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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터바다 Oct 24. 2021

공동육아 조합원으로 산다는 것 #1.

모성애 없는 상담사의 공동육아 이야기

공동육아가 어려운 것은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주인이 아니라 조합원 모두가 주인이다. 그 말은 주인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낭만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모든 조합원이 평등하다. 총회에서의 의결권은 가정당 하나이다. 두 아이가 다닌다고 해서 의결권이 더 생기지 않는다. 결국 내가 오늘 조합원이 되었든 두 아이를 보내고 8년 차가 되었든 의결권은 똑같다. 그럼 무엇이 다른가? 본인이 공동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공동육아를 처음 선택한 동기가 향후 조합원으로 활동할 때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공동육아에 관심을 가지는 부모들의 유형은 크게 세 부류인 것 같다.      


첫째, 기존의 보육시스템에 대해 회의적이어서 대안적인 보육환경을 찾는 유형이다. 이들은 자신의 가치 철학이 명확한 경우가 많다. 양육도 가치관에 따른 실천이며 이왕 아이를 기르는 거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터전을 바라볼 때에서도 내 아이에게 좋은 것은 물론이고 기관이 추구하는 가치관이 자신과 맞다 판단되는 경우이다.      


둘째, 기존의 보육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강해 신뢰할 수 있는 보육환경을 찾는 유형이다. 이들은 대체로 터전에 오기 전까지 집에서 직접 보육하다가 아이의 또래관계와 좀 더 다양한 경험을 위해 애써 물어 찾아오는 경우다. 누구보다 자신의 아이들의 성향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양육에 있어서도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공동체 자체보다는 아이의 만족도에 더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     


셋째, 기존 어린이집에서 어려움이 있었거나 아이 기질적 특성에 맞는 보육환경을 찾는 유형이다. 이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의한 선택보다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을 찾다가 공동육아를 알고 오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아이가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 기존의 보육 시설에 적응을 못 했거나 다니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경우일 수 있다. 최근에는 외동이가 늘면서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아이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모든 행동엔 동기가 있다. 사실 크게 세 부류로 나눈 것이지 공동육아를 찾아오는 이유가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가정이 저마다의 사정이 다 다르다. 다만 조합원 생활을 하면서 취하는 태도의 동기를 크게 이 세 가지 유형으로 편의상 나눠 본 것이다. 행여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탈퇴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가 언젠가? 다 참고 견딜 수 있는데 이것만은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이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중에 있지 않은가?     


첫째 유형의 별명을 ‘가치 중심 유형’이라고 하자. 이들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 내가 동참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하고 가치 없다 느껴질 때이다. 이들은 공동육아가 추구하는 가치에 동의해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자꾸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 가치를 수정하거나 타협하자고 하면 더 이상 터전을 다닐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오히려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자고 하면 맨 앞장서서 그 일을 도맡아 할 사람들이다. 그들이 헌신하는 이유는 그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이며 나아가 내 아이를 위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가끔 공동체의 본질인 ‘사람’을 놓칠 때가 있다.      


둘째 유형의 별명을 ‘아이 중심 유형’이라 하자. 이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아이이다. 전체 운영보다는 보육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자신이 아이를 보살폈듯이 그 정도의 관심과 정성으로 아이들을 보육하길 원한다. 사실 공동육아의 가장 본연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관심과 정성의 기준이 자신이기에 전체의 기준을 무시할 수 있다.      


셋째 유형의 별명을 ‘적응 중심 유형’이라 하자. 이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아이의 적응이다. 어떤 형태로든 필요를 안고 공동체에 왔기에 그 필요가 채워지길 원한다. 그 간절한 큰 만큼 공동체 활동에도 잘 동참하고 배움에도 적극적이다. 다만 아이의 필요가 채워지질 못할 때 그 동기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고백을 해야겠다. 난 가치 중심 유형이었다. 어떤 인지 교육 없이 매일 나들이 가고 자연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공동육아는 최적의 ‘시스템’이었다. 그 가치를 추구하려면 조합 형태의 시스템이 필요할 수밖에 없구나 이해하고부터 난 공동체에 헌신했다. 쉽게 말해 공동체가 유지되는데 헌신한 것이다. 집에서도 가계부 한번 쓰지 않던 내가 재정 이사만 2년을 하고 계속 재정 소위 일만 했던 이유도 한 가지다. 공동체에서의 필요가 그거였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잘 돌아가면 내 아이도 그 속에서 행복한 것이라 여겼다. 물론 지금도 큰 틀에서 변함없는 믿음이다. 그러나 내가 놓친 것은 그 ‘공동체’가 사람으로 이뤄진 관계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사실 둘째 유형과 셋째 유형의 사람들은 나에게 일종의 ‘교화’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개인의 필요가 중요한 것이니 그들을 공동체적으로 바꿔야 한다 생각했고 가르치려 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아 그들이 얼마나 나를 참아주고 있었던가’ 지금도 낯이 뜨겁다. 그렇다. 다름은 차이일 뿐이다. 맞고 틀림이 아니다. 내가 ‘그들이 힘들다’ 여겼던 것은 그들이 자체보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했던 나의 아집이었다. 아마 그들이 없었다면 아주 밑바닥에 깔고 앉아 있던 내 아집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그들도 아마 나를 통해 아집의 터널을 통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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