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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Oct 20. 2024

『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
14. 스페인 3대 대성당

           (제12일 차 / 아헤스~부르고스)


♧ 오늘의 코스


   오늘(10.5)은 아헤스(Ages)를 출발하여 ▷ 아타푸에르카(Atapuerca) ▷ 카르데누엘라(Cardenuela) ▷ 비아프라야(Villfria) ▷ 부르고스 신시가지(Cruce) ▷ 부르고스(Burgos)까지 총 25.8km를 7시간 동안 5만 5천 보 정도를 걸었다.      


  


♧ 땅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의 풍경


   새벽에 플래시를 켜고 순례길을 걸으면 길에 밤새 거미들이 쳐놓은 거미줄을 치우며 지나가야 한다. 청소부가 낙엽을 치우듯이 순례자 중에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 거미줄을 거둔다. 그들은 거미 입장에서 보면 무법자! 하지만 나는 무법자가 아니다.  내가 이 길을 가장 먼저 지나갈 위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거미가 밤새 지어놓은 그물망을 허물고 지나가면 내가 마름질을 하는 꼴이다. 거미의 생계의 터전을 인간이 박살을 내고 제 갈 길을 낄낄거리며 지나간다. 거미한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울퉁불퉁한 자갈길로 접어들자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  이동 도중에 등산 양말 한 켤레를 더 끼워 신었더니  발바닥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불편해서 신경이 쓰인다.  

   마을을 빠져나오니 순례길로 마중 나온 햇빛과 내 앞에 기다란 그림자가 나에게 줄곧 따라 오란다. 순례길 길목 좌우로 거세된 밀밭이 갈색의 거친 융단이 깔려 있다. 추수가 끝나 밀짚도 거두어 버렸기에 밑동만 남은 건조한 평원이다.

  갈색 밀밭을 초록색으로 색칠을 해 본다. 그 생각 자체가 환상적이다. 자연에 색을 입힌다는 사실이 건방지다.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서핑하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하늘은 구름 덕분에 더 푸르게 보이더니 이내 변덕을 부린 날씨 때문에 내 마음은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나, 어린 나이에 농사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천수답뿐인 우리 집 논들. 비 오는 날을 기다려 모를 심을 때 기껏해야 못줄을 잡는 정도로 농사일을 거들었지만 나로서는 힘들고 벅찼다. 아버지는 나에게 송아지 한 마리를 사주며 키워서 그 돈으로 공부하라고 당부하셨다. 봄여름가을에는 꼴을 베다가 소를 먹여야 했고, 겨울에는 볏짚으로 만든 여물로 쇠죽을 끊여 소를 키워야 했다. 소를 키워 학비를 벌어 진학하라고 했지만 소 때문에 초등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다. 아마도 우리 집에 논밭이 많았다면 나는 고향에 눌러앉아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살았으리라.  가난한 집에 태어난 덕분에 농사를 접고 중2 때 서울로 유학을 위한 전학을 왔기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말이 좋아 유학이지 배움을 즐길 수 없게 만든 것이 배고픔이었다. 도시의 삶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궁했지만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 보다야 훨씬 좋다고 위로했다. 키울 소도 없고 부모님의 간섭을 받지 않아서 자유롭게 지내는 대신 세끼 식사가 순조롭지 않았다. 배부른 자유가 그리웠고 배고픈 삶의 불행을 꿈에도 잊지 못했다. 배고픔을 잊으려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천을 헤매며 풀을 베어 나르던 시절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봄여름에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엄청 감탄시킨다는 나비들의 군무도 웬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새들도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어 새들의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새들의 먹이가 되는 곤충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창공을 선회하던 독수리인지 솔개인지 몰라도 새 한 마리가 땅바닥에 먹잇감을 멀리서 조준하고 있다.


  밀밭에 숨어서 밀을 구워 먹던 시절의 기억이 삼삼하다. 형아들을 따라 풀베러 가면 밀밭에 들어가 자기들은 화투를 치고 나는 망을 보며 풀을 베며 헛기침으로 신호를 보내 어른들에게 들키기 않게 방조범이 되었다. 형아들이 대마잎을 말아 피울 때 생기침을 하며 저항을 했던 나. 이제 스페인 들녘에서 고향이 그립고 형들이 보고 싶어 눈물짓는다. 악동들인 몇몇 형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여러 번이다. 하기사 벌써 60년 전의 추억이다.  스페인 벌판에다 고향의 추억을 펼쳐놓고 정지용의 시 “향수”를 한 토막을 떨리는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넓은 들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 집안의 농토는 왜 그렇게 좁게 주셨는지 하느님께 항의하고 싶었지만, 농토가 넓었다면 오늘의 나는 쌀값 걱정을 하면서 생애에 걸쳐서 몇 번쯤 광화문이나 서울역에서 데모하러 기차를 타고 상경했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가호를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워요 감사해요 하느님!

  이농이라는 결단을 내려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당시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는 친구들은 별로 없다. 몇 년 후에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동창회를 만들어 타향살이 설움과 고생을 토로하며 신기루 같은 희망을 찾아 참 열심히도 살았다.           


  아소프라와 시루에나로 가는 길 옆으로 골프클럽이 보였다. 작년 골프장에서 배수구 속으로 들어간 골프공을 손으로 꺼내려다 살모사에게 물려 한 달 이상을 고생했던 친구 생각이 난다. 순례길에서 후미진 곳을 찾아서 일을 볼 때면  살모사에게 물릴까 봐 긴장해서 일처리가 되대로 안된다.  

   오전의 들녘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갈색 들판을 바라보는 기분은 자꾸만 쓸쓸해진다. 대지에서 데워진 더운 바람만 가끔씩 지나가는 텅 빈 벌판에 우뚝 선 구조물이 보인다. 농부들이 만들어 놓은 큰 건물 같은  인공 구조물은 밀집 낟가리였다. 밀을 타작해서 남은 밀짚은 가축 사료나 마구간의 침구재로 유용하다. 퇴비나 멀칭(수분 유지를 위한 밭 덮개)으로도 쓰인다. 밀집으로는 공예품도 만든다. 순례자들은 벌판을 행진하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지형지물을 보는 순간 쾌재를 부른다. 이 낟가리는 순례자들이 바지를 내리고 큰일을 볼 때 수치심을 살며시 잠재워 주곤 한다.   


벌판에서 만나는 밀짚 낟가리


♧ 산 후안 오르떼가의 헌신적 봉사


   산 후안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는 중세 기독교 수도사이자 건축가인 성 후안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와 관련된 전설로 유명하다. 후안 오르데가는 11세기말에서 12세기 초 사이에 활동한 수도사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많은 순례자들을 돕는 일에 헌신했다. 그는 순례자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도로를 개설하고, 다리를 건설하며, 쉼터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은 산후안 오르데가냐 수도원(Monastery of San Juan de Ortega)의 건축으로 완성된다.

산 후안 데 오르떼가 수도원

전설에 따르면, 후안이 수도원 근처의 위험한 숲을 지나가던 중,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길을 잃고 곰의 공격을 받게 된다. 후안은 기도로써 그들을 도운 결과 곰을 물리쳐 순례자들을 구한다. 이 사건 이후로 성 후안은 순례자들 사이에서 보호자로 존경받게 되었다.




또한 후안은 성당의 건축을 감독하면서, 건축자재가 부족해지자 신의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신비롭게도 필요한 자재들이 기적적으로 나타나 성당을 완성할 수 있었다. 



♧ 일식당의 만찬 


  목적지인 부르고스를 가는 길이 공항 때문에 빙 둘러가라고 이정표는 말한다. 비행장이 우리의 순례를 방해하고 있다. 활주로 울타리를 돌아가느라고 거리가 엄청 멀어졌다. 순례 길목에서는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라는 부르고스에 외곽부터 차로와 순례길 코스가 겹쳐 있어서 교통사고의 위험이 따랐다. 순례길은 시내를 관통하고 있었고 우리가 예약한 숙소와 알베르게는 부르고스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부르고스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도시 중에서 부르고스가 가장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침 7시에 출발해서 14시에 숙소에 도착했으니 7시간 만에 이동한 셈이다. 예약한 아파트 숙소에 짐을 풀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한국 사람들 몇몇이 모여 회식을 하기로 했다. 회식 장소가 호스텔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심가에 있어서 찾아 가는데 부담이 되었다. 몸이 많이 지쳤기 때문에 레스토랑까지 택시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택시를 잡지 못해 30분을 더 걸어갔다. 다행히 33일 동안 탈 것을 한 번도 타지 않은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아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낸 일식 맛집으로 가면서 한국 순례자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벌써 한국의 청년 여행자들 7명에 일본인 대학생 1인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늦은 우리를 환영했다. 우리 부부가 최고 연장자였다. 어디를 가나 이 모양으로 대접을 받았기에 이제는 익숙해졌다. 각자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끝내고 국적 불명의 음식을 시켜서 나눠먹었다. 오랜만에 일본식당 냄새가 물씬나는 동양음식 맛은 여독을 푸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종일의 피로를 잊게 해 주었다. 좌중에 있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은 버스를 타고 레온까지 점프하겠다는 사람, 순례길을 이탈해서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나겠다는 사람도 서넛이나 되었다. 이제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캄포스텔라'까지 갈 사람은 나이가 가장 많은 우리 부부뿐이었다.  우리는 22.10.06 산티아고 순례 길 행진 12일 만에 걸은 도시 중에서 가장 큰 도시인 부르고스에서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다.


♧ 부르고스의 역사 


   부르고스는 중세 카스티아 레온 왕국의 수도였다. 카스티야-레온 왕국(Kingdom of Castile and León)은 스페인의 중세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왕국이다. 이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부와 중부 지역에 위치하며, 오늘날의 스페인 통일 과정에 큰 기여를 했다.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몇 차례 통합과 분리를 거쳐 하나의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우선 레온 왕국(Kingdom of León)은 910년경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분열되면서 형성되었다다. 레온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후계자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 중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로 알폰소 3세(Alfonso III)의 후계자들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다. 이들은 레콩키스타(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하는 과정)를 통해 남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레온은 중세 초기의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였으며, 특히 수도원과 성당을 중심으로 학문과 문화가 발달했다.


    한편, 카스티야 왕국(Kingdom of Castile)은 원래 레온 왕국의 속국(county)으로 이었지만  11세기에 독립적인 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카스티야는 점차 레온 왕국을 압도하게 되었고, 이베리아 반도의 가장 강력한 왕국 중 하나가 되었다. 카스티야도 레콩키스타에서 선두적인 역할을 하여 여러 이슬람 영토를 재정복했다. 특히, 알폰소 6세(Alfonso VI)와 같은 왕들은 톨레도와 같은 중요한 도시를 정복하여 카스티야의 힘을 확고히 했다. 카스티야는 스페인어(Castellano)의 기원지로서, 스페인어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기사도 문학과 서사시가 번성한 곳이기도 하다. 


  두 왕국은  1037년,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1세(Fernando I)가 레온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카스티야와 레온이 처음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 통합은 오래가지 못하고, 몇 차례 분리와 재통합이 반복되었다. 1230년 페르난도 3세(Fernando III) 통치 하에 두 왕국은 최종적으로 통합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레온과 카스티야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고, 그 후 레콩키스타를 적극 추진하여 안달루시아 지방을 정복했다.


   카스티야-레온 왕국은 이슬람 세력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92년,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스페인의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카스티야-레온은 스페인 왕국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카스티야-레온의 통합과 확장은 카스티야어(현재의 스페인어)의 확산을 촉진했다. 이후 스페인의 공식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스페인 제국의 확장과 함께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통일된 카스티야-레온 왕국은 중세 유럽에서 중요한 문화적, 정치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 지역은 고딕 건축, 중세 문학, 그리고 성당과 수도원 중심의 학문적 발전의 중심지로 알려졌다. 카스티야-레온 지역에는 아빌라(Ávila)와 같은 성곽 도시, 레온 대성당과 부르고스 대성당과 같은 걸작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2021년 현재 부르고스 인구는 약 17.5만 명으로 우리나라의 ‘구리시’보다 작은 도시이다. 세계 유산의 하나인 “부르고스 대성당(산타마리아 대성당)”을 속속들이 관광하기로 했다. 이 성당은 1221년 건설을 시작하였지만 완성되지 못하고 200년이 지난 이후 성당을 재건축 또는 확장해서 1567년에 완공되었다. 


♧ 부르고스 대성당 스케치


   산티아고 프랑스 순례 길 800Km에는 300여 개의 성당과 수도원 등이 존재하지만, 고딕양식의 부르고스 대성당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두 개 만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

부르고스 대성당(캐태드랄)의 면적은 1.03ha로 축구장의 약 1.5배나 되는 큰 성당이다. ‘부르고스 대성당’에는 17개의 경당과 여러 왕과 성인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드론으로 하늘에서 부르고스 대성당을 찍어 보면 여느 성당도 그렇듯이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에는 3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원래 동쪽에 있는 정문은 왕족과 일반인들이, 남문은 성직자들이, 북문은 왕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신분을 차별한 성당 구조물이었다. 순례자들은 5€ 티켓을 사서 남문을 통해 입당할 수 있다.

  

  편의상 제왕들처럼 북문을 통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투어 하기로 했다. 먼저 북문은 사도의 문 또는 왕관의 문(Puerta de la Coroneria)이라 부른다. 대성당의 북문은 광장에서 8미터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 북문을 통해서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황금 계단의 꼭대기로 이어졌다. 이는 왕이 출현에 위엄을 보여주자는 목적으로 설계된 것 같다. 19세기에 파리 오페라 극장 건축 때 황금계단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당초 산타마리아 성당이라고 불렀다. 산타 마리아에 관련된 기적과 전설을 나무로 조각하여 여기에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형상화하였다.

   성당본당 앞에는 이 지역출신 장군인 El Cid 부부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르고스 대 성당은 건축가의 노력으로 많은 유적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유명한 건축가 중에는 후안 데 콜로니아(Juan de Colonia)와 그의  아들 시몬(Simon)을 들 수 있다.


(좌) 대성당의 천정      (우) 대성당 내부 황금 계단

시몬은 탑들과 파사드의 외부 첨탑, 원수(元帥)의 경당, 성 안나 경당 등을 만들었고, 펠리페 데 보르고냐는 성가대석, 둥근 지붕, 수랑 교차점 위의 등탑(燈塔) 등을 만들었다.


   1567년에 건축가 후안 데 바예호(Juan de Vallejo)와 후안 데 카스타네다(Juan de Castaneda)가 천장에 별 장식을 한 둥근 지붕을 완공했을 때, 드디어 부르고스의 대성당은 중세시대의 걸작을 가장 많이 모아 놓은 곳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페예헤리아 문(Puerta della Pellejería, 1516), 장식용 창살과 성가대 의자, 헌정된 예배실의 창살(1519), 국왕의 경비대장의 경당 제단의 장식벽, 성 안나(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경당의 제단 장식벽, 수랑의 북쪽으로 뻗은 부분에 있는 계단 등이다.  이 대성당에는 알론소 데 카르타헤나(Alonso de Cartagena) 주교, 아쿠냐(Acuña) 주교, 후안 오르테가 데 벨라스코(Juan Ortega de Velasco) 대수도원장, 페드로 에르난데스 데 벨라스코(Pedro Hernández de Velasco) 원수(元帥)와 그의 아내 도냐 멘 시아 데 멘도사(Doña Mencia de Mendoza) 등이 경당 안에 안장되어 있다. 그 후에도 건축가들은 본당의 제단 장식벽, 산타 엔리케(Santa Enrique) 경당의 엔리케 데 페랄타(Enrique de Peralta)의 묘지, 성 테클라(Tecla) 경당, 18세기에 만들어진 성가대 뒷벽의 장식과 같은 수많은 예술품이 성당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 스페인의 이순신 장군, 엘시드


   에리시라는 영화는 찰톤 헤스톤과 로피아 로렌이 주인공을 맡은 전쟁영화이다. 히메나(소피아 로렌)를 사랑한 청년기사 로드리고(찰톤 헤스톤)는 카스티야 왕국의 귀족 성주의 아들인 로드리고는 핸섬하고 용감한 청년기사이다. 그는 국왕인 페르난도의 맏아들이자 왕위를 계승받을 산쵸와 죽마고우이다. 그는 고메즈 백작의 딸인 히메나와의 사랑을 꿈꾸지만, 고메즈 백작은 히메나를 왕의 사촌인 오도네즈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로드리고와 히메나의 사랑은 위기에 빠지며 우라카 공주의 음모로 추방당한다.

   로드리고가 모시던 페르난도 국왕이 전투에서 사망하자, 그의 호화로운 생활은 끝장이 난다. 이 틈을 타 사악하한 우라카 공주는 왕위계승자인 큰 오빠 산쵸를 몰아낼 음모를 꾸며 산쵸를 죽이고, 산쵸의 동생인 알폰소가 왕좌에 오르게 된다.

  그 무렵 로드리고는 전장에서 생포한 무어족 족장들을 스페인 국민이라는 이유로 석방시켜 주고 '엘시드‘라는 영웅칭호를 얻지만, 그는 정적에 의하여 반역죄로 몰린다.

                                                                       (우) 대성당의 내부에 있는 엘시드 부부의 무덤


  로드리고는 고메즈가 그의 딸인 히메나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자 결투과정에서 그를 죽인다. 국왕과 고메즈 백작이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그는 부와 명예는 물론이고,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인 왕위계승자 산쵸의 죽음과 사랑하는 여인 ’ 히메나‘까지 잃게 된다. 결국 그는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카스티야 왕국에서 추방당한다. 고향을 떠나 방황하던 로드리고는 자기를 따르는 몇몇의 친구들과 아랍왕자 알무타민의 도움을 받아 잃었던 영토를 되찾고, 사람들로부터 승리자란 칭송을 들으며 ’ 엘시드‘로 불린다. 그 여세를 몰아 새로운 왕의 적군이자 페닌슐라 공격을 선언한 밴 유서프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한다. 로드리고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승승장구하여 왕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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