까? 아니면 정말 배가 고팠거나 목이 말랐을지도 모른다.
순례자의 유튜브나 여행기에서 포도서리하는 장면을 그대로 찍어서 내보내는 것을 보면 낭만적인 절도(?)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포도서리를 죄의식을 갖지 않고 자행하는 것 같아 마음이 썩 개운치 않다.
그렇지만 “포도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라든가? "포도밭에서 방울뱀에게 엉덩이를 물리지 마세요!"라는 팻말을 밭에 세워두지 않았다. 바(Bar)나 레스토랑에서 포도주를 공짜로 제공하는 것처럼, 포도밭주인들은 포도송이로 순례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자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제주도 올레길을 최초로 개발했던 주역의 한 사람인 서명숙 이사장으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제주 올레길을 걸을 때 논밭의 농작물에 손을 대지 말라는 당부였다. 올레길 주변에 사는 농민들은 애써 가꾼 과일이나 채소 등 농작물을 외지인들이 무단으로 채취해 가기 때문에 민원이 많이 접수되고 있다고 했다.
올레길 주변 농부들이 농작물 훼손에 대한 배상을 해 주던지 아니면 올레길을 폐쇄하라는 요구가 속출하고 있단다. 우리나라 유명한 강산에 경쟁적으로 만들어진 둘레길을 걷는 타관 사람들이 농작물을 노략질을 하기 때문에 현지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매일 거의 같은 장소에 이르면 목이 마르게 되거나 배가 고플 지점에 자리 잡은 포도밭에서 포도 서리를 하게 되는 모양이다. 길섶 가까이 포도송이들은 반 토막이 되어 매달려 있다. 포도송이를 쥐가 뜯어먹은 모양이 흉하다. 일부 몰지각한 순례자들은 송이 채로 꺾어 가서 상처를 입은 나무들도 많았다.
그 나무들은 싫다 좋다 말없이 뙤약볕에서 벌을 서고 있는 모양새다. 목이 마를 때를 대비하여 준비한 음료수로 목마름을 해결하고 있는 착한 순례자로 자부심을 갖는다. 농부들이 애써 가꾼 포도를 따먹는 행위는 절도가 아닐 수 없다. 본인은 낭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매일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그런 낭만을 즐긴다면 포도 농가의 피해는 늘어날 텐데 이를 누가 배상한 단 말인가?
순례자들이 포도를 따먹지 못하게 하는 방안은 우리 어머니의 아이디어에서 힌트를 얻어야 할 것 같다.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 서울서 아파트에 살다 보니 남새밭이 없어서 군부대 시멘트 담벼락 아래 공터에 상추, 고추, 들깨, 오이와 호박을 심고 물을 주고 잘 가꾸어 놓았더니 등산객들이 오르내리며 그것을 따 가기 때문에 수확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다.
이듬해부터는 잘 자란 농작물에 밀가루를 곳곳에 뿌려놓고 '농약 살포 중'이라고 써 붙여 위장했더니 텃밭 채소류에 손대는 사람이 없다고 즐거워하셨다.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다.
무심코 던진 돌이 개구리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것처럼 포도농가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을 것이다. 사실 순례길 포도밭의 포도들은 농약으로 목욕을 하지 않으면 저렇게 영글지 못할 것이다. 함부로 따 먹게 되면 사약을 자진해서 먹는 셈이다. 순례자가 자기 죄를 사면 받거나, 또는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고자 순례길을 걸으면서 길가에 있는 포도를 따먹는다면 또 다른 죄가 누적될 것 같다.
중세 순례자들은 도둑이나 강도들에게 당했지만, 현세의 일부 순례자들은 스스로 도둑을 체험하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다.
나바레테 마을의 왕궁터를 지나자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포도주 공장을 만났다. 공장 앞에 있는 광고판이 서 있다. “산티아고”라는 말과 같은 뜻인 ‘야고보’라는 이름을 포도주 상품 이름으로 쓰고 있었다. 왠지 정이 끌려서 사진을 찍고 이 포도주 공장의 홈페이지를 인터넷에 들어가 상세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자기네 와인은 농약을 쓰지 않은 포도로 빚어낸 유기농 와인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그대가 야보고를 믿는다면 야보고라는 이름의 포도주까지 믿는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
어디쯤인가 성당이 있어서 스탬프를 찍으려고 기웃거렸더니 마침 결혼미사가 끝난 모양이다. 결혼 하객들은 인근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덕분에 레스토랑에는 결혼식 하객들로 붐벼서 점심 식사를 해결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다른 바를 찾아가려다 생각을 거두었다. 스페인 결혼 피로연 파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깔끔한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시종 즐거운 표정으로 축하객들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신랑신부가 하객들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피로연 파티를 열고 있었다. 하객들도 선남선녀처럼 한껏 예쁜 옷을 차려입고 있다.
신부는 신랑의 팔에 매달려 스스럼없는 키스를 몇 번이나 주고받으며 서로 얼굴에 바른 화장품을 먹고 있다. 신부 화장이 신랑 때문에 망가진 것을 알아차리고 신랑 신부가 얼굴을 다듬어 주고 다시 뽀뽀를 아낌없이 주고받는다. 다시 신부의 화장이 망가지고 만다. 뽀뽀는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그지없다.
하객들은 물론이고 새 출발하는 한 쌍을 처음 보는 순례자들까지 박수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느라고 여념이 없다. 신랑신부는 우리 순례자들에게도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를 보였다. 하지만 하객들은 땀에 얼룩진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순례자들을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후줄근한 복장에 땀 냄새와 거무튀튀한 얼굴의 순례자들이 그들만의 파티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내오고 있다.
나는 예비신자로 교리를 한 달간 배울 때, 가톨릭 교회에서 혼인은 성사(Sacrament) 로 여겨지며, 이는 매우 중요하고 신성한 제도라고 들었다. 가톨릭 신앙에 따르면,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은 하나로 결합되었고, 이 결합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 혼인 성사는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함께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종교의식이다.
결혼은 하느님에 의해 두 사람이 결합된 것이므로 인간은 이를 깨트릴 수 없다. 따라서 이혼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특별한 경우에만 혼인무효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 결혼은 부부가 자유 의지로 합의하여 이루어짐을 기본으로 한다. 강압이나 속임수 없이 진정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합의가 필요하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일이라, 가톨릭 교회는 부부가 하느님의 선물로서 자녀를 환영하고, 그들을 신앙 안에서 올바르게 양육할 책임을 져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서로를 위한 헌신과 희생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며 요구한다.
가톨릭교회에서 결혼은 단순한 사회적인 계약이 아니라, 하느님과 부부 사이의 신성한 약속이므로, 이는 평생 지속되어야 하는 영적 과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엄연해서 진심 어린 결혼축하를 또 한 번 받으려면 결혼을 한 번 더 해야 한다. 결혼축하를 한번 더 받으려고 또 다른 배우자를 골라 길을 들이느라고 고생할래? 아니면 옆에서 코치만 해대는 조강지처와 여생을 그럭저럭 살래?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할까?
당연히 나의 끈질긴(?) 도덕성으로 보아 후자에 방점을 주고 싶지만, 문제는 아내가 나를 떠나고 싶어 한다면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 건가? 쓸데없는 걱정으로 순례길이 팍팍하고 막막해진다.
유럽 국가인 스웨덴과 덴마크와 같은 북유럽 국가들의 이혼율은 40%를 넘고, 이탈리아, 프랑스는 30% ~ 40% 범위로 이혼율을 보이고 있다. 스페인 국민들은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이혼율은 55%로 세계 평균 수준보다도 훨씬 높게 나타난다.
스페인의 이혼비율이 높은 배경에는 2005년 이혼법률의 개정으로 이혼 사유를 가리지 않으며, 이혼절차를 간소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몽떼뉴는 "결혼은 새장과도 같은 것이다. 새장 밖에 있는 새들은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새장 안에 있는 새들은 밖으로 나가려 한다."라고 말했다. 이혼에 대한 보수적인 가톨릭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에서는 스페인의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변화가 세계적으로 높은 이혼율을 기록하게 만들었다는 분석이 있다.
결혼을 쉽고 싸게 하려면 라스베이거스로 가야 하고, 이혼을 쉽고 빨리 하려면 스페인으로 가라는 말을 라스베이거스 시청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들은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배우자와 일생을 같이 한다는 것은 자학으로 생각하는 세태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한 현실은 이혼율을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인간 수명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세상 모든 것이 변화무쌍한 시대에 가톨릭 규범은 언제까지 지켜질 것인지 궁금하다. 어쩌면 몽떼뉴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바라테를 지나 성 니콜라스의 *기적의 샘*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벤토사를 지나간다. 옛날에 순례자 한 명이 나처럼 이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오랜 여행과 더위로 인해 매우 지치고 탈진한 상태였다. 그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성 니콜라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 순간, 눈앞에 갑자기 샘이 나타났다. 샘물은 맑고 차가웠다. 그 물을 마시고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 기적에 감사를 드리며 순례를 계속 이어나갔다. 이 샘은 이후로도 많은 순례자들에게 휴식과 치유의 장소가 되었으며, 성 니콜라스의 은혜를 기리는 유적으로 남아 있다.
순례자들은 벤토사에서 샘을 찾아 물을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10 여분 후에 산허리를 잘라 만든 고속도로를 내려다보면서 순례길을 재촉한다. 순례자의 안전을 위해 철조망을 설치했는데 거기에 순례자들이 자기의 흔적을 남기려고 나뭇가지로 크고 작은 엉성한 십자가를 만들어 철조망에 걸어놓은 것들이 보인다. 그 거리가 거의 100m 미터는 넘을 것 같아 이채로워 사진기를 들이댄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순례자는 죽어서 사진을 남기리라.
순례길목에 세워둔 간판은 라 리오하(La Rioja) 주로 진입하고 있음을 알려주며 나헤라가 우리를 맞이한다. 순례길 나헤라(Najera)에서 길목 주택의 시멘트 담벼락에 붙여 놓은 한 편의 시(詩)가 걸려있다. 인터넷과 파파고 번역기로 의미를 파악하였다. 1987년 9월 산토도밍고 데 라 깔사다 문학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에우헤니오 가리바이 바뉴스"라는 신부가 쓴 시란다.
먼지와 진흙과 태양과 비
여기는 산티아고 가는 길
수많은 순례자들이 걸었다.
더 오랜 세월 동안
순례자여, 누가 너를 불렀는가?
어떤 숨겨진 힘이 널 데려왔는가?
들판의 별들도, 웅장한 대성당도 아니다.
나바라의 용사도, 리오하의 와인도,
갈리시아의 해산물도, 가스티야의 벌판도 아니다
순례자여, 누가 널 불렀는가?
어떤 신비한 힘이 널 데려왔는가?
길 위의 사람들도, 시골 마을의 풍습도,
역사와 문화도, 깔사다의 수탉도,
가우디의 궁전도, 폰페라다의 성채도 아니다.
지나며 본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어 기뻤다.
더 깊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
나를 밀어주는 힘, 나를 이끌어 주는 힘, 설명할 수도 없지만
저 위의 그분만은 알고 계시리라!
나헤라는 9세기와 10세기에 걸쳐 나헤라-팜플로나 왕국의 수도로 번영했으며, 이후 카스티야 왕국과의 통합으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혜라는 923년 나바르 왕 산초 1세와 레온 왕 오르드뇨 2세의 연합군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고, 산초 1세의 아들 가르시아 산체스에게 이 지역을 통치하게 하였다.
11세기 초 산초 3세 대왕은 나헤라를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 도시를 지나게 하면서 자치권을 선포하였다. 이 도시에는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ía la Real)이 있다. 옛날 나바라테의 왕이었던 가르시아 산체스 3세(García Sánchez III)가 사냥을 나갔다. 왕은 사냥 중에 길을 잃고 숲 속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신비로운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사슴을 쫓아갔다. 왕이 사슴을 따라가다 보니 백합으로 가득한 동굴에 이르게 되었는데 동굴 안에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있었다.
왕은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과 함께 성 십자가와 성모의 신발을 발견했다. 이런 체험을 기념하기 위해서 가르시아 왕(산초 3세의 아들)은 이 장소에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을 건설했다고 한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 의) 질문 2,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 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가?
차동엽 신부는 성경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에서 '말씀'은 '존재 원리'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태초에 존재 원리가 있었다"라고 해석한다.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의 문제이다. 만나면 증명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만물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누가 만들었겠는가? 만물이 돌아가는 이치에서 신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체험이 자신에게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된다. 그러나 우주 생성의 창조설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의 규정을 그대로 주장하는 것이기에 과학적으로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적인 믿음과 무조건적인 수용의 진리라고 보았다(차동엽:중앙일보 질문 2에 대한 대답: 214-224).
이어령 교수는 이 질문을 <하나님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지 않을까요?>로 바꿔어 설명하고 있다. 우주에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수학적·물리적 질서가 있다. 그것을 기획하고 만든 창조주가 없다면 질서가 있겠는가? 우주 만물이 존재하는데 그 만물에 속성과 질서가 없다면 그것은 우연의 결과요 창조주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물에 속성과 질서가 있다면 그것은 신에 의해 기획된 결과일 것이다(이어령: 24-26).
그러나 김안제교수는 우주 생성에 대하여 창조설과 자연발생설 중에서 자연과학에서는 자연발생설이 설득력이 크다고 보았다. 태초에 신이 빅뱅을 일으켜 우주를 창조하였고, 그 이후 오늘까지 점차 진화되었다고 본다. 기독교에서 신의 창조설은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과학적인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적인 믿음과 무조건적 수용의 진리라고 한다(김안제:752).
요컨대, 신이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제는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논쟁의 중심에 있는 복잡한 주제라서 증명 방식은 학자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개인의 종교적 경험이나 신앙의 증거, 성서 등의 종교 경전을 통한 신의 계시를 근거로 들기도 한다.
우주는 창조된 것인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인가? 현재까지 이에 대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증거는 발견하기 어렵다. 인간도 창조된 것인가,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인가도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러나 두 견해가 인간과 자연에게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어떤 창조이건 간에 창조자의 의도가 있고, 목적이 있다. 인간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우연의 존재라면 인간은 삶은 의미가 없게 되고, 허무한 존재가 된다.
창조설에 의할 때에야 인간의 존재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따라서 창조자가 의도한 우주의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자연을 보호할 가치가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자신의 신앙과 경험, 그리고 철학적 성찰에 기반을 두고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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