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일 차 /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벨로라도)
오늘(10.3)은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ito Domingo de la Calzada)를 출발하여 ▷ 벨로라도(Belorado)까지 22km로 약 5시간이 소요되었고 종일 걸음 수는 4만 보 정도였다.
10월 3일: 아침 7시쯤 숙소를 나와 가로등이 밝혀주고 있는 순례 길을 걸었다. 먼지가 푸석푸석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첫날부터 발가락에 생긴 물집은 자기 존재감을 뇌리에 시시각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10리 길 작두를 타는 기분으로 걸었다.
도시 교외로 나오자 날은 밝아져 들판 샛길 위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광활한 벌판에 펼쳐진 드넓은 밀밭. 추수가 끝나 밀들의 밑동들이 남아서 갈색 벌판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지역 농민들은 저 넓은 밭에서 밀농사를 어떻게 지을까? 씨 뿌리는 일에서부터 거름이나 비료 주는 일, 농약을 살포하는 일, 수확하는 일까지 기계로 하겠지만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다.
오하강 다리를 건너 시골길을 걸어가다가 N-120 도로를 옆에 끼고 비포장도로를 6km 이상을 걸었다. 우리 부부는 바에 들러서 빵과 주스를 사서 세 명의 한국 순례자 함께 야외 식탁에 앉아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도중에 W시에서 왔다는 고등학교 교사 출신인 68세 졸부를 만났다. 그는 일생동안 부동산 투기로 돈을 모으게 된 자랑스러운 얘기를 메들리로 엮어서 들려주었다. 노인들은 어디 가서든 자식 자랑, 돈 자랑, 건강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을 못 들은 모양이다. 그는 내가 '경청의 대가'라는 사실을 광속으로 눈치챈 것 같았다.
1997년 IMF 때부터 시작해서 지난 25년 간 부동산으로 부자가 된 내력을 주저리주저리 자랑하였다. 불경기에 값싸게 나온 부동산이나 경매 부동산을 챙긴 결과 지금과 같은 부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세 시간을 그의 재테크 얘기에 맞장구와 추임새를 쳐주었더니 그가 입에 거품을 물고 자랑했다.
재테크 수법을 토로하는 동안 나는 기진맥진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내는 현명하게도 일찌감치 그 대열해서 이탈하여 앞장서서 치고 나갔다. 볼모가 된 나 홀로 그의 돈 자랑을 오전 내내 경청하면서 변죽을 울리다 보니 그는 나를 졸도 직전까지 몰아갔다.
그라뇬 마을이 보이면서 짧은 오르막길이 시작되어 그치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헐떡거리면서도 재테크 썰을 풀었다. 오전 10시쯤 그라농 마을 초입에 도착했을 때 꽤 많은 순례자들이 푸드 트럭 뒤에서 줄을 서 요깃거리를 골라 산 다음 벤치로 가서 아침 식사를 때우고 있었다.
주변에 바(Bar)가 보여서 이때다 싶어 소변을 본다는 핑계를 대고 졸부의 영향권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길을 누군가와 같이 걸으면 거리가 멀지 않다는 데 그는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었기 때문에 그와 당장 결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화장실 앞에서 의리(?) 있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인정상 그에게 혼자 걷고 싶다는 의사를 최후통첩을 보내지 못한 심정은 홍길동과 같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도 못하는 심정, 혼자 걷고 싶어도 "혼자 걷겠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 심정. 오늘 하루는 그의 노예가 되어야 하나보다. 절망스럽다. 그러나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느님이 나와 졸부 사에에 천사를 내려 보내신 거다.
졸부가 순례길에서 우연히 만난 중년 여인에게 "혹시 김숙자가 아니냐"라고 말을 크게 말했다. 여자는 어리둥절하더니 맞다고 고개를 과할 정도로 끄덕이면서 이내 호들갑을 떠느라고 나를 외면했다. 찬스였지만 내가 섭섭한 이유는 무언가? 사나이 마음은 여자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남녀는 손을 마주 잡고 "웬일이니?"를 연발하며 방방 뜨며 걷기를 포기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외기러기 되는 찬스가 생겼다. 엄청난 호들갑으로 미루어 판단하건대 필시 거머리 졸부가 첫사랑을 순례길에서 다시 만난 것으로 추측했다. 영화 "김종욱 찾기"가 생각났다. 첫사랑을 찾아 나선 여자와 첫사랑을 찾아 주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자기들보다 더 가슴 떨리는 운명적인 '사랑'을 만드는 얘기 말이다. 순례길에서 첫사랑을 만나다니 다행인가? 불행인가? 불행 중 다행인가?
졸부와 나는 용산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익산 역에서 호남선과 전라선으로 분리되듯이 자연스럽게 따로 걷게 되었다. 내일 또다시 졸부를 만나게 되면 그녀가 누구냐고? 어떤 사연이 있었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 호기심은 오늘 내가 졸부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구축해 주고도 남는 화제였다.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노파심이지만 졸부가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에게도 돈자랑을 주저리주저리 읊어서 40년 전에 떠난 첫사랑의 속을 발칵 뒤집어 버리지나 않았을까 심히 걱정된다. 아니 우연히 만난 첫사랑으로부터 다시 한번 채일까 봐 걱정된다. 걱정도 팔자라지만 제발 '기우'이기 바란다.
아내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W시의 졸부를 떼내고 앞서가던 아내를 따라잡아 그라뇽에 도착했다. 그라뇽에 있는 ‘산 안 바우티스타 교회’는 12세기부터 역사와 전설을 자랑한다. 중세의 갈등 기간 동안 침략자들이 이 마을에 접근했다. 목숨을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은 교회에서 피난처를 찾고 신께 도움을 달라고 기도했다.
종탑에 아무도 없었지만 종들이 저절로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너무 불길하고 커서 침략자들을 놀라게 만들어, 그들을 퇴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마을은 전혀 파괴되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단다.
그라뇽 마을을 벗어나자 다시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얼마 후에 커다란 빨간색 표지판과 지도를 붙여 놓은 게시판이 눈길을 끌었다. 리오하주에서 '카스티야 이 레온' 주로 넘어감을 알려주는 주간의 경계간판이 서 있었다.
N120 옆으로 난 순례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작은 마을의 안 길을 통과하여 다시 외곽으로 뚫고 나오는 여정을 되풀이하였다.
"레디시야 델 라 카미노(Redecilla del Camino)"부터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 (Castilla y León)이 시작된다. 오늘의 목적지는 '벨로라도'였다. 이름이 '벨로'라 하더라도 이 마을을 지나칠 수 없다. 에브로 계곡에서 고원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로마 시대에 강 건너편에 언덕을 만들었고 그 밑에다 만든 도시가 벨로라도 란다.
이 도시는 티론강 강줄기를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9세기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국경이었다. 이 왕국은 이슬람이 지배하던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 하는 소위 '레콘키스타 운동'을 주도했던 도시였다고 한다.
12세기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1세가 이 지역을 재정비하여 자치권을 부여하였으며,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 덕분에 성장하게 된 도시였다. 풍요로운 지역에 위치한 만큼 항상 주변 왕국들 간의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결국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좁고 구불구불 한 구 시가지는 성벽 안에 살았던 주민들의 삶의 터전과 낡은 주택들이 보전되고 있어서 중세 마을 풍경을 충분하게 엿볼 수 있었다.
거리를 둘러보다가 트래킹 하는 길목에서 자동차를 대놓고 식당 낱장 광고와 함께 순례자들에게 생수 한 병씩 나누어 주며 손님을 유인하고 있었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업주의 성의가 괘씸하고 기특해서 그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점심 겸 저녁 식사를 '순례자 메뉴'로 배부르게 먹고 나니 이빨을 쑤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요지를 구할 수 없어서 종일 불편했지만 스페인 말로 요지를 알지 못한 죄로 이빨을 까지 않기로 했다.
산타마리아 성당은 16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로 고딕양식의 성모상과 순례자 산티아고가 이슬람인들을 쳐부수는 조각상이 보전되어 있다. 그 외에도 벨렌의 성모경당, 산 카프라시오 동굴, 산 페드로 성당이 순례자의 눈길을 끌어 모은다.
성당 앞에서 세 명의 순례자들이 배낭에서 짐을 꺼내 쓰레기 통에 버린다. 배낭에 숨겨온 욕심을 버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까운 표정과 홀가분한 표정이 오버랩되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좌) 산타마리아 성당 (우) 브레또네라 성모 수도원
종교목적의 순례자는 두 개의 짐을 지고 순례를 나선다. 하나는 정신적인 짐이고 또 하나는 육신을 힘들게 하는 짐이다. 전자는 순례하는 여정에서 털어낼 수도 있다. 존 번연의 책 “천로역정”에서 순례자인 크리스천이 지고 가는 짐과 같다. '멸망의 도시' 출신인 크리스천은 짐을 지고 전도사가 가리켜 준 대로 천성을 찾아 '좁은 길'을 따라간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무거운 짐을 진자인 그는 예수님 앞으로 오라는 말씀을 믿고 따르려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시련을 겪게 되지만 결국 이를 모두 극복하고 '천성'에 도착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내 육신을 힘들게 하는 짐은 한 달 동안 사용할 생필품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죄다 챙겨 넣었다. 그 결과 그 무게가 나를 후회막급하게 만든다.
일부 유튜버의 동영상이 시청자들을 현혹시켜서 구독자 수와 조회수를 늘리기 위해서 짐에 대한 가짜 뉴스를 진짜처럼 전달하고 있다. 예컨대, 다섯 살짜리 어린애와 배낭과 함께 완주했다는 유튜버가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엄마도 천진난만한 아이도 고생깨나 했을 것 같다. 특히, 아이는 엄마한테 본의 아니게 학대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아무런 즐거움이나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데 800km를 끌고 다녔다면 아이는 무슨 죄를 짓고 이 고생을 하는가?
배낭 없이 맨몸으로 전 코스를 완주했다는 허무 맹랑한 유튜버도 있었다. 맨몸으로 완주했다는 것은 같은 알베르게에 동숙한 순례자들에게 악취와 불결함 때문에 혐오감을 매일 안겨주었을 가능성이 많다. 순례자들은 그를 경원하며 걸었을 것이다. 그 친구에게 국적이 어디냐고 물었을 것이며, 그는 자랑스럽게 '노스코리아'가 아니라 '사우스 코리아'라고 서툰 외국어로 또박또박 대답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글리 코리안'을 여러 나라의 순례자들에게 각인시켜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45리터들이 배낭을 준비해서 '대한민국순례자협회'와 많은 유튜브에서 권장하는 휴대품 리스트를 참고로 하여 배낭에 넣을 물건들을 준비했다.
1. 여권 및 순례자 여권 2. 현금 및 카드 3. 순례길 가이드 북 4. 의류: 계절에 따라 다름( ① 기능성 티셔츠 3장 ② 기능성 바지 2장 ③ 속옷 및 양말 각각 3장 ④ 얇은 재킷 및 방수 재킷 ⑤ 모자 또는 햇빛 가리개 ) 5. 비닐 비옷과 양산 또는, 우산(우비무환 雨備無患ㅋㅋ) 6. 트레킹화 또는 등산화, 샌들 또는 슬리퍼(휴식을 위해) 7. 수건 및 개인위생 용품(① 수건 ② 비누, 샴푸, 치약, 칫솔 ③ 손 세정제 ④ 비상약품 ⑤ 휴지 등) 8. 응급 처치 키트(① 반창고 ② 소독제 ③ 기본 상비약 ④ 바늘과 실 ⑤ 마스크 등) 9. 플라스틱 물병 10. 취사도구 (① 가벼운 종이접시 ② 종이컵 ③ 플라스틱 스푼 및 포크) 11. 침낭( 숙소가 알베르게 일 때 필수) 12. 스틱 2개(현지 알베르게에서 버리고 간 것을 취할 수 있음) 13. 휴대전화 및 충전기 14. 배낭용 자물쇠와 열쇠 15. 플래시( 휴대폰 플래시 대용할 수 있음) 16. 알베르게에서 사용할 귀마개 및 안대(필수) 17. 비닐 백팩 (쓰레기나 젖은 옷 등을 싸기 위해)
가짓수를 세면 100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배낭의 무게가 체중의 10%를 초과하지 않도록 하라는 고수들의 충고를 따를 요량으로 물건들을 배낭에 넣었다가 빼기를 거듭했지만 무게는 별로 줄지 않았다.
부부가 함께 배낭여행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이 쓰는 비용은 30% 정도까지 줄일 수 있지만 짐은 어부
인의 옷가지 때문에 무게는 크게 줄지는 않았다.
어떤 순례자들은 텐트에다 매트리스와 간이 의자까지 메고 걷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그들에게 한마디 충고하고 싶지만 남이야 전봇대로 이빨을 쑤셔도, 남이야 브래지어로 스카프를 하고 다녀도 상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순례계의 에티켓이다.
그들의 사생활이니까 간섭해서는 안되지만 "질문의 자유"를 억누르며 살고 싶지 않았다.
"텐트는 몇 번이나 썼느냐"
"매일!"이라고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우문현답 같아서 무안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순례하면서 야보고가 겪은 고통을 체험해 보고자 전체 구간을 노숙하고 다니는 순례자들이었다.
이 길 위에 있는 순례자들은 왜 고생을 사서 하는가? 질문의 자유를 구사하고 싶다. 내 인생사에서 편리함만을 추구했던 내가 고생을 자초하여 땀을 흘리며 순례길을 걷고 있는 이유를 대지 못하고 편리하고 간단하게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김상용 시인처럼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를 닮았다.
순례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산티아고(야보고)의 조각상을 유심히 살펴보라. 얼마나 단출한 몸가짐인가! 그가 소지한 휴대품은 오로지 스틱, 물병으로 쓰는 표주박, 햇빛을 가리는 모자가 전부이다. 크고 무거운 배낭은 동키서비스회사에게 배달을 시킨 나는 산티아고처럼 순례하면서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순례길에서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지고 가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도 나도 기력이 고만고만하게 떨어진 상태라서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배달민족 아가씨가 배낭이 무거워 쩔쩔매는 것을 목격했지만 배낭을 내가 옮겨주겠다는 제안을 할 처지가 아니다. 일시적인 호의를 베풀고 감사의 인사를 한 달 동안 받을 것이냐 말겠이냐로 생각만 무성했다. 보호받을 나이라고 강조하고 싶은 나는 그녀에게 던지고 마는 한마디 말은 전혀 영양가가 없는 공허한 충고였다. '건강한 남자를 물색하여 매달리라고'
군대 졸병시절 완전군장을 하고 10km 달리기로 전투력 평가를 받을 때를 생각하면 쓴 미소를 짓게 만든다. 소대장이 구령을 붙이고 소대원들은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로 이어지는 군가로 사기를 진작시키면서 조깅을 했다. 소대원의 평균 나이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병장이었던 나. 낙오자라는 불명예를 얻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로 각오를 했다.
조깅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자 낙오자들 한 둘이 길거리에 주저앉거나 쓰러지고 만다. 아니 어떤 병사는 쓰러져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히기도 했다. 소대장은 꾀병을 하고 있다며 철모로 쓰러진 병사를 툭툭 치며 일으켜 세운다. 그들은 낙오자라는 낙인이 찍히든 안 찍히든 아랑곳하지 않고 비틀비틀 대며 걸었다.
나는 낙오병의 군장배낭까지 둘러메고 대열에 합류했다. 그 한 시간 이상 나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 순간의 소 영웅심 때문에 나는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도 국가는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타의 모범이 되는 전우애를 보였다고 나에게 연대장의 표창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 표창장은 망명정부의 화폐처럼 사회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로부터 42년이 지난 지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7.5kg 무게의 배낭도 메고 걸을 자신이 없다.
내 짐을 내려놓으라고 해서 미련 없이 내려놓고 배달시킨 내가 어찌 남의 짐을 다시 어깨에 올려놓을 수가 있겠는가?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몸뚱이가 도리질 치며 모른 체하라고 말리고 있다.
순례길에서 연약한 여성이 건강한 남성에게 짐의 일부를 부탁하는 경우를 딱 한번 볼 수 있었다.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국적이 다른 그들 커플은 순례길에서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한 달 후 순례가 끝나는 대로 연애조차 끝나게 된다면 어쩌나! 부디 구제불능의 늙은이의 "기우" 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아내의 배낭도 배달을 의뢰하자고 말했지만 아내는 비용을 이유로 내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그녀의 반동에 대하여 나는 자기 짐을 자기가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아내에게 주입하려고 애를 쓴다.
아내의 배낭이 어느 순간에 내 등을 올라탈까 봐 내 어깨는 하루 종일 불안에 떨고 있다. 하지만 영원한 동반자임을 선언한 아내가 자기 배낭을 스스로 메고 가면서 낑낑대고 있는 모습을 지켜만 본다면 나는 조만간에 아내 학대 혐의로 고발당할 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내가 제삼자인 특히, 연약하면서도 미모를 강력한 무기로 살아온 듯한 여성의 배낭을 날라주는 페미니스적 배려심이 작동된다면 아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은 하지만 그런 발상은 상상조차도 책임을 져야 할 거다.
가정평화는 풍비박산이 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배낭 때문에 안쓰럽게 쩔쩔매는 외간 여자에게 내 신사도를 남용하거나 과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 규칙을 어기면 나는 일생동안 아내의 홀대나 천대를 받게 될 것이다.
차라리 아내의 배낭을 처음부터 내가 대신 메고 걷는 것이 앞으로 한 달간 부부간에 평화를 유지하는 지름길임을 굳게 믿는다. 아내의 배낭을 내가 메고 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내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매일 갸륵한 선행을 베풀고 있는 나는 노벨부부평화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 없다. 나는 지베 없다. 스페인 어느 마을에서 땀을 흘리며 걷고 있다. 인터뷰가 필요하면 특파원을 순례길로 보내시길!
순례자들은 배낭에서 물건들을 골라서 버리기가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순례기간 중에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착각 때문이다. 배낭의 내용물 중에서 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물건부터 버린다. 가장 비싸게 구입한 등산화가 무겁다는 이유로 희생의 제물이 되고 만다.
호가 25만 원짜리 등산화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는 신세가 되고 만다. 순례길에는 이정표 팻말 위에, 아니면 전깃줄 위에, 철조망에 등산화들이 매달려 썩지 않은 채로 주인을 원망하는 모습이거나 주인을 기다다리는 모습으로 걸려 있다.
순례길에는 아예 무거운 짐은 가져가지 말고 필요하면 빌려서 쓰거나 빌릴 수 없으면 사서 쓰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기를 권하고 싶다.
‘대한민국순례자협회’의 홈페이지의 순례길 ‘가이드 북’을 보면 순례자의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등산화, 배낭, 침낭, 의류, 스틱을 구체적으로 소개 설명하는 것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배낭 싸기, 배낭 메는 법, 배낭끈 조절법, 배낭 메고 걷는 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된다.
내가 챙겨 온 준비물 중에서 빠뜨린 것이 있다면 배낭의 방수 커버였다. 그게 없어서 비가 오는 날은 배낭 속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다. 비에 젖은 배낭은 무게가 늘어나 체력소모가 많아진다. 비가 많이 올 때에는 김장용 비닐과 같은 조금 두꺼운 비닐이나 등산용품점에서 판매하는 드라이 색으로 내부를 감싸서 습기로부터 물건을 보호할 수 있다.
또한 배낭 내부를 비닐이나 드라이 색으로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배낭의 외부를 방수 커버로 덮어야 안심할 수 있다. 순례자는 날씨를 예보하는 앱을 휴대폰에 깔아서 그날그날 참고하여 배낭을 빗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배낭이 가벼울수록 걸을 때의 부담이 덜어지는 체험으로부터 인생을 배운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미니멀라이즈 한 삶이 필요함을 느낀다면 자신의 영적 성장은 엄청난 진척을 본 셈이다. 일찍이 무소유를 주장했던 '법정스님'의 혜안이 존경스럽다.
배낭을 가볍게 하면 이점이 느껴지지만 아쉬운 점은 순례길에서 기념품을 살 수 없다. 기념품을 사고는 싶은데 배낭의 무게 때문에 지나치자니 안타깝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아니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례길인데 어쩌란 말이냐? 아쉽지만 기념품을 사진으로 남기기로 한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질문 4. 언젠가는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 아닌가?
차동엽 신부는 과학이 계속 발전한다고 해서 신의 존재가 부인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과학의 발전과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가동하며, 각기 다른 목적과 방식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의 섭리가 과학을 통해 더 명쾌하게 증명될 것이라고 본다(질문 4에 대한 대답)(차동엽: 252-261).
김안제 교수는 신의 존재 여부는 과학적으로 규명될 것이므로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실체를 밝혀낼 것으로 보았다(김안제:753).
이어령 교수는 "너무 복잡한 문제라며 한 편의 우스개 이야기"로 대답을 대신했다(이어령: 27-28).
-- 어느 날 초능력 AI 로봇이 신에게 도전합니다. “당신이 만든 인간과 내가 만든 인간, 어느 쪽이 더 우수한지 내기를 해봅시다.” 그러자 하나님이 웃으시면서 “어디 한번 해봐라” 하고 말해요. AI 로봇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처럼 흙을 모아 반죽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잠깐, 내가 만든 흙에 손대지 마. 흙도 네가 만들어”라고 했어요. 로봇을 만드는 금속, 플라스틱 같은 원자재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어요? 지구에 있는 모든 원자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지요. 우리에게 주신 창조주의 선물이에요.--
많은 학자들은 과학과 신앙이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고 있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물리적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이며, 신앙은 삶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탐구하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진보가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인간 수명을 연장할 수는 있지만, 삶의 의미나 도덕적 가치를 제공하지는 못 한다. 이런 유형의 질문들은 여전히 철학이나 신학의 영역에서 고찰될 것이며, 신앙은 그 답을 제공하는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과학의 발전이 계속된다고 해도 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과학적 문제로만 해결될 수는 없다. 과학이 생명과 우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인간 삶의 궁극적 의미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과학과 신앙은 인간의 이해를 확장하기 위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둘을 어떻게 조화롭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는 앞으로도 깊은 성찰이 필요한 영역이다.
요컨대, 과학과 신앙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은 신앙을 공고히 하는 것이고, 신앙은 과학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과학이란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과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연구 발전시키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고 하지만, 인간과 다른 동물 예컨대, 개를 합성하여 어떤 형태의 동물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고, 아무리 장수하더라도 인간이 지상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신의 존재는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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