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없는 상담사의 공동육아 이야기
공동체를 경험하고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단 하나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그 어느 누구도 그냥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우린 한 몸이다. 공동체란 단어 자체가 생활과 운명을 같이 하는 조직체란 뜻 아니던가. 사실 요즘처럼 개인화된 시대 흐름엔 반하는 단어다. 그래서 단어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 반응은 그 개인의 경험과 연결된 것일 테니 여기서는 본질에만 집중해 보겠다.
모든 논의에 앞서 우선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어떤 공동체든 내가 몸을 담고 있는 한 영향을 받는 것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다. 그런데 공동체에 들어오길 선택하고 영향을 받지 않고자 한다면 그건 애초에 선택이 잘못된 것이다. 공동육아가 힘들다고 하는 부모 중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는 게 힘들다 한다면 그건 답이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막상 공동육아에 들어와 보고 실제로 자신의 삶에 받는 영향 자체 때문에 괴로워하는 조합원을 많이 보았다.
영향을 받는다는 게 무엇일까?
누군가는 그것을 조합원의 의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의무라기보다 태도의 문제라 본다. 어떤 공동체든 들어가게 되면 가장 먼저 피부로 와닿는 게 ‘시간’이다. 어떤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아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사람이 ‘돈’과 그리고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가 진리이듯 현대사회에서는 시간은 돈보다 더 중요하다.
단언컨대 공동육아는 시간을 잡아먹는 하마다. 사실 육아의 본질이기도 하다. 관계는 시간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본질이 무엇인가? 결국, 사람이 모인 곳 아닌가. 그것도 육아하기 위해 모였다. 그럼 시간은 필수다. 그리고 육아 시계도 국방부 시계와 같아서 어떻게든 그 시간을 채우면 끝이 난다. 시간은 참 공평하다. 아이 육아를 어디에서 하고 있든 똑같다. 다만 공동육아를 하겠다고 모인 부모들은 그 시간을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하는 것뿐이다.
관계는 시간을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 사회생활하며 회의에 익숙한 부모들조차 공동육아에서 회의하면 그렇게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일 수 없다. 누군가는 에어컨 하나 설치하는 것도 밤새 토의했다는 절설을 전하곤 한다. 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그렇게 회의를 하진 않는다. 다만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하지 않는가. 한 달에 한 번 전체회의로 매달 벌어지는 일들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다.
맞다. 결정이 아니라 공유다. 결정을 위한 회의라면 요즘처럼 온라인이 발달한 시대. 만날 필요가 무엇인가 그냥 안건 올려두고 투표하고 다수결로 결정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그 투표를 위한 기준이란 게 상황마다 대상마다 그리고 투표를 하는 당사자의 입장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은 시간 드려 그 상황과 대상, 그리고 자신들의 입장을 살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동육아는 회의 결과보다 그 과정과 절차가 더 중요한 곳이다. 대부분 회의 내용이 사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돈에 대한 논의조차 그 뒤엔 사람이 있다. 어느 것 하나 내 형편과 상황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니다. 결정은 할 수 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결정이 없을 뿐이다. 그 많은 시간을 드려도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다. 다만 많은 시간을 드린 덕분에 어떤 결정이든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절대적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곳이 공동체다.
첫째 유형의 별명을 ‘가치 중심 유형’이라 했다.
이들은 공동체의 의미 있는 일을 하는데 자신의 시간을 쓰려할 것이다. 회의건 모임이건 행사건 이들에겐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이들의 참여를 독려하려면 모이는 본질에 대해 설명하라. 충분히 그들이 시간을 드릴 가치가 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들은 아마 없는 시간도 쪼개어 그 모임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공동체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말하고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이 공동체에 기여한 것에 대한 인정과 지지도 필요하다. 사실 인정과 지지는 다른 이들에게도 모두 필요하지만, 특별히 이들의 기여는 자기 이해를 넘어선 공동체적인 경우가 많기에 공동체가 성숙했다면 그 노고에 대해 적절한 인정할 만하다. 특별히 이들이 그런 인정을 목적으로 일을 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일을 하다 보면 정작 자기 자신과 가족 아이들에게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기여는 공동체에 남았는데 그들 자신이 공동체를 떠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 유형의 별명을 ‘아이 중심 유형’이라 했다.
이들에게 공동체는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아이들의 생활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일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조합 활동 나아가 지역사회와의 행사와 관련된 활동은 이들에게 그야말로 의무일 뿐이다. 이들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환경과 더 필요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데 두라. 이들에겐 자신들의 역할이나 공동체에서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도움이 되는지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피드백과 만족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게 될 것이다. 그 확신이 이들에게 공동체에게 헌신할 이유가 된다. 경험상 이들은 끝없는 의심에서 한 번의 확신을 세우면 그 어떤 사람들보다 끝까지 공동체에 남아 있게 된다. 아이 중심으로 공동체의 원칙을 흔들 수 있을지언정 그 어떤 상황적 변화에도 흔들림이 없다.
셋째 유형의 별명을 ‘적응 중심 유형’이라 했다.
이들에게 공동체는 끝없는 숙제다. 매일매일 새로운 과제가 떨어지는 미지의 세계다. 내 아이가 이곳에서 적응하는 한 그 모든 것은 적응의 문제다. 공동육아에 대한 가치부터 새롭게 맺어야 하는 관계까지 이들에겐 사실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부모마다 성향 차는 있겠지만 대체로 이들은 공동체에서 무엇을 하든 배우려는 마음이 있다. 아이의 적응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활동도 마다하지 않을 자세를 가지고 공동체에 들어온다. 어떻게 보면 그 누구보다 공동육아를 선택할 때 절실했을 것이다. 모든 활동에 앞장을 서지는 못해도 최소한 참여하려 애를 쓸 이들이다. 차근차근 함께 그 숙제를 풀어줄 동료가 중요하다. 어쩌면 진정한 공동육아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다만 이들은 갈등에 제일 취약하기에 예측 가능한 환경과 규칙, 기준들이 필요하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감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한번 자리를 잡으면 공동체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조합원 활동이 쉽다는 얘기는 아니다. 공동육아는 부모도 교사도 모두 아이들을 위한 좋은 환경이 된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하는 공동체 활동은 그것만으로도 살아있는 교육이다. 자신이 몸을 담그지 않고 어찌 아이들에게 관계에 대해 얘기하겠는가. 부모가 먼저 관계 속에서 다름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관계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 오직 시간으로 만들어진다. 관계 속에서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코 자발적으로는 만나지 않을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공동육아라는 이름으로 만나 갈등을 겪어가며 시간을 드릴 때 그 속에서 '연대'라는 꽃은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