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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Oct 24. 2024

『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
32. 이웃과 왜 싸우나?

    (제30일 차 / 뽀르또마린~팔라스 데 레이)


♧ 오늘의 코스


   오늘(10. 25) 코스는 포르토마린(Portomarin)을 출발하여 ▷ 곤사르(Gonzar) ▷ 오스피탈 데 라 크루스(Hospital de la Cruz) ▷ 에이렉세(Eirexe) ▷ 아 브레아(A Brea) ▷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까지 24.8km를 7시간 동안 4만 보를 걸었다.   

순례길은 오스피탈 데 라 크루스까지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2차선 차도의 좌우로 걸어가게 순례길이 나있는데 때때로 도로 옆 순례길이 없어지면 차도가 순례길을 대신해야 하기 때문에 안전에 신경을 써야 했다.

   


  ♧ 농촌의 괴로운 향기


   아침 9시에 숙소를 떠났다. 도중에 마드리드에서 수학여행을 온 고등학생 백여 명과 행진을 계속했다. 그들은 오세이브로에서 출발하여 콤포스텔라까지 130여 km를 걸으면서 중간중간에 역사적인 사건과 유적에 대한 설명을 자원봉사자로부터 들으며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스페인 젊은 청년들의 발랄함이 부럽다. 비가 오락가락하여 비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대 여섯 번 하다가 10km쯤부터는 날씨와 상관없이 비웃을 입고 행진하기로 했다. 


  반복되는 일상 같지만 오늘은 어제와 정말 다르다. 어제와 오늘의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에 어제와 오늘은 가는 길목도 다르다. 어제 만난 이웃은 오늘 만난 이웃과 다르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기에 사실상 모든 것이 다르다. 축제가 있는 마을, 비가 오는 날의 저녁, 코스가 합쳐지는 도시, 행사가 있는 마을은 다르다. 


함께 가면 바로 갈 수 있으므로 멀리 갈 수 있다. 나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과 함께 가리라. 순례길 좌우로 펼쳐지는 포도밭과 올리브는 수확을 남겨두고 있지만 벌써 수확을 끝낸 밀밭에서는 이듬해 농사를 위해서 트랙터로 시비(施肥)를 하고 있었다. 


목장의 축사에서 나온 거름을 밀밭에 펼쳐 깔고 있었기 때문에 악취가 심하게 났다. 순례자들은 하나같이 코를 막고 걷거나 마스크를 쓰고 걸어야 했다. 한 시간 이상을 순례길과 평야를 오염시키고 있던 “농촌의 향기”는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목장에서 날아온 썩은 분뇨 냄새는 한평생 동안 경험한 악취 중에서 최악이었다. 대학 때 데모하면서 경험했던 체류탄 세례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었다. 널따란 평야의 손금처럼 나있는 가리비 노랑길 표시만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모든 순례자들은 악취를 피할 길이 없다. 


발걸음을 최대한 빠르게 해서 냄새나는 구역을 탈출하려고 해도 광활한 지역에 지형지물이 없어서 악취의 확산을 방지할 수 없고 바람은 확산의 속도를 빠르게 했다. 내 마스크는 어디로 갔나? 코로나 대신에 농촌의 향기라도 차단하면서 제 의무를 다할 것이지.  


가는 길목의 공터에 만들어진 노천극장식 강의장에서 마드리드에서 수학여행을 온 고등학생들이 현장에서 역사 강의를 듣고 있는 모습이 제법 진지했다. 순례길에서 강도나 도둑이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쇠똥이나 악취가 무서운 공적이었다. 점심을 변변치 않게 먹고 20km가량 걷다 보니 허기가 졌다. 


이틀 전에 주워온 밤을 배낭에서 꺼내 까먹으며 걸었더니 허기와 피곤을 한결 잊게 했다. 오늘 목표 마을인 ‘팔라스 데 레이’ 숙소에 도착하기 직전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순례자 메뉴에 소고기 갈비와 샐러드 새우볶음 요리를 시켜 먹었다.


 ♧ 중세 순례자들의 병원  


  오스피탈 데라 크루스(Hospital de la Cruz)는 그 이름처럼 '십자가 병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옛날부터 순례자들이 질병이나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 머무르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방문한 순례자들 중 일부는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이곳의 성스러운 분위기와 순례자들 간의 연대감이 이러한 기적을 일으켰다고 믿게 했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순례자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성 야고보가 나타나 도움을 주거나, 마을 주민들을 통해 순례자들을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순례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며 성 야고보의 축복을 기원하였다.


  오스피탈 데라 크루스에 있는 십자가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만지거나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기적적인 경험을 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한 후 어려움에서 벗어나거나, 병이 낫는 등의 기적을 경험했다. 


  에이렉세를 지나는 순례자들 중 일부는 성 야고보의 환영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밤이나 이른 새벽에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성 야고보의 환영을 보고 용기와 희망을 얻기도 했으며,  순례자들에게 올바른 길을 안내하거나, 피로를 잊게 하는 힘을 주었다고 믿었다.  


이 마을에서 어려움에 처한 순례자들이 성 야고보에게 기도한 후 기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건강을 회복하는 경험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이 마을 근처에 신비로운 샘물이 있다. 이 샘물은 특별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며, 순례자들이 이 물을 마시거나 몸을 씻으면 피로와 질병이 치유된다는 전설이 있다.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는 산티아고 프랑스 순례길에 위치한 중요한 마을 중 하나로, 오랜 역사와 함께 대표적인 3개의 전설과 기적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첫째, 팔라스 데 레이의 이름은 "왕의 궁전"을 의미하며, 이곳에는 과거에 왕의 궁전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마을에는 갈리시아의 왕이 거주하던 화려한 궁전이 있었고, 이곳에서 많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둘째, 팔라스 데 레이를 지나는 순례자들 중 일부는 피로에 지쳤을 때 성 야고보가 나타나 그들에게 힘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셋째, 성 에우페미아는 순교자로, 환자들이 그녀의 이름으로 기도했을 때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많은 순례자들이 팔라스 데 레이를 지나며 성 에우페미아에게 기도하고 축복을 받으려고 했다.

 

♧ 수니파와 시아파의 정치적 갈등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유학 중이라는 청년에게 이슬람교의 교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에 대한 질문 했다.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이슬람교는 두 주요 교파인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는데, 이 두 교파 간의 분쟁은 역사적, 신학적, 정치적 이유에서 발생하며, 오늘날까지도 중동 및 그 외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가 632년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칼리프)를 둘러싼 의견 차이에서 분쟁이 시작되었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가 첫 번째 칼리프로 선출된 것을 지지했다. 


반면에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정당한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믿었다. 시아파는 후계자가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니파는 이슬람교의 전통(순나)에 중점을 두며, 무함마드의 생활 방식과 가르침을 따른다. 


  이들은 무함마드의 동료들과 초기 칼리프(최고 종교권위자)들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가족, 특히 알리와 그의 후손들인 이맘들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이맘’이 신의 명령을 받는 신성한 지도자라고 믿는다.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권력을 둘러싼 갈등은 종종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란(시아파)과 사우디아라비아(수니파) 간의 경쟁은 중동 지역의 여러 분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라크, 시리아, 예멘 등 여러 국가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은 정치적, 종파적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정부의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이 종파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중세 시대 이전, 711년에 우마이야 왕조의 무슬림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하여 알안달루스를 세웠다. 이 군대는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과 아랍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슬람의 주요 교파인 수니파에 속해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수니파 이슬람의 지도자로, 알안달루스에서도 수니파 이슬람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 문화 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알안달루스에서는 다양한 이슬람 교파와 종파들이 존재했지만, 수니파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화해 가능성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어려운 과제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 네 이웃을 사랑하라!"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많은 공통된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공통점을 바탕으로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할 것이다.” 


 ♣ 종교 및 가톨릭에 대한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질문:19,20,21.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가(예컨대, 폴란드 등 동유럽국가, 니카라과)가 되었는가? 


   천주교와 공산주의가 상극이라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두 이념 간의 근본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에 기인합니다. 천주교도가 많은 국가들이 공산국가가 되는 현상은 다음과 같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기인하고 있습니다. 


  첫째, 많은 동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을 받으며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가치나 전통이 무시되거나 억압당하면서, 천주교가 공식적으로는 탄압받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고, 국민의 정서에 깊게 뿌리내렸습니다.


   둘째, 천주교는 종종 공산당 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폴란드의 경우 교회는 반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며 국민의 단결을 이끌었습니다. 이는 공산당 정권의 압박 속에서도 교회가 사회적 연대감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셋째, 공산주의 정권은 종종 기존의 종교적 가치와 충돌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공산주의 체제의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통해 개선된 생활수준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부 국가에서는 천주교가 공산주의 체제 내에서 변화를 위한 도구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넷째. 천주교는 동유럽의 많은 국가에서 오랜 역사와 문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정치 체제가 변화하더라도 국민의 정체성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다섯째, 많은 국가에서 천주교는 완전한 공산주의 또는 자본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이념으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즉, 천주교의 교리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하며, 이는 공산주의 체제 내에서 신앙의 실천을 통해 구현될 수 있는 방식입니다.

   

   결국, 천주교와 공산주의의 관계는 단순한 대립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천주교도가 많은 국가들이 공산국가가 되는 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렇게 많은가? 


   한국에서 교회와 신자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사회 범죄와 시련이 많은 이유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 때문입니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신앙과 일상생활에서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교리나 가르침은 따르지만 실제로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둘째, 현대 사회의 경쟁과 스트레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경제적 압박, 직장 문제, 가족 갈등 등이 범죄와 시련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교육 시스템과 사회적 가치관이 변화하면서, 개인의 윤리적 기준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물질적 성공이나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넷째, 교회가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신자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 신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개인의 심리적 문제나 사회적 고립감도 범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지원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범죄와 시련이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1.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로마 교황의 결정이 "잘못이 없다"는 주장은 주로 교회의 교리적 신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사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황이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교리 문제에 대한 무 오류성을 가진다고 믿습니다. 이는 교황이 성령의 인도로 진리를 선포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믿음은 교황이 교회 교리를 해석하고 결정할 때 신의 뜻을 따른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둘째, 교황은 교회의 최종적인 권위자로 여겨지며, 교회의 일치와 신앙의 보존을 위해 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위는 역사적으로 확립된 것으로, 교황의 결정에 대해 신자들은 큰 신뢰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셋째, 교황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인들과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그의 결정은 개인의 생각이나 의견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신앙과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교황의 결정이 독선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다양한 절차가 존재합니다.


   넷째, 교황도 결국 사람이며, 모든 결정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교황은 인간적인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며, 그 과정에서 실수나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황의 결정이 영적 지도자로서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를 수용합니다.


   다섯째, 교황의 결정은 종종 시대적 상황과 문화적 맥락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교황의 판단이 항상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신자들은 그 결정이 교회의 전통과 일치한다고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로마 교황의 결정에 잘못이 없다는 주장은 신앙의 영역에서 교회의 가르침과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교황의 역할은 신자들의 영적 인도를 위해 주어진 권위로 이해됩니다. 



#$@  이 글은 “33. 문어와 가리비로 허기를 채우다.” https://brunch.co.kr/@96e291d8614c4ec/87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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