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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Oct 24. 2024

『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
33. 문어를 술안주로

  (제31일 차 / 팔라스 데 레이 ~ 아르수아)

 

♧ 오늘의 코스

 

오늘(10.26) 코스는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를 출발하여 ▷ 레보레이로(Leboreiro) ▷ 멜리데(Melide) ▷ 보엔테(Boente) ▷ 리바디소(Ribadiso) ▷ 아르수아(Arzua)까지 총 29.4km를 7시간 동안 4만 5천 보를 걸었다. 팔라스 데 레이에서 멜리데까지는 평지인 아스팔트 위를 많이 걸었다. N-547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터널을 지나가기도 했다. 보엔테까지 구간은 숲길이라서 어렵지는 않았다. 출발지로부터 26km쯤에서 만나는 리바디스에서 아르수아까지 약 3km가 오르막길이라 약간 힘이 들었다.     


♧ 갈리시아의 음식으로


 오늘은 마지막으로 약 30km 가까이 걸어야 하기 때문에 새벽 6시에 출발했다. 주변이 칠흑 같아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아내가 겁을 먹고 일행을 만들어 걷자고 제안했다. 동행자를 찾기 위해 걸음을 잠깐 멈추고 뒤를 돌아봐도 다가오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빨리해서 앞서 가는 불빛을 따라잡았다. 두 명의 외국 여자 순례자와 겨우 합류했다. 서로 안도하는 마음으로 걸어 다행이었다. 어제 내린 비가 만든 물웅덩이에 두 발이 빠지고 말았다. 나뿐이 아니라 다른 순례자들도 물에 빠져 서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신발을 벗고 양말을 짜서 다시 신어야 했다.


여섯 시간 이상을 젖은 신발로 걸어야 하는 신세가 안타깝기 짝이 없다. 곳곳에 유칼립투스 나무 숲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적벽대전을 앞둔 병사들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 채로 비를 맞으며 의연하게 서 있었다. 평지가 나오면 마을이 보이고 마을에는 곳곳에 전통 곡식 창고인 오로로가 보인다. 


멜리데에서 매콤한 뿔뽀(문어) 요리로 점심 식사를 했다. 집에서는 제사 때 마른 문어만 구경하다가 스페인 순례길에 와서 문어 요리를 몇 번이나 사 먹었는지 모른다. 살아 있는 사람은 생물을, 죽은 사람은 마른 문어를 먹는가? 내일은 고등어구이를 먹고 싶다.          


늦은 오후에 아르수아에 도착했다. 여기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프랑스 길과 스페인 북쪽길이 합류하는 지점이라서 순례자들이 많이 늘어나 길거리의 밀도가 조밀해졌다. 북쪽 길을 걸었다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디아고 출신 남자와 샌디아고를 하루 머무른 추억을 소환하여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북쪽 길이 프랑스길보다는 더 멀고(+30km) 더 힘들다는데 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존경스럽고 궁금하다. 그들은 프랑스 길을 걸은 경험으로 북쪽 길을 택해 걸은 사람들이다. 한국의 지인도 북쪽 길을 걸고 왔으니 나도 언젠가는 북쪽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쪽 정보를 주섬주섬 뇌리에 입력해 둔다. 

                    



♧ 조그만 마을에 깃든 자비 


  레보레이로(Leboreiro)마을을 지나는 순례자들 중 일부는 성 야고보가 이 마을에 나타나 기적을 보여 주었다. 순례자들이 길을 잃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성 야고보가 나타나 그들에게 올바른 길을 안내하고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Iglesia de Santa María)는 순례자들에게 특별한  영적 경험을 제공하는 곳으로, 기적의 샘물의 전설이 있다. 


  멜리데(Melide) 마을에 한 때 마을에 가뭄이 들었을 때, 주민들은 성 로렌조에게 비를 기원하며 기도를 올렸다. 그들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마을에는 성 토르퀴아토(San Torcuato) 교회에 그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 


그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로, 그의 유해는 이 지역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이 성인의 유해가 멜리데에 도착한 후 많은 병자들이 치유되고,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 마을에 있는 성 십자가(Santa Cruz) 교회는 중세 시대에 십자가를 경배하던 사람들이 많은 축복과 치유를 받았다고 한다. 


  보엔테(Boente) 마을에는 성 요한 세례자(St. John the Baptist)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의 성수는 기적적인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중세 시대에 이 마을은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도둑들에게 습격을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마을 주민들이 이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주었다.  


리바디소(Ribadiso) 마을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었는데, 이 병원은 산 니콜라스(San Nicolás)에게 헌정되었으며, 병원에서 일하던 수도사들이 기적적인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작은 샘이 있었는데, 이 성수는 특별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을 흐르는 작은 강은 마을 사람들과 순례자들에게 중요한 자원이었으며, 강에는 수호신이 있다고 믿었다. 

  

  아르수아(Arzúa) 마을에는 성 베드로(St. Peter)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는 중세 시대에 지어진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이 교회에서 기도하던 한 순례자가 기적적으로 병을 치유받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의 산타 마리아(Santa María) 교회는 순례자들에게 영적인 위안을 주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한 순례자가 이 교회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중 성모 마리아의 현현을 보았고, 그녀의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치즈로도 유명하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농부들이 가뭄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마을의 성인에게 치즈를 바치며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 후로 풍요로운 비가 내려 농작물이 잘 자라고, 그 해 생산된 치즈는 특히 맛있고 풍부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아르수아 치즈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순례자들에게 특별한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 산티아고 순례길의 전설과 기적의 특징


   산티아고 프랑스길(Camino Francés)에 있는 교회나 마을에 관련된 전설과 기적들은 영적, 역사적, 문화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주로 순례자들이 물부족, 음식부족, 질병, 건강문제로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 때 신성한 존재가 나타나서 이를 해결해 주는 해피엔딩이 대부분이다. 


악한 자를 벌주는 전설이나 기적이 전해 오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종교를 홍보하려면 권선징악적 전설도 있어야 할 것이나 그 문제는 사후의 영역이라 사례가 없는 것 같다. 여기서는 그 결과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유형을 몇 가지로 나눌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성 야고보(Saint James)가 나타나 순례자들은 길을 잃었을 때 성 야고보가 나타나 올바른 길을 안내해 주거나, 순례자들의 건강 문제나 피로로 어려움을 겪을 때 성 야고보의 은혜를 입었다는 기적적인 전설을 포함한다.  둘째로는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순례자들을 보호하거나 은총을 베푸는 기적 같은 전설들이다.  


셋째, 특정한 장소, 샘물, 성수, 십자가 등을 통해 병을 기적적으로 치유하거나 희망을 완성하여 신앙의 힘과 신성한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전설들이다. 넷째,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빛이나 발광 현상이 순례자들을 인도하거나 보호하는 전설들이 있다.  


이는 하느님이나 신의 존재를 가정한 것이다. 다섯째, 동물이 기적적으로 순례자들을 돕거나 인도하는 등 자연 속에서 신의 현현을 보여주는 전설이 있다.  여섯째, 교회의 건축 과정에서 발생한 기적적인 사건들이나, 특정 성인이 교회를 축복한 전설들이다.  


일곱째는 마을 주민들이 순례자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순례자들이 마을에서 신비한 도움을 받는 이야기들로 순례길의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전설들도 있다. 여덟째, 순례자들이 각 마을에서 성인이나 천사, 또는 신성한 힘의 보호를 받아 회생하는 전설들이 있다. 


 이러한 주제들과 내용은 “뻔한 거짓말”이라고 폄훼한다면 성직자들은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순례길을 걷는 나약한 순례자들은 자기 보호를 위하여 최면을 걸어 절대자에게 안전망을 의지하거나, 고통을 낫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산티아고 프랑스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다양한 종교적 영적 경험과 교훈을 제공한다. 

이들 전설이나 기적들은 순례길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며, 순례자들이 길을 걷는 동안 느끼는 신앙과 희망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하였을 것이다. 


♣ 종교 및 가톨릭에 대한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질문: 22,23,24.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데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데 왜 독신인가?

 

   신부는 신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독신 생활은 그들이 신앙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여겨지며, 교회와 신자들을 위한 봉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합니다. 신부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한 것으로, 그가 결혼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예를 따른 결정입니다. 


   신부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 성체성사와 같은 신성한 의식을 집행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 독신을 선택합니다. 독신 생활은 신부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더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신자들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신부는 결혼과 가족의 책임이 없으므로, 신자들을 더욱 잘 돌볼 수 있습니다.


   수녀도 하나님과 교회에 헌신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독신 생활은 그들이 기도와 봉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며,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을 실천하는 데 전념할 수 있게 합니다. 많은 수녀들은 교육, 의료, 자선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에 봉사합니다. 독신 생활은 이러한 사도적 삶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자율성을 제공합니다.


   수녀들은 "하느님과의 결혼"을 통해 영적으로 헌신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두며, 세속적인 관계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신부와 수녀의 독신 생활은 그들의 신앙적 헌신과 사명의 일환으로 이해됩니다. 독신은 개인적인 선택이자 신앙적인 소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유지하고,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하고,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천주교 내에서 일부 단체나 신념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비판하고, 기업주와 근로자 간의 불공정한 관계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집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회 교리를 통해 사회적 정의, 인권,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다룹니다. 이 교리는 신자들이 사회에서 정의롭고 윤리적인 행동을 하도록 권장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합니다.


   일부 단체나 신자들은 자본주의가 근로자를 착취하는 구조로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기업주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근로자의 노동력을 불공정하게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기업이 부를 축적하는 반면, 근로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일부 가톨릭 단체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모델을 지지합니다. 이들은 근로자와 기업주가 더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구조를 갖게 하며, 공동체의 이익을 강조합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경쟁과 이윤 추구가 과도하게 강조될 경우,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연대가 훼손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단체들은 자본주의의 미덕과 체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가 야기하는 부작용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사회적 연대와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기업주와 근로자 간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교리는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천주교 내 일부 단체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근로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경제적 불평등 문제와 사회적 정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가 직면한 도전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지구의 종말에 대한 질문은 여러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으며, 과학적, 철학적, 종교적 맥락에서 다양한 논의가 존재합니다. 특히, 종교적 맥락에서 여러 종교에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교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종말의 날(종말론적 사건)과 재림을 통해 인류가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종말이 곧 파괴가 아니라, 궁극적인 회복과 구원을 가져오는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는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지구의 종말에 대한 질문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복잡한 주제입니다. 


   과학적으로는 먼 미래의 예측으로, 철학적으로는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종교적으로는 신앙의 교리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환경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종말론적인 논의와 함께 인류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길이 될 것입니다.



#$@  이 글은 “34. 지혜의 벽에서 인문학을 묻는다.” https://brunch.co.kr/@96e291d8614c4ec/88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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