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일 차 /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벨로라도)
오늘(10.3)은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ito Domingo de la Calzada)를 출발하여 ▷ 그라논(Granon) ▷ 레다시야 델 카미노(Redaslla de Camino) ▷ 빌로리아 데 라 리오하(Viloria de la Rioja) ▷ 비야마요르 델 리오(Villamayor del Rio) ▷ 벨로라도(Belorado)까지 22km로 약 5시간이 소요되었고 종일 걸음 수는 4만 보 정도였다.
10월 3일 아침 7시쯤 숙소를 나와 가로등이 밝혀주고 있는 순례 길을 걸었다. 먼지가 푸석푸석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걷다 보니 첫날부터 발가락에 생긴 물집은 자기 존재감을 뇌리에 시시각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10리 길 작두를 타는 기분이다.
도시 교외로 나오자 날은 밝아져 들판 샛길 위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광활한 벌판에 펼쳐진 드넓은 밀밭. 추수가 끝나 밀들의 밑동들이 갈색 벌판을 채우고 있다. 이 지역 농민들은 저 넓은 밭에서 밀농사를 어떻게 지을까? 씨 뿌리는 일에서부터 거름이나 비료 주는 일, 농약을 살포하는 일, 수확하는 일까지 기계로 하겠지만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다. 오하강 다리를 건너 시골길을 걸어가다가 N-120 도로를 옆에 끼고 비포장도로를 6km 이상을 걸었다. 우리 부부는 바에서 빵과 주스를 사서 세 명의 한국 순례자 함께 야외 식탁에 앉아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도중에 W시에서 왔다는 고등학교 교사 출신인 68세 졸부를 만났다. 그는 일생동안 부동산 투기로 돈을 모으게 된 얘기를 메들리로 엮어서 들려주었다. 그는 내가 '경청의 대가'라는 사실을 광속으로 눈치챈 것 같았다. 1997년 IMF 때부터 시작해서 지난 25년 간 부동산으로 부자가 된 내력을 자랑하였다. 세 시간을 그의 재테크 얘기에 맞장구와 추임새를 쳐주었더니 그가 입에 거품을 물고 재테크 수법을 토로했지만 나는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아내는 현명하게도 일찌감치 그 대열해서 이탈하여 저만치 홀로 걷겠다고 대열에서 빠져나가 앞장서서 떠났다. 볼모로 잡힌 나만 그의 돈 자랑을 오전 내내 경청하면서 변죽을 울리다가 나는 졸도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라뇬 마을이 보이면서 짧은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그는 헐떡거리면서도 재테크 썰은 계속되었다. 오전 10시쯤 그라농 마을 초입에 도착했을 때 꽤 많은 순례자들이 푸드 트럭에 줄을 서서 요깃거리를 골라 사서 벤치에 앉아서 아침을 때우고 있었다. 주변에 바(Bar)가 보여서 이때다 싶어 소변을 본다는 핑계를 대고 바로 피신하는 체 하면서 그의 영향권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그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화장실 앞에서 의리(?) 있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인정상 그에게 혼자 걷고 싶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지 못한 심정은 홍길동과 같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하는 심정, 혼자 걷고 싶어도 "혼자 걷겠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 신세. 그런데 하느님이 천사를 보내셨다. 그가 어떤 여자를 보더니 "김숙자가 아니냐"라고 물었다. 여자는 어리둥절하더니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순간, 두 남녀는 손을 마주 잡고 "웬일이니?"를 연발하며 방방 뜨기를 계속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외기러기가 되는 찬스가 나에게 손짓을 했다. 엄청나게 반가워하는 호들갑으로 판단하건대 필시 졸부가 첫사랑을 순례길에서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영화 "김종욱 찾기"가 생각났다. 첫사랑을 찾아 나선 여자와 첫사랑을 찾아 주는 남자가 이제 첫사랑보다 더 가슴 떨리는 운명적인 사랑을 만드는 얘기로 기억한다. 순례길에서 첫사랑을 만나다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우연인가?
할 수 없이 내일 그를 만나서 그녀가 누구냐고? 어떤 관계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졸부가 모처럼 만난 첫사랑에게 돈자랑을 하다가 채일까 봐 심히 걱정된다.
아내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W시의 졸부를 떼내고 앞서가던 아내를 따라잡아 그라뇬에 도착했다. 그라뇬 ‘산 안 바우티스타 교회’는 12세기부터 역사와 전설을 자랑한다. 중세의 갈등 기간 동안 침략자들이 이 마을에 접근했다. 목숨을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은 교회에서 피난처를 찾고 신께 도움을 달라고 기도했다. 종탑에 아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종들이 저절로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너무나 불길하고 무자비해서 침략자들을 놀라게 만들어, 그들을 퇴각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마을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라뇬 마을을 벗어나자 다시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얼마 후에 커다란 빨간색 표지판과 지도 게시판들이 눈길을 끌었다. 리오하주에서 '카스티야 이 레온' 주로 넘어감을 알려주는 경계간판이 서 있었다.
N120 옆으로 난 순례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작은 마을의 안 길을 통과하여 다시 외곽으로 나오는 여정을 되풀이하였다.
"레디시야 델 라 카미노(Redecilla del Camino)"부터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 (Castilla y León)이 시작된다. 오늘의 목적지는 '벨로라도'였다. 이름이 벨로라도 이 마을을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브로 계곡에서 고원으로 이어지는 자연적인 통로 통제하기 위해 로마 시대에 강 건너편에 언덕을 만들었고 그 밑에다 만든 도시가 벨로라도란다. 이 도시는 티론강 강줄기를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9세기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국경이었다. 카스티아 왕국은 이슬람이 지배하던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 하는 소위 레콘키스타 운동을 주도했던 지방자치단체였다.
12세기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1세가 이 지역을 재정비하여 자치권을 부여하였으며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 덕분에 성장하게 된 도시란다. 풍요로운 지역에 위치한 만큼 항상 주변 왕국들 간의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결국 ‘카스티야 이 레온’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좁고 구불구불 한 구시가지는 성벽 안에 살았던 주민들의 삶의 터전, 낡은 주택들이 수리되어 보전되고 있어서 중세 마을 풍경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었다. 거리를 둘러보다가 트래킹 하는 길목에서 자동차를 대놓고 식당 낱장 광고와 함께 순례자들에게 생수 한 병씩 나누어 주며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업주의 성의가 괘씸해서 그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점심 겸 저녁 식사를 '순례자 메뉴'로 배부르게 먹고 하루 종일 이빨을 쑤시고 싶은데 ㅛ지가 없어서 마냥 불편했다.
산타마리아 성당은 16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로 고딕양식의 성모상과 순례자 산티아고가 이슬람인들을 쳐부수는 조각상이 보전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벨렌의 성모경당, 산 카프라시오 동굴, 산 페드로 성당이 순례자의 눈길을 끌어 모았다. 성당 앞에서 세 명의 순례자들이 배낭에서 짐을 꺼내 쓰레기 통에 버리며 아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좌) 산타마리아 성당 (우) 브레또네라 성모 수도원
모름지기 종교목적의 순례자는 두 개의 짐을 지고 순례를 나선다. 하나는 정신적인 짐이고 또 하나는 육신을 힘들게 하는 짐이다. 전자는 순례하는 여정에서 털어낼 수도 있다. 존 번연의 책 “천로역정”에서 순례자인 크리스천이 지고 가는 짐과 같다. 크리스천은 '멸망의 도시' 출신으로, 짐을 지고 전도사의 말을 듣고 '좁은 길'을 따라 천성을 찾아 나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무거운 짐을 진자인 그는 예수님 앞에 오라는 말씀을 믿고 따르려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시련을 겪게 되지만 결국 이를 모두 극복하고 천성에 도착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한편, 순례자의 육신을 힘들게 하는 짐은 한 달 동안 사용할 생필품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모두 챙겨 넣기에는 무리다. 일부 유튜브 동영상이 시청자들을 현혹시키기거나 우롱하여 구독자수와 조회수를 늘리기 위해서 가짜 뉴스를 경계해야 한다. 예컨대, 다섯 살짜리 어린애와 함께 완주했다는 유튜버가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엄마도 아이도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특히, 아이는 엄마한테 본의 아니게 학대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즐거움이나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데 800km를 끌고 다녔을 것 같다. 그건 어림없는 가짜 유튜브일 것 같다.
또한 배낭 없이 맨몸으로 전 코스를 완주했다는 허무 맹랑한 유튜버도 있다. 맨몸으로 완주했다는 것은 같은 알베르게에 동숙한 순례자들에게 악취와 불편을 제공함으로써 혐오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므로 다른 순례자들의 기피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 친구의 국적은 어디냐고 질문을 받았을 것이며, 국위 선양을 한답시고 '노스코리아'가 아니라 순진하게 '사우스 코리아'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글리 코리안을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나는 45리터들이 배낭을 준비해서 '대한민국순례자협회'와 많은 유튜브에서 권장하는 휴대품 리스트를 참고로 하여 준비를 했다. 아래 목록들은 내가 준비한 것들인데 현지에서 조달한 물품도 섞여 있다.
1. 여권 및 순례자 여권
2. 현금 및 카드
3. 순례길 가이드 북
4. 의류: 계절에 따라 다름( ① 기능성 티셔츠 3장 ② 기능성 바지 2장 ③ 속옷 및 양말 각각 3장 ④ 얇은 재킷 및 방수 재킷 ⑤ 모자 또는 햇빛 가리개 )
5. 비닐 비옷과 양산 또는, 우산(우비무한 雨備無患ㅋㅋ)
6. 트레킹화 또는 등산화, 샌들 또는 슬리퍼(휴식을 위해)
7. 수건 및 개인위생 용품(① 수건 ② 비누, 샴푸, 치약, 칫솔 ③ 손 세정제 ④ 비상약품 ⑤ 휴지 등)
8. 응급 처치 키트(① 반창고 ② 소독제 ③ 기본 상비약 ④ 바늘과 실 ⑤ 마스크 등)
9. 플라스틱 물병
10. 취사도구 (① 가벼운 종이접시 ② 종이컵 ③ 플라스틱 스푼 및 포크)
11. 침낭( 숙소가 알베르게 일 때 필수)
12. 스틱 2개(현지 알베르게에서 버리고 간 것을 취할 수 있음)
13. 휴대전화 및 충전기
14. 배낭용 자물쇠와 열쇠
15. 플래시( 휴대폰 플래시 대용할 수 있음)
16. 알베르게에서 사용할 귀마개 및 안대(필수)
17. 비닐 백팩 (쓰레기나 젖은 옷 등을 싸기 위해)
배낭의 무게가 체중의 10%를 초과하지 않도록 물건을 담았다가 빼기를 거듭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부부가 함께 배낭여행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이 쓰는 비용은 30% 정도까지 줄일 수 있지만 짐은 어부
인의 옷가지 때문에 무게를 줄이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어떤 순례자들은 텐트에다 매트리스와 간이 의자까지 메고 걷기도 한다. 제정신이 아닌 그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지만 남이야 전봇대로 이빨을 쑤셔도, 남이야 브래지어로 스카프를 하고 다녀도 상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글로벌 에티켓이다. 그들의 사생활이니까 간섭하고 싶지는 않지만 질문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텐트는 몇 번이나 썼느냐고 물었다. 그는 '매일'이라고 대답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야보고가 순례하면서 느낀 고통을 체험해 보고자 전구간을 노숙하고 다니는 순례자들이었다.
이 길을 타고 가는 인간들은 왜 고생을 사서 하는가? 질문의 자유를 행사하고 싶을 것이다. 생활에서 편리함을 추구했던 내가 고생을 자초하여 땀을 흘리며 순례길을 걷고 있는 이유를 대지 못하고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순례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산티아고의 조각상을 유심히 살펴보라. 얼마나 단출한 몸가짐인가! 그가 소지한 휴대품은 오로지 스틱, 물병으로 쓰는 표주박, 햇빛을 가리는 모자가 전부이다. 나는 큰 짐은 동키서비스에 배달을 시키고 자신은 산티아고의 동상처럼 순례하면서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순례길에서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져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도 나도 기력이 떨어진 상태라서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 아가씨가 배낭이 무거워 쩔쩔매는 것을 보았지만 배낭을 내가 옮겨주겠다는 제안을 할 처지가 아니라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건강한 남자를 물색하여 매달리라고 충고한다. 가끔씩 연약한 여성이 건강한 남성에게 짐의 일부를 부탁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국적이 다른 그들 커플은 순례길에서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한 달 후 순례가 끝나는 대로 연애도 끝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기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아내의 배낭도 배달을 의뢰하자고 말했지만 아내는 비용을 이유로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유여행으로 순례하는 사람은 자기 짐을 자기가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주입하려고 애를 써야 했다. 아내의 배낭이 어느 순간에 내 등으로 자리 잡을까 봐 봐 내 어깨가 불안에 떨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원한 동반자인 아내가 자기 배낭을 스스로 메고 가면서 낑낑대고 있는 모습을 지켜만 본다면 나는 조만간에 아내 학대 혐의로 고발당할 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내가 제삼자, 특히 연약하기 짝이 없는 미모인 여성의 배낭을 날라주는 페미니스적 배려심이 작동된다면 아내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몹시 궁금은 하지만 그런 발상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가정평화는 풍비박산이 날 것이 분명하다. 아내가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안쓰러운 외간 여자에게 내 신사도는 속절없다.
차라리 아내의 배낭을 내가 대신 메고 걷는 것이 한 달간 부부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지름길임을 굳게 믿고 아내의 배낭을 낚아챈다. 갸륵한 선행을 매일 베푼 나는 노벨부부평화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 없어 섭섭하기 짝이 없다.
군대 졸병시절 완전군장을 하고 10km 달리기로 전투력 평가를 받을 때를 생각하면 쓴 미소를 짓게 만든다. 소대장이 구령을 붙이고 소대원들은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마는~”로 이어지는 군가로 사기를 진작시키면서 조깅을 했다. 소대원의 평균 나이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병장이었던 나. 낙오자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조깅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자 낙오자들 한둘이 길거리에 주저앉거나 쓰러지고 만다. 아니 어떤 동료는 쓰러져 눈알이 하얗게 뒤집힌 병사도 있었다. 소대장은 그들이 꾀병을 하고 있다며 철모로 쓰러진 병사를 툭툭 치며 일으켜 세운다. 그들은 낙오자라는 낙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나는 낙오병의 군장배낭까지 둘러메고 대열에 합류했다. 그 순간 이후 나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S법대 입학할 실력이 안되어 그에 버금가는 K대에 입학원서를 냈더니 S법대가 미달될 때의 억울함과 같았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 순간의 영웅심이 나를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도 국가는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전우애를 타의 모범을 보였다고 나에게 연대장의 표창을 안겨 주었었다. 그 표창장은 망명정부의 화폐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알지 않았는가? 42년이 지난 지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7.5kg 무게의 배낭도 메고 걸어갈 자신이 없다. 내 짐을 내려놓으라고 해서 미련 없이 내려놓은 내가 어찌 남의 짐을 다시 올려놓을 수가 있겠는가?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몸이 아예 도리질을 하며 거부하고 있다.
순례자들은 배낭에서 물건들을 골라서 버리기가 쉽지가 않다. 순례기간 중에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착각 때문이다. 배낭의 내용물 중에서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건부터 버리는 후보 대상이 된다. 가장 비싸게 산 등산화가 무겁다는 이유로 제물이 된다. 호가 25만 원짜리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주인 없는 등산화가 되고 만다. 순례길에는 이정표 팻말 위에, 아니면 전깃줄 위에, 철조망에 등산화들이 매달려 있음을 발견하며 걷는다. 순례길에는 아예 무거운 짐은 가져가지 말고 필요하면 빌려서 쓰거나 빌릴 수 없으면 사서 쓰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대한민국순례자협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배낭에 넣을 물건리스트부터 배낭 싸기, 배낭 메는 법, 배낭끈 조절법까지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으므로 순례예정자들은 1독을 권한다. 순례길 ‘가이드 북’을 보면 순례자의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등산화, 배낭, 침낭, 의류, 스틱을 구체적으로 소개 설명하는 것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준비물 중에서 빠뜨린 것이 있다면 배낭의 방수 커버였다. 그걸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가 올 때 배낭 속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다. 비가 많이 올 때에는 김장용 비닐과 같은 조금 두꺼운 비닐이나 등산용품점에서 판매하는 드라이 색으로 내부를 감싸서 습기로부터 물건을 보호해야 한다. 또한 배낭 내부를 비닐이나 드라이 색으로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배낭의 외부를 방수 커버로 덮어야 안심할 수 있다. 때문에 순례자는 일기 예보에 민감해야 한다. 배낭이 비에 젖으면 배낭 자체의 무게가 늘어나 체력소모가 많아지므로 결과적으로 낭패를 당하기 때문이다.
배낭이 가벼울수록 걸을 때의 부담이 덜어지는 체험으로부터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미니멀라이즈 한 삶이 필요함을 느낀다면 나의 영적인 성장은 상당한 진척을 본 셈이다. 이게 다 무소유를 권했던 '법정스님' 덕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