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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터바다 Oct 24. 2021

공동육아의 ‘공동체’ 프레임을 바꾸자!

모성애 없는 상담사의 공동육아 이야기

공동육아는 모두 아이를 위해서 시작한다. 아이에게 그만한 여건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일단 마당과 나들이 터를 확보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외활동 중심으로 보육할 수 있는 원아 당 교사의 수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텃밭을 가꾸고 유기농으로 식단을 제공할 수 있는 곳. 그러면서 기존 보육료 수준을 지나치게 넘지 않는 곳.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국공립 어린이집을 제외하고 민간에서 운영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더욱이 수도권은 공간 마련만으로도 한계가 많다.     


결론적으로 부모들이 공동 출자하는 협동조합 형태가 아니면 재원 마련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 조합 형태의 운영은 어떤 의미에서 공동육아에서 필연이다. 개인이 할 수 없기에 모였고 모였기 때문에 관계의 어려움은 필연적이다. 그동안의 수많은 조합이 그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고민했던 흔적들이 각종 회의와 교육, 행사, 모임들이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대한 인지는 10년 전 우리가 시작할 때보다는 훨씬 높아진 듯하다. 공공기관에서 공동육아라는 말을 많이 쓰기도 하고 실제 숲유치원이나 생태 유치원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공동육아 어린이집도 많이들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신입원아를 모집할 때이면 몇몇 안정적인 터전들을 제외하고는 어려움을 겪는다.      






왜일까? 대체로 아이들에겐 천국인데 부모들에겐 지옥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공동육아 역사를 돌아보면 초기엔 부모의 필요로 공동육아가 생겨났다. 야학하던 대학생들이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함께 돌보면서 생겨났기에 그 어떤 것보다 공동체성이 우선이었다.     


처음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만들었을 때 멤버도 대부분 동네 생협을 중심으로 만날 수 있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차로도 대부분 10분 내외 거리에 살고 있었다. 같은 마을을 공유하고 있었다. 불과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터전의 조합원들은 차로도 최대 20~30분의 거리에 살고 있다. 이미 같은 생활권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가 없다. 모여 살지 못하니 반쯤 공동육아에서 추구하는 공동체 생활은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모임의 성격이 관계 자체보다는 기능적인 모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일단 모이는 게 힘들다. 그냥 아이들 동네 놀이터 나가듯 어린이집에 갈 수 없고 조합원들을 만날 수 없다. 소통의 질은 만남 횟수에 비례한다. 더욱이 목적을 가지고 만난 조합의 경우는 평소에 그 사람을 알지 못하고는 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회의는 회의적이 된다. 이해관계가 명확한 경우는 더욱 그럴 수밖에. 기존의 서로에 대한 이해 없이 회의를 거듭하는 것은 회의적이란 얘기다. 그저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숙성의 과정이 사라진다.      


대부분의 안건이 이사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기존의 구조에서 이사회와 조합원 간의 이견은 물론이고 이사들 사이에서의 이견도 해가 거듭될수록 더 커지기 마련이다. 이건 서로의 가치관의 차이도 물론 영향이 있겠지만 정보량의 차이가 훨씬 크다. 매일 자신의 일처럼 터전 일을 대하는 이사회들과 특별한 사안이 발생하지 않는 내 아이가 중요한 일반 조합원들 간의 정보 차이는 무척 크다. 특히 이사회의 경험 유무, 조합 활동 경험치에 따라 그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한배를 탔으나 바라보는 지점도 노 젓는 방향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나는 지금 공동육아를 하겠다고 들어온 부모들이 특별히 교육 가치관이나 공동체성이나 개인 성향이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터전의 환경적 특성상 모두가 모여서 살 수 있는 마을 공동체를 만들 수 없는 현실에서부터 한계가 너무 명확하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 공동체들의 공동체성이 더 놀랍다.     

유지하는 것 자체가 생존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존의 기준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부터 처음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창립했던 당시의 멤버십과 지금 후배 조합원들의 멤버십을 비교할 수 없다. 오히려 멤버십이 떨어지고 있다고 고민하는 것 자체를 문제 제기하고 싶다. 일상을 공유할 수 없는 터전은 관계 중심의 공동체에서 기능 중심의 공동체로 기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가치 판단은 교육적 가치에서는 충분히 치열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스템에 있어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기존의 마을과 지역중심의 관점으로는 늘 부족하고 늘 모자란 공동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지금 이들에게는 기존의 운영체계를 유지하면서 터전에 모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기존 시스템에 맞춰져 있던 각종 회의와 교육, 모임에 대한 새로운 정리가 필요하다.     

기존엔 관계의 질을 높이는 것이 곧 회의 질을 높이고 공동체성을 높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자주 보려고 많은 모임을 했다. 하원 후에도 모였고 주말에도 모였다. 어차피 아이들 친구도 그들이고 이웃도 그들이니까. 


하지만 이제 그 모임들이 그 자체로 ‘일’이다. 그것도 효율성 없는 ‘일’이다. 모임과 일이 다른 이유는 목적성 때문이다. 모임은 자율성을 전제로 하기에 그 자체로 관계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관계를 원한다면 모임에 많이 더 자주 나가면 된다. 그러나 일은 관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일종의 생산성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하시 싫은 ‘일’이 된다. 당연히 관계의 질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더 끼리끼리 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소통의 구조도 더 협소된다. 그만큼 갈등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기본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정립이 필요하다. 조합활동의 기본을 합의해야 한다. 관계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이다. 멤버십을 관계만으로 채울 수 있는 시절은 지난 것 같다. 그럼 남은 것은 의식적으로 서로에 대해 이해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해한 만큼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는 서로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더 좋아진다.


함께 했던 초기 멤버들은 흔히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고 있었다. 당연히 뭔가를 논의하고 결정할 때 많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서로가 다 이해되는 지점에서 합의를 하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서로 관계에 정도에 따라 이해가 다 다르다.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도 그 간극이 클 수밖에 없다. 특히 그것이 양육에 관한 문제라면 더 예민하다. 우리가 모인 이유가 결국은 아이 잘 키워보려고 모인 거 아닌가. 아이들 사이 관계라든지 내 아이와 함께 하는 교사에 대한 문제, 등이 불거지면 당사자가 가진 이해의 폭만큼 갈등의 소지가 생길 것이다.     


예전에는 아이나 교사와 관계없이 조합원들 간의 갈등만으로도 탈퇴하는 가정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오히려 그런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콘텐츠에 대한 합의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관계 자체를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 콘텐츠를 더 잘 공유하기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관계를 위한 교육과 모임이 아니라 우리가 왜 모였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는 무엇이 더 필요한지 공동체 자체 목적에 관한 교육과 모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책모임과 교육 모임은 필수다. 예전엔 그저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던 일들이 이제 내가 동의가 되지 않거나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은 움직이지 않는다. 막연히 동의되고 이해되었던 내용 하나하나가 자신의 이유가 될 수 있도록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모두가 막연히 공동육아에 들어온다. 스스로 육아 가치관이 명확하거나 해서 들어온 곳이 아니다. 오히려 다니면서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내가 왜 이렇게 하고 있는지 그 의심을 독려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함께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단순히 좀 더 하면 좋고 덜 하면 부족한 수준으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필수 커리큘럼이 되어야 하고 1년 단위에 연차가 많아질수록 그 의미와 수준이 달라져야 한다.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새로 들어온 조합원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공동육아가 추구하는 가치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고도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지 왜 내가 오도 가도 못 하는 마음으로 몇 번을 보내고 있는지. 그 고생을 하고도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될 수도 있다. 공동육아를 했다는 것이 결코 훈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후 아이들의 교육문제 앞에서 더 자신 없고 흔들리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함께 해서 좋은 것은 스스로 독립하기 전까지 최소한의 울타리 속에서 지지받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다른 부모들은 그 기회조차 가져 보지 못하고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이고 우린 그 기회를 가졌다는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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