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
15. 어머니의 버킷리스트

(제13일 차 / 부르고스~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by 소울메이트


15. 어머니의 평생소원



♧ 오늘의 코스


오늘(10.7)은 아침 8시 20분에 부르고스(Burgos) 숙소를 출발하여 ▷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Hornillos del Camino)까지 20.3km를 6시간 동안 3만 5천 보 가량을 걸었다. 평지길이지만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부르고스를 빠져나오는데 노란색 산티아고 화살표가 건물 속으로 사라져 나를 헤매게 만들었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느라고 1 시간 동안 피곤했다. 도시를 빠져나오자 길섶에 꽃과 잎사귀가 떨어져 뼈대만 남은 유채꽃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 꽃들이 만발하게 핀 봄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해 본다.


♧ 아니 이게 누구야?


세 개의 마을을 지나자 도로변에 소박한 카페가 나타났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순례길목에 있는 카페를 기웃거리다가 노천카페 소파에서 신발을 벗고 장딴지를 안마를 하고 있는 동양인 남자를 만났다. 그가 손짓을 하며 나를 불렀다.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13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기대는 사치였다.

나에게 아는 체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현직에 있을 때 알게 된 공무원의 한 명 중에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헛다리를 짚었다.


그에게 다가가서 “도움이 필요하세요?”하고 영어로 묻자 발에 물집이 생겨서 괴롭다면서 반창고 한 장만 얻을 수 있냐고 물었다. 동병상련이라고 그의 고충을 백% 이해했기 때문에 그의 상처를 돌봐줘야 할 상황 같았다. 혹시 배낭을 대신 메고 가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면 어쩌나? 봉사 정신으로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데 어쩌나?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나일론 예비신자라고 변명하면 면죄될까? 난처하다.


나는 무슨 핑계로 그의 부탁을 거절할 것인가부터 걱정하는 마음이 앞선다. 뾰쪽한 아이디어가 없다. 나이를 핑계 대며 나 내 배낭을 배달회사에 맡기고 걷는다는 점을 최대한 강조하는 동시에 도움을 줄 수 없어서 너무 유감이라고 말해야지. 실례를 무릎 쓰고 그의 나이를 물어보니 나보다 5살이나 어렸다.


그보다 다섯 살이나 많음에 꼰대 같은 우월감이 발동해서 사적인 최고급(?)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 내 나이를 까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실토하려는 속마음은 그의 희망을 접게 만들고 싶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완주를 하겠다는 각오로 그의 기를 꺾고 싶었다. 얼마나 가학적인 생각인가? 그 시점부터 하느님은 나를 최대한 미워할 것 같다.


그는 말한다.

"순례란 짐을 지고 가는 고통을 통해서 죄를 면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낭을 배달시키지 않고 어깨에 지고 가다 보니 힘이 달려 고통스럽다."

나는 우선 반창고를 넘겨주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다. 내 머리는 기억의 실마리를 찾으려 과거를 염탐한다.

백투터 퓨쳐!


그는 45년 전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훈련소 군악대 동료였다. 아니 나의 선임이었다. 그의 이름을 기억해서 그를 불렀다. 내 머리가 아직 빠가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가 경이로 빛이 반짝였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옹하며 “훈련소 군악대 만세!”를 큰소리로 외치며 하이 파이브를 외쳤다.

군대친구를 만나다

당시 그는 선임이랍시고 내게 까칠하게 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찌꺼기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군대 시절 분노는 스페인의 강렬한 햇빛에 녹은 눈처럼 사라져 버렸다.


최대의 복수는 ‘용서’라고 생각났다. 용서의 언덕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자고 다짐했던 내가 아닌가? 오래된 앙금을 씻어내고 악수를 하던 손을 흔들며 놓을 수 없었다. 애인처럼 포옹까지 하고 말았다. 옆에 있던 아내를 포함하여,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우리 두 사람의 흥분을 보고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이런 기막힌 만남도 다 있다면서 우리의 인연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다리에 생긴 물집 때문에 지금 당장 나와 보조를 같이 할 수 없으니 저녁에 만나 식사나 같이 하자며 우리 부부를 놓아준다.

숙소에 체크인을 마치고 방에 배낭을 찾아 놓았을 때 마침 그가 휴대폰으로 나를 불러냈다. 레스토랑으로 가서 저녁 식사와 한 잔의 술로 40여 년 만의 재회에 따른 화제는 넘쳐 났다.


그는 모 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최근에 퇴직했단다. 산티아고 길과의 인연은 매우 오래라고. 독일에서 유학을 할 때와 교환교수로 독일에 체류했을 때 산티아고를 걸었고 이번이 세 번째란다. 무엇이 그를 세 번씩이나 산티아고 순례길로 불렀을까? 젊은 시절에는 순례길을 걷는 게 즐거웠는데 지금은 솔직히 말해서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이렇게 지친 적은 처음이라며 나이를 탓하며 고통을 곱씹으며 옛날 얘기를 안주 삼았다. 지난 45년 이상의 세월을 소환해서 복기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군대시절 그와 내가 사귀던 여자 얘기 때문에 옆자리에 앉아 왕따가 된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의외로 반짝거렸다. 군대시절의 여자 친구에 대한 신상 털기가 양쪽에서 무한정 계속되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감추어 왔던 비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황이라서 이 기회에 나의 비밀을 한 건 하려고 벼르며 흥미진진한 얼굴로 나의 추억 되살리기에 무언으로 동참해 주었다.


나와 그는 그때 그 시절 군대로 뻔질나게 면회를 온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우리 둘의 화제가 과거의 여성편력을 까발림으로써 내 아내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저의를 간파한 모양이다. 아내는 연애 때 데이트에서 들었던 장황하기 짝이 없는 내가 해트트릭을 한 축구 허풍처럼 그렇고 그런 러브 스토리라서 흥미가 반감되는 눈치였다. 피곤 몸에 터져 나오는 하품을 말리지 못했다. 아내는 철부지 같이 들뜬 70 전후의 두 할아버지에게 낮은 목소리로 숙소로 돌아가자며 말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므로 남은 얘기는 앞으로 순례길을 걸으면서 하시지요!"


♧ 어머니의 평생소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기 직전에 나는 세례를 받기 위해서 가톨릭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내가 세례를 받으려 마음먹게 된 동기는 어머니의 평생소원에 휘말린 결과였다.


내 나이 70을 넘기고 보니 나를 키워서 공부를 시켜 준 92세의 부모님께 제대로 보답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정치인이었다면 대통령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내가 회사원이었다사장으로 출세하기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나의 1모 작은 너무 초라해서 어머니한테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70을 넘긴 이쯤에서 출세라는 희망을 내려놓을 나이가 되었다. '나'라는 존재는 소소통령도 못되고 회사에도 다니지 않았으니 사장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린 못난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 더 늙기 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효도 한번 거나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은혜를 입어 오늘의 내가 존재한 마당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때가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별다른 묘안이 생각나지 않아 어머니께 여쭤 보는 것이 막다른 골짜기에 이른 힘없는 효자가 취할 도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동안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소망을 제게 말씀하시면 그걸 이루어드리고 싶어요.”

어머니는 그 즉석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의외의 소망을 나에게 주문하셔서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역시 찬스에 능했다.


어머니를 보면 야보고의 어머니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야보고의 어머니인 '살로메'는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예수님의 헌신적인 추종자 중 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사역을 지원했다. 그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처형 현장에 있었던 여성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성이다. 그녀는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께 바쳐 열 두 제자로 생을 마감하게 하였다.


살로메는 아들들에게 어려서부터 많은 기대를 갖고 교육하였다. 두 아들이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을 때부터 살로메는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정도로 예수님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살로메는 예수님 앞에 무엇인가를 청할 양으로 엎드렸다.


예수께서는 그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뭐든지 말씀하세요."

"다른 게 아니고 주님께서 당신의 나라가 서면 제 두 아들을 꼭 기억해 주세요."

"......."

"주님의 나라가 들어서면 한 아들은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좋은 자리 청탁 한 셈이었다. 요새 말로 치맛바람이다. 그녀는 분명히 예수님이 언젠가 큰 권력을 잡아 세상을 통치할 큰 인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내심 흐뭇한 마음으로 가만히 서서 예수님의 반응을 기다렸다. 예수님은 고개를 돌려 두 형제에게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 어머니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아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은 서슴없이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똑똑히 대답했다.

예수님은 다시 두 사람에게 분명하게 이른다.

"너희도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내 아버지께서 정해주신다."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나를 중2 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보냈고, 대학원까지 공부를 시켜 박사로 만들었다.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하게 된 동기는 서울 친척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에 다니는 삼촌과 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한 집에서 함께 찌개며 살면 좋은 성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 어머니의 희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가톨릭 신자가 되라고요? 그건 너무 가혹한 주문이었다. 헌법 교과서를 한 번도 보지도 못한 어머니의 소망은 너무 일방적이었다. 나는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소환해서 고민했다. 일생동안 종교의 유혹(?)을 물리쳐 온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는 나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곧장 받아들이기에는 벅찬 주문이었다. 청년시절부터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존재하지만 죽었다는 명제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이 나이까지 종교를 멀리하면서 도덕적인 행동이 종교를 갖는 것보다 사랑을 실천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가 아닌가? 최근에 인류의 재앙으로 불리는 팬더믹 19를 맞이하여 지구촌 사람들은 종교의 무용론이나 해독을 피부로 느끼며 나는 종교는 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있는 내가 이 나이에 하느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느님을 믿고 안 믿는 것은 신이 내린 이른바 '자유의지'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요구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에게 가톨릭 세례를 받으라는 주문은 가톨릭 신자인 아내에게 쾌재를 불러일으켰다. 어머니의 간곡한 소망을 들어드리지 않는 다면 "불효자"가 될 것이라는 말로 나를 하느님의 밧줄로 질끈 동여매서 나를 천국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나의 평생 존재가치는 오직 마누라 말, 부인의 말,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내가 빛난다고 생각해 왔다. 그게 나의 생활 철학이었다. 그에 보태서 어머니 말씀까지 잘 듣는 다면 나는 여자 말을 잘 듣는 내가 되면서 나의 정체성은 길이 빛 나리라. 마음의 번뇌를 과감하게 정리하고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로 결심했다.


집 가까운 성당에서 세례 받기 위해 교리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전화로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는 매우 흡족해하셨다. 성당 친구들에게 아들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당신의 성당 친구들은 어떻게 하면 나이 70을 넘긴 아들을 하느님 앞으로 인도했느냐고 놀라워하고 부러워하더라고 기쁨을 전하며 나의 효행을 높이 사주었다. 성당 주임 신부님으로부터도 칭찬을 받았다고 좋아하시면서 입을 귀에 매달고 다니셨다.


성당마다 7월부터 교리 공부를 해서 새해에 세례를 받을 목적으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매주 한번 2시간씩 6개월 교육을 받아야 하는 모양인데 그 기간이 벌써 두 달이나 지난 상황이었다.


신부님께 내 사정을 말씀드리자 어머니의 뜻을 헤아리고 계시는 터라 거절은 못하시고 중도에 입학할 경우에는 독학(?)으로 그동안 놓친 학습을 보충해야 한다는 조건부로 가톨릭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가 생업인 나에게 교리 공부는 내게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문제는 교리들이 나의 전공인 학문에는 부합되지 않는 내용들이라서 굳어있는 머리를 개조하기가 쉽지 않았다. 늘그막에 진화론과 창조론과 불가지론의 소용돌이가 내 머리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려고 버팅겼다.


그래도 한 달간 열심히 다니며 가톨릭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인성을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재미도 없고 이성적이지도 않아서 속으로 어머니의 소원을 팽개치고 싶기도 했다. 열댓 명의 예비 신자들 중에 최고령자로 교리 공부를 했다.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날 배운 것을 어머니께 일일이 보고하며 어머니를 감동시켜 드리고 싶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같이 걷자는 제안을 했다. 신자도 아닌 내가, 교리 공부를 하고 있는 내가, 산티아고 순례를 떠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식한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 있는 것으로 알고 이 기회에 나의 버킷리스트의 하나인 남미여행을 떠나 볼까 하는 욕심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에게 일찍이 남미 여행을 백일 간이나 하고 왔으면서 또 남미 여행이냐고 핀잔을 주었더니 '산티아고 프랑스 순례길'은 프랑스의 '생장 피드 데 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총 800km를 33일간 순례한다는 원대한 계획이란다. 나는 아내로부터 '무식한 인간'으로 대접받아야 했다. 원래 내 취미 중 하나가 여행이기 때문에 어디든지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지만 팬더믹 19 이후 3년째 해외여행을 본의 아니게 중단하고 있던 터라 솔직히 말해서 교리공부보다는 자유여행에 마음이 끌렸다.


문제는 진행 중인 가톨릭 교리공부를 한 달 이상 중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두 달이나 늦게 시작한 교리 공부인 데다 산티아고 순례를 33일 이상 다녀오면 6개월이라는 학습기간의 반 이상을 건너뛰는 결과가 되기 때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듬해 1월 세례를 포기하고 내년에 다시 교리 공부를 처음부터 제대로 하겠다고 지도 신부님께 말씀드렸더니 한마디로 반대하였다.


내년 여름에 세례를 받으면 어머니 연세가 더 많아지기 때문에 너무 늦어져서 혹시라도 생전에 효도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와서 교리 공부를 계속해서 연말에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신부님은 산티아고를 완주한다면 그동안 교리공부를 건너뛴 부분을 순례로 대체하여 연초에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도 아직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지 못했다며 산티아고를 순례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학습과 신앙체험이 될 것이라며 순례를 떠나라고 적극 지지하셨다.


♣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왜 충돌하는가?


순례길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에미레이트 국적의 여성을 만나 함께 걷게 되었다. 히잡을 하고 다니는 그녀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단다. 그녀는 직장에서 일주일 동안 휴가를 받아 순례길을 걸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두바이와 마드리드를 오가는 항공회사의 스튜어디스로 일하며 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두바이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브르즈칼리파는 828미터, 163층이라는 사실과 그 건물을 우리나라 삼성물산이 주도적으로 건설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15 년 전에 아랍 에미레이트 두바이를 다녀온 경험을 화제로 삼았다. 그녀 직업이 스튜디스였기 때문에 고객인 나의 수다에 지치지 않는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2천 년대 초에 읽었던 두바이의 성공 신화의 주인공인 셰이크 무함마드 아랍에미레이트 연방 총리의 경영철학과 전략을 다룬 책인 『두바이 CEO의 창조경영』에서 얻은 지식을 밑천으로 그녀와 대화를 이끌었다. 자존감을 한껏 충전한 나는 그녀에게 스페인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의 진원을 물어 종교인들의 메마른 사랑을 지적했다.


그녀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로 알려진 기독교 세력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재정복 운동>은 종교적 교리의 차이에서 유발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 질문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를 알고 있는가를 되묻었더니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 설명을 이어갔다.


신의 본질에 대하여 기독교는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교리를 중심으로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믿는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절대적 일신론(타우히드)을 중심으로, 알라가 유일신이며 모든 존재의 창조자이자 지배자이고, 무함마드는 알라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최후의 예언자라고 믿고, 삼위일체를 거부한다고 했다.

성서에 대한 관점을 보면 기독교는 성경(구약과 신약)을 신의 말씀으로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원을 강조한다.

이슬람교는 코란을 신의 최종 계시로 믿는다. 이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고, 종말의 날에 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자는 구원을 받으며, 최후의 심판 날에 각 개인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두 종교는 의식도 다르게 나타나는데 기독교는 기도, 성찬식, 세례 등의 성례전을 중요시하는 반면에, 이슬람교는 신앙고백, 기도, 자선, 라마단 금식, 메카 순례를 신자의 주된 의무라고 여긴다. 이러한 교리 상 차이는 단순히 신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충돌로도 이어졌다.

순례길과 관련된 중세 스페인에서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전쟁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영토, 권력, 그리고 사회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내는 10여 년 전에 아랍지역에 배낭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란여행 때, 길에서 어떤 여인을 만나 집에서 묵었는데 너무 극진한 대접을 받고 나서 이슬람교과 아랍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내가 알고 싶었던 이슬람교의 교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쟁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명료했다. 이슬람교의 두 교파 간의 분쟁은 역사적, 신학적, 정치적 이유에서 발생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중동 및 그 외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가 632년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칼리프)를 둘러싼 의견 차이에서 분쟁이 시작되었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가 첫 번째 칼리프로 선출된 것을 지지했다. 반면에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정당한 후계자라고 믿었다.


시아파는 후계자가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니파는 이슬람교의 전통(순나)에 중점을 두며, 무함마드의 생활 방식과 가르침을 따른다. 이들은 무함마드의 동료들과 초기 칼리프(최고 종교권위자)들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가족, 특히 알리와 그의 후손들인 '이맘'들의 권위를 내세우며 ‘이맘’이 신의 명령을 받는 신성한 지도자라고 믿는다.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권력을 둘러싼 갈등은 종종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란(시아파)과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수니파) 간의 경쟁은 중동 지역의 여러 분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라크, 시리아, 예멘 등 여러 국가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은 정치적, 종파적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정부의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이 종파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중세 시대 이전에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한 이슬람교는 주로 수니파였다. 711년에 우마이야 왕조의 무슬림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하여 '알 안달루스'를 세웠다. 이 군대는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과 아랍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이슬람의 지도자로, 알 안달루스에서도 수니파 이슬람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 문화 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알 안달루스에서는 다양한 이슬람 교파와 종파들이 존재했지만, 수니파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화해 가능성을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어려운 과제일 수 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외교적 차원의 대답을 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많은 공통된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공통점을 바탕으로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할 것이다.”


♣ 신은 우리가 죄를 짓도록 방관하는가?


(삼성창업자 이병철의) 질문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는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차동엽 신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행동이나 생각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러한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은 죄다. 그럼 신은 왜 우리가 죄를 짓게 내버려 두는가?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기 때문이다(차동엽: 질문 7에 대한 대답).


김안제 교수는 인간은 소유욕과 경쟁의식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원초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어 있다. 신의 관여 없이 인간의 자유의지로 죄를 짓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김안제: 753).

이어령 교수는 부족한 인간이 마치 전능한 신처럼 지식과 지혜를 갖고 선악을 판단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원죄이다. 원죄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남을 심판하려고 한다. 다른 짐승들에게는 주지 않았어도 인간에게는 준 것.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지 못하게 물리적 장치를 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의 의지로 따먹지 말아라, 하고 말했을 뿐이다(이어령: 33-34).


성경에 의하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이나 이기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이 주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은 때때로 죄를 범하게 된다. 죄는 단순히 특정한 행동을 잘못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 있는 인간의 불완전함, 이기심,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을 포함한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손상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죄를 범하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성경의 입장이다.


인간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여, 그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와 일상의 삶에서 각 개인이 저지른 자범죄(自犯罪)가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 혹자는 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선악과를 따먹게 하였느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먹되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다(창세기 2장 17절). 이는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권한을 주시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의미로 선악과 금식 명령과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을 섬기면서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에서 선악과와 금식명령과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에 반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죽음과 심판이 오게 된 것이다(창세기 3장 5, 6절).


--계속--



Copyrightⓒ솔메이트 이주희 All rights reserved. 이 글의 무단전재는 금지하지만 공유는 가능합니다.


keyword
이전 14화『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 14. 스페인 3대 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