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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 Mar 03. 2024

한국 가는 일기

한국을 2년 반만에 방문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왔던 게 21년 8월이었으니, 한국의 겨울은 4년만인 셈이었다. 무엇보다도 판데믹이 마무리된 한국은 처음이었다.

지난 가을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가족들을 눈물로 배웅하며 이번 겨울엔 꼭 한국에 다녀와야겠다는 다짐이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세 달 전에 비행기 티켓을 끊고, 독일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잠깐 멈출 수 있도록 준비했다. 논문이야 마라톤 같은 장기 프로젝트니 한국에 가서도 준비해 보기로 하고, 다른 자잘한 일들은 최대한 준비해서 시간 맞춰 시작 버튼만 누르면 될 정도로 인수인계해 주고 왔다. 살고 있는 집도 쯔비쉔이라는 이름으로 잠깐 내놓았다. 비행기 타기 일주일 전에야 부랴부랴 기념품들을 사러 다녔다. 겨울잠을 자러 가는 곰마냥 캐리어에 크고 작은 선물들을 우겨 넣고, 출발 직전까지 짐 챙기고 청소하다가 새벽에 택시 타고 공항으로 갔다. 새벽 택시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은 채 고요했다.

새벽 비행기 티켓팅을 하면서 제일 걱정되던 건 공항까지의 교통편도, 체력도 아니라... 공항의 치안이었다. 이미 함부르크에 처음 도착했을 때, 밤 10시 즈음 여기저기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 있었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함부르크 공항은 내가 보기에 큰 공항이 아니고, 무엇보다 주택가에 위치했단 이유로 0시부터 6시의 비행이 불가하다. 따라서 내가 타야 하는 6시 25분 출발 비행편이 그날의 서너번 째 비행 정도 된다. 그렇다는 것은... 공항 문이 잠겨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미리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 3시 40분 쯤 공항에 도착했을까. 공항 입구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공항의 자동문은 덧문으로 잠겨져 있었고, 공항 내부엔 최소한의 등만 켜져 있었다. 1월 말이었지만 한층 추위가 누그러진 때였고, 두번째 항공편이 야간 비행이라 든든히 입고온 덕분에 춥지는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두꺼운 겉옷이 없거나 등산복 같은 옷만 걸친 사람들이 많아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십 분쯤 지나니 공항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4시가 조금 되기 전 문이 열렸다.

아침 비행기는 대부분 가까운 다른 유럽 도시로 가는 항공편이었다. 공항을 둘러 보니 생각보단 많은 사람들이 공항을 돌아다녔다. 캡모자를 눌러 쓰고, 목도리도 두르며 옷을 든든히 입고, 양손에 캐리어를 하나 씩 끌며, 어깨엔 에코백까지 멘... 마치 짐으로 중무장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째깐한 아시안이 23kg, 12kg 꽉꽉 채운 캐리어를 끌고 다니니 스스로가 봐도 좀 눈길이 갈 법하다 싶었다. 너희는 휴가를 즐기러, 출장을 가러, 하다못해 고향집에 가는 길이어도 가볍겠구나. 새삼스레 내가 집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 물리적 거리가 주는 무게감이 제법 상당했다.

이제 여권마저도 한국에서 가져온 건 수명을 다했다. 함부르크 총영사관을 통해 발급받은 여권으로 티켓 발권을 마치고 잠깐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함부르크 공항 면세점은 규모도 작거니와 기념품은 이미 충분히 샀기에 천천히 들어갈 셈이었다. 큰 캐리어를 부치고 나니 조금 여유가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작은 캐리어에서 각종 전자기기들과 액체류가 든 지퍼백을 꺼내 에코백에 옮겨 담고 보안 검색대로 향했다. 보안 검색대에 티켓을 찍으니 그제서야 어딘가로 떠나는 중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날 보더니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을 하는 직원에 지시에 따라 짐을 차례대로 올려 두었다. 코트에 경량패딩까지 벗으라고 했는데, 신발은 신게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검색대를 지나 짐을 기다리는데... 캐리어가 보안 검색에 걸려버렸다?

그 캐리어 안에는 한국에 다시 가져다 둘 짐과 뜨개용품, 간식이 들어 있었다. 뭐가 걸려도 뺏기면 곤란한 것들이라 프로걱정러는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캐리어 내용물을 소명하러 갔다. 비행기 뜨개를 위해 새로 산 숏팁 (약 50유로) 세트도 있었어서 정말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갔더니, 직원 분께서 지퍼백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계셨다. 그 지퍼백에는 자주 들고 다니는 백팩에서 꺼낸 잡동사니들을 그대로 옮겨 담았는데, 그 중에 안티스트레스 혹은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장난감이 하나 들어 있었다. 갑자기 너무 불안하거나, 졸리거나, 심심할 때 손에서 굴릴 수 있는 장난감이었다. 포르투갈 갔을 때 ALEHOP 에서 팔길래 5유로를 주고 산... 직원 두 분이 궁금한 표정으로 한참 둘러보시다가 이것이 무엇이냐, 하셔서 이것은 장난감Spielzeug이다. 하고 장난감을 받아 딸깍딸깍 버튼을 누르면서 어떻게 하는지 보여 드리니 그제서야 ☺️ 환해진 표정으로 아! 그렇구나. 가져가면 된다고 해 주셨다.

다시 캐리어를 주섬주섬 싸서 게이트 쪽으로 갔다. 마침 한국에서 알바거리가 들어와서 자리를 잡아 노트북을 켜서 작업을 시작했다. 일찍 일어났더니 배가 고파져서 챙겨온 시리얼바 2개를 해치우며, 캐리어를 책상 삼아 작업을 하고 있으려니 어쩐지 직장인이 된 기분이었다. 언제쯤 졸업하고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파리로 가는 비행기는 좌석이 다 나가서 기내 수화물을 무료로 부쳐 준다는 방송에 게이트가 북적였다. 와중에 그 비행기를 기다리는 게이트에 아시안은 나밖에 없다는 게 또, 새삼스러웠다. 비행기에 타서 짐 걱정을 덜게 되자마자 잠이나 청했다. 덕분에 옆에 누가 앉았었는지, 비행이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 드르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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