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일 차 / 팔라스 데 레이 ~ 아르수아)
오늘(10.26) 코스는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를 출발하여▷ 아르수아(Arzua)까지 총 29.4km를 7시간 동안 4만 5천 보를 걸었다. 팔라스 데 레이에서 멜리데까지는 평지에 아스팔트 길이 많았다. N-547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터널을 지나가기도 했다. 보엔테까지 구간은 숲길이라서 어렵지는 않았다. 출발지로부터 26km쯤에서 만나는 리바디스에서 아르수아까지 약 3km가 오르막길이라 약간 힘이 들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약 30km 가까이 걸어야 하기 때문에 새벽 6시에 출발했다. 주변이 칠흑 같아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안전이 걱정되었다. 이에 아내가 겁을 먹고 일행을 만들어 걷자고 말했다. 동행자를 찾기 위해 걸음을 잠깐 멈추고 뒤를 돌아봐도 다가오는 불빛이 보이지 않아 걸음을 빨리해서 앞서 가는 불빛을 겨우 따라잡았다. 두 명의 외국 여자 순례자와 겨우 합류했다. 서로 안도하는 마음으로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제 내린 비가 만든 물 웅덩이에 두 발이 빠지고 말았다. 나뿐이 아니라 다른 순례자들도 물에 빠져 서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신발과 양말을 벗어 물기를 짜내고 다시 신고 걸었다.
여명이 어둠을 걷어내자 밝은 아침부터 내 몰골이 초라하다. 여섯 시간 이상을 젖은 신발로 걸어야 하는 신세가 안타깝기 짝이 없다. 곳곳에 유칼립투스 나무 숲이 연속적으로 나타나 새롭다. 그들은 적벽대전을 앞둔 병사들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 채로 비를 맞으며 숲을 지키느라고 버티고 서있다. 아니 대영제국의 궁궐을 지키는 다수의 근위병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대로 서있다. 숲을 지나면 마을이 보이고, 마을이 지나면 다시 숲이 나타났다. 지나는 마을 집집마다 전통적인 곡식 창고라는 '오레오'가 자주 보였다. 옛날 시골에서 보는 볏짚단을 쌓아놓은 모습이지만 그것들은 나무 기둥과 벽면으로 되어 있다느 점이 달랐다.
멜리데에서 매콤한 뿔뽀(문어) 요리로 점심 식사를 했다. 집에서는 제사 때 마른 문어만 구경하다가 스페인 순례길에 와서 문어 요리를 실컷 사 먹었던 문어로 오늘도 요기를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생선을, 죽은 사람만 문어를 먹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그게 아닌가 보다. 그리고 수프로 나오는 국물인 <갈리시아 칼도(Caldo Gallego) >는 우리나라 시래기 국과 같아서 맛있게 먹었다.
늦은 오후에 '아르수아'에 도착했다. 여기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프랑스 길과 스페인 북쪽길이 합류하는 지점이라서 순례자들이 많이 늘어나 길거리가 제법 복작댔다. 스페인 북쪽 길을 걸었다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디아고 출신 남자와 샌디아고를 하루 동안 머무른 짧은 추억을 자랑스럽게 소환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북쪽 길이 프랑스길보다는 30km나 멀어서 힘들다는데 그들은 그 길을 걸어왔단다. 나보다 지독한 사람들이 많아서 놀랍고 약간은 얹잖다. 그들은 과거에 프랑스 길을 걸은 경험으로 북쪽 길을 택해 걸어와 우리와 합류한 순례자들이다. 그들은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해변의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제주도 올레길을 생각나게 했다. 나도 언젠가는 북쪽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쪽 정보를 주섬주섬 뇌리에 입력하며 대화를 나누며 걷는다.
술리안 도 카미노(San Xulián do Camino)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술리안 성당'이 있다. 이 마을 주민인 술리안은 예언자로부터 사슴을 추적하다가 부모를 죽일 것이라는 경고를 듣는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부모를 떠나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간다. 자식을 그리워하던 그의 부모는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오랜 여행에 피곤했을 부모에게 술리안의 아내는 자신의 잠자리를 내어주었다.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온 술리안은 자신의 부모가 자고 있는 사실을 모른 채 침대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는 순간에 아내와 아내의 정부가 누워 있는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두 사람을 살해하고 만다.
아내가 돌아와 보니 술리안이 부모를 살해한 사실을 알게 된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크게 놀란 술리안 부부는 이 죄를 씻기 위해 로마까지 순례를 하고 돌아와 두 사람은 가난한 여행자들을 위한 순례자 숙소를 열고 그들을 위해 평생 봉사했다. 마침내 천사가 찾아와서 그들에게 주님의 용서를 베풀고, 그를 선원, 여관 주인, 서커스 단원들의 수호성인으로 지명했다(홍사영:256-257).
레보레이로(Leboreiro) 마을을 지나는 순례자들 중 일부는 성 야고보가 이 마을에 나타나 기적을 보여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순례자들이 길을 잃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성 야고보가 나타나 그들에게 올바른 길을 안내하고 용기를 주었다.
멜리데(Melide) 마을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주민들은 '성 로렌조'에게 비를 기원하며 기도를 올렸다.
그들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로, 그의 유해는 이 지역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이 성인의 유해가 멜리데에 도착한 후 많은 병자들이 치유되고,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보엔테(Boente) 마을에는 성 요한 세례자(St. John the Baptist)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의 성수는 기적 같은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중세 시대에 이 마을은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도둑들에게 습격을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마을 주민들이 이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주었다. 리바디소(Ribadiso) 마을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었는데, 이 병원은 산 니콜라스(San Nicolás)에게 헌정되었으며, 병원에서 일하던 수도사들이 기적적인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수아(Arzúa) 마을에는 성 베드로(St. Peter)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에서 기도하던 한 순례자가 기적적으로 병을 치유받았다는 전설도 있다고 책에 씌여 있다.
산티아고 프랑스길(Camino Francés)에 있는 교회나 마을에 관련된 전설과 기적들은 1) 순례자 보호 또는 인도 2) 치유 또는 안전 기원 3) 기적의 샘이나 우물 4) 마을 수호자 5) 헌당 등과 같은 실체를 형성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순례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적이나 전설을 형성하여 기독교 신앙 전파에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게 되는 것 같다.
첫째, 성 야고보(Saint James)가 나타나 순례자들은 길을 잃었을 때 성 야고보가 나타나 올바른 길을 안내해 주거나, 순례자들의 건강 문제나 피로로 어려움을 겪을 때 성 야고보의 은혜를 입었다고 믿는다.
둘째,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순례자들을 보호하거나 은총을 베푸는 기적을 보여준다. 개신교와는 달리 천주교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더 추앙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을마다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성당이나 유적에 연관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셋째, 특정한 장소, 샘물, 성수, 십자가 등을 통해 목마름의 해결,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제공 병을 기적적으로 치유, 소망을 완성하여 신앙의 힘과 신성한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전설도 꽤 있다. 예컨대,
넷째,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빛이나 발광 현상이 순례자들을 인도하거나 보호하는 전설들이 있다. 이는 하느님이나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데 기여를 한다. 예컨대,
다섯째, 동물이 순례자들을 기적적으로 돕거나 인도하는 등 자연 속에서 신의 현현을 보여주는 전설이 있다. 예컨대,
여섯째, 교회의 건축 과정에서 발생한 기적적인 사건들이나, 특정 성인이 교회를 축복한 전설들이다. 예컨대,
일곱째는 마을 주민들이 순례자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순례자들이 마을에서 신비한 도움을 받는 이야기들로 순례길의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전설들도 있다.
여덟째, 순례자들이 각 마을에서 성인이나 천사, 또는 신성한 힘의 보호를 받아 회생하는 전설들이 있다. 예컨대,
이러한 전설을 “뻔한 거짓말”이라고 폄훼한다면 성직자들이나 교인들은 화를 낼 것이다. 순례길을 걷는 나약한 순례자들은 자기 보호를 위하여 최면을 걸어 절대자의 안전망에 의지하거나, 고통을 낫게 해달라고 호소했을 것이다.
산티아고 프랑스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다양한 종교적 영험을 느끼게 한다. 이들 전설이나 기적들은 순례길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하며, 순례자들이 순례길을 걷는 동안 느끼는 신앙과 희망을 도모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질문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차동엽 신부는 자기가 죽는 날이 종말이라고 본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종말의 시점)가 있을 거라 한다. 지구의 수명이 다하는 날이 올 테니까. 성경에는 종말이 있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 종말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 파국만은 아니다. 구원을 위한 최종 추확(秋檴)의 시간으로도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말을 기대하는 사람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 신앙인의 특권은 종말을 희망 사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종교는 결국 종말 너머를 향하기 때문이다(질문 24에 대한 답변, 차동엽: 317-329).
김안제 교수는 종말을 과학적으로 예고했다. 자연의 진화로 볼 때 태양의 에너지가 다 소멸되면 지구의 생명체는 모두 사라지고 지구는 하나의 암석체가 되고 만다. 약 40 억년 후의 일이다. 그리고 큰 유성이 지구와 충돌하거나 핵전쟁이 일어날 때, 또는 온난화로 지구표면이 물바다가 될 때 생물의 종말은 온다. 그러나 신이 있다면 자기가 어렵게 만든 지구와 그 생물을 완전히 소멸시킬 리는 없다고 판단하여 종말론을 부인하였다(김안제: 756).
이어령 교수는 세상의 종말을 엔트로피 법칙, 즉 모든 게 무너지고 식어가는 모습으로 설명했다. 마치 지구가 '식어가는 거대한 냄비' 같다고 비유했다. 거기서 '생명'만은 질서를 만들고 다시 활활 타오르는 '역 엔트로피' 현상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작은 씨앗이 엄청난 열매를 맺고, 풀이 돋아나는 것처럼, 우리는 소멸이 아니라 생명의 강한 역동성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말로는 신의 섭리를 다 표현하기 어려워서 예수님처럼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결국, 황금 지팡이보다 모두가 사랑으로 함께하는 세상을 만드는 '사랑의 기적 지팡이'를 꿈꾼다(이어령:57-59).
지구의 종말에 대한 질문은 과학적, 철학적, 종교적 맥락에서 다양한 논의가 존재한다. 특히, 종교적 맥락에서 여러 종교에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교리가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종말의 날(종말론적 사건)과 재림을 통해 인류가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종말이 곧 파괴가 아니라, 궁극적인 회복과 구원을 가져오는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여긴다. 지구의 종말에 대한 질문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복잡한 주제이다.
과학적으로는 먼 미래의 예측으로, 철학적으로는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종교적으로는 신앙의 교리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처한 환경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은 종말론적인 논의와 함께 인류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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