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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터바다 Oct 24. 2021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짜 놀이'다!

모성애 없는 상담사의 공동육아 이야기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AI시대 필요한 능력은 ‘공감과 상상적 창의력’이라고 한다.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공감과 상상적 창의력을 따라갈 수 없는 결정적 이유는 아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동기에 우리가 하는 대부분은 ‘놀이’다. 그것도 ‘자유놀이’.     


놀이에도 진짜 놀이와 가짜 놀이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원래 놀이라는 단어 자체는 진짜와 가짜가 없다. 그러나 요즘 흔히 하는 놀이학교, 창의적 놀이, 등 놀이가 붙어 있는 단어들 때문에 놀이에도 구분이 필요해졌다. 진짜 놀이와 가짜 놀이를 구분하는 요소를 다음 네 가지라고 한다. 무목적성, 자율성, 주도성, 즐거움이다. 각각의 요소를 이해한다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간략히 짚어 보고자 한다.      






무목적성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놀이에는 목적이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즉, 놀이 자체만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놀이를 통해 뭔가를 배운다는 얘기를 하는 곳은 그래서 실제로는 놀이가 아니다. 최근에 아이들의 창의력을 목적으로 놀이한다는 곳을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각종 화려한 교구나 도구를 동원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사실 꼭 놀이학교가 아니더라도 모든 유아 장난감들이나 교구들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만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난 놀이에 대한 몰이해와 부모들의 불안을 이용한 상업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장난감이나 교구가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마치 비싼 교구와 장난감이 있어야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활동이고 창의력을 계발할 수 있다고 은연중에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내 아이를 위해서 더 좋은 교구와 활동을 찾아 ‘쇼핑’을 하게 된다.   

  

공동육아를 찾아오는 부모 중에서도 특별한 활동, 맞춤식의 보육을 원해서 아이를 보내며 조합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매일 나들이 가는 것도 더 이상 새로운 활동이 아니게 되면 슬슬 아이도 부모도 새로운 활동을 요구하게 된다. 그 첫마디는 ‘심심하다’이다. 아이가 심심하다고 한다며 뭔가 새로운 교구나 활동을 해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사실 아이들의 심심하다는 말에는 그 맥락에 따라 의미가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더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부모의 입장만 얘기해 보겠다. 기껏 찾아 보낸 공동육아에서 아이가 심심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수많은 조합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데. 아이가 즐겁고 행복하게 터전 생활하는 것 그거 보고하는 거 아니겠는가. 자 그럼 이제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 


터전에 새로운 교구나 활동을 더 요청하던지 아니면 터전이 아닌 외부활동을 통해서 충족시켜주고 싶어 한다. 실제로 터전마다 사교육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아이들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해주기 위해서 예체능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곧 졸업하는 7세 아이들에게만이라도 허용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실제 허용한 터전도 있다. 공동육아는 모든 조합원이 동의하면 가능한 곳이다.     


어떤 행동이든 동기에서 출발한다. 그 동기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란 얘기다. 사교육을 허용할지 말지의 문제는 단순히 공동체에서 개인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전체주의적 생각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사교육을 하겠다고 하는 아이들의 필요가 무엇인가에 있다. 그리고 그 필요를 사교육이 채워 줄 수 있는가이다.     






다시 ‘심심하다’라는 말로 돌아가 보자. 요즘 부모들은 아이가 심심한 걸 볼 수가 없다. 그냥 딩굴딩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육아에 관심이 높은 시대일수록 그 ‘불안’은 더 큰 것 같다. 맞다 ‘불안’이다. 그리고 ‘자극 = 창의력’이다. 마치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끊임없이 자극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야만 내 아이가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니 최소한의 부모 역할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놀이로 돌아가 보자. 놀이의 무목적성은 역설적으로 심심해야 달성된다. 재미를 찾아 노는 것이다. 심심하니까 재미난 것을 궁리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놀 친구와 놀 시간, 그리고 놀 공간이다. 생각해 보라. 친구들과 놀 시간도 있고 놀 공간이 있는데 심심하다 어떻게 하겠는가. 돌멩이, 모래 한 줌, 하다못해 손가락만 가지고도 논다. 아이들은 그런 존재들이다. 태생이 심심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존재들이다. 왜 아이들은 놀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놀이가 사명인 셈이다. 그래서 놀이를 죽자 살자 한다. 진짜 아이들의 놀이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존재감, 즉 자존감과 직결된다. 그만큼 성취감도 크다.     


어릴 때 나만의 ‘절대 딱지’를 한 번이라도 만들어 본 어른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럼 이기려고 하는 것도 목적성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4~5세 유아시기까지는 이런 이기는 게임과 같은 놀이를 하지는 않는다. 그 시기는 자신의 신체 능력과 감각을 외부 세상과 소통하면서 확인하고 검증하는 놀이하는 시기다. 그래서 일명 ‘오감놀이’라는 것을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문화센터들이 많다. 왜 그렇겠는가. 아직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놀이를 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사실 심심하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아니 심심하다는 게 뭔지 모른다. 잘 살펴보라 피곤하고 졸릴 수는 있어도 유아들은 모두 탐험가이다. 어떤 특별한 교구나 장난감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물건과 환경이 다 놀잇감이다. 다만 부모들이 아이들의 관심을 장난감에 두게 하거나 다른 엉뚱한 짓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교구나 활동을 제안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즉, 아이들이 교구가 없으면 못 놀아서가 아니라 부모의 편의를 위해 장난감을 준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크면서 또래 관계를 알게 되고 또래와 노는 재미를 알게 된다. 그럼 놀이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첫 놀이 상대인 부모와의 놀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부모는 아이를 놀이에 철저히 맞춰 준다.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 아이 수준에 맞춰야겠지만 어느 정도 자라면 부모도 아이의 놀이에서 마냥 맞춰주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자랐다는 증거다. 그러다 부모도 알게 된다. 이제 더는 부모가 놀아주는 것으로는 아이가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그때 또래와의 놀이를 원하는 때가 왔다는 신호다. 빠르면 5세 늦어도 6세에는 온다. 그리고 아이가 얘기한다. ‘심심하다’고. 공동육아 터전을 다니는 아이들 중에도 집에만 오면 ‘재미없다’, ‘심심하다’는 얘기를 한다고 걱정하는 부모가 있다. 그 아인 둘 중 하나다. ‘또래와 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래와 놀고 싶은데 내 맘대로 안 된다 ‘이다. 즉, 또래와의 놀이로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다.          

그래서 부모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뭘 더 해줘야 하지?' 고민할 것이 아니라, '아이가 드디어 또래 관계의 재미를 느끼고 싶어 하는구나' 하며 쾌재를 부르자. 잘 만하면 이제 아이는 더는 부모를 놀이 상태로 찾지 않을 것이다. 이제 부모는 더 좋은 교구나 활동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놀 친구와 놀 시간, 놀 공간을 마련하면 된다.


공동육아에는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만약 아이가 심심하다고 더 많은 교구와 활동, 심지어 사교육을 하자고 하는 것이 맞겠는가? 유기농 밥상으로 힘들게 다 차려놓고는 입만 만족시키는 정크푸드로 배달시켜 먹는 격이다.          





놀이에는 목적성이 없다. 놀이 자체가 목적이다. 친구와 어떻게 하면 잘 놀까 가 목적이란 얘기다. 자 그럼 이제 '심심하다'는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진짜 놀이의 두 번째 요소가 자발성 아니던가.      


만약 어떤 형태로든 공동육아를 하고 있어 놀 친구도 있고 놀 시간도 있고 놀 공간도 있다면 이제 부모는 기다리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사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기존 5~7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이런 자유놀이 환경을 만들어 주기가 어렵다. 일단 너무 이미 많은 활동을 하고 있고 충분히 자유놀이를 할 만큼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원 하면 아이들의 또래관계의 놀이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놀이터에서 한 시간씩이라도 놀다 들어가자 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이해를 못 한다. 하루 종일 놀다 왔는데 또 놀자고 하는 아이를.     


기관에서 한 활동은 ’ 자발성‘에 제한이 많다. 주어진 활동을 하는 것이지 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부터 진짜 놀이의 시작이다. 게다가 나 혼자가 아닌 또래와의 놀이는 서로의 합의가 필수적이다. 보통의 자발성으로 가능하겠는가? 우선 자신이 무엇을 하고 놀고 싶은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놀이가 재미가 있다는 확신도 필요하다. 그래야 누군가에게 같이 놀자고 하지 않겠는가. 물론 아이들은 일단 ‘우리 같이 놀래?’하고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무엇보다 놀고 싶다는 강력한 동기는 놀면 진짜 재밌다는 경험 없이는 생길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뭘 하면 재밌지를 알려면 그전에 많이 놀아봤어야 한다. 어른 중에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할 때 즐거워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답은 간단하다. 놀아보지 못해서 그렇다. 목적 없이 놀아보지 못해서 그렇다. 자기 자신이 뭘 할 때 가장 즐거운지 알려면 그 즐거움을 찾아 놀아봐야 한다. 이건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대신 재미를 찾아 줄 수 없다.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것이 자발성이고, 자발성의 전제는 놀면서 맛보았던 재미가 되는 이유다. 즉, 진짜 재미를 맛본 아이들만이 자발성이 생기는 것이다.     






다음 진짜 놀이의 요소는 주도성이다.

자 재미를 아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 아이의 기질이 어떻든 친구를 찾을 것이다. 내성적이면 단 한 명이면 될 것이고, 외향적이라면 무리를 원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함께 재미를 주고받을 친구를 필요로 한다. 그럼 그 아인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하고 싶은 것을 주도하지 않겠는가. 주도성은 기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흔히 어른들이 생각하는 리더십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란 얘기다. 아이들의 놀이를 조금이라도 관찰해본 경험이 있는 어른이라면 알 수 있다. 아이들 놀이에서 진짜 주도하는 아이는 힘이 센 아이도, 말을 잘하는 아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기가 뭘 할 때 즐거운지 잘 아는 아이다. 혹 그 아이 기질이 내성적이어서 먼저 엄지를 내세우며 놀 사람을 모으지는 못하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놀이가 제안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자신이 원하는 놀이를 하자고 하는 아이 편에 서서 힘을 실어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의 재미를 잘 알면서 힘이 세고, 말도 잘한다면 그 아이가 놀이 대장이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질과 상관없이 자기가 뭘 좋아하고 어떨 때 재미를 느끼는지 확실히 아는 아이도 주도성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아이가 관계를 어려워하고 다른 아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면 놀면서 자신이 즐거운 재미에 푹 빠지게 해 보라. 아무리 내성적인 아이도 그 재미를 찾아서 어떻게든 아이들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놀이를 하게 될 테니. 


사실 이게 다른 말로 자존감이다. 자존감이란 단어가 워낙 대중적이다 보니 마치 엄청 어려운 숙제같이 느끼는 부모가 많다. 일반적인 가정의 부모라면 아이의 사랑이 부족해서 아이의 자존감이 낮은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부모의 양육방식이 아이의 기질과 맞지 않는 경우 원치 않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아이가 충분히 놀면서 스스로 재미와 즐거움을 어떤 형태로든 맛본 경험이 있다면 그 아이는 결코 자존감이 낮을 수 없다. 존재 자체로 즐거움을 경험한 아이가 어떻게 자기를 의심할 수 있겠는가?

놀이가 아이들에게 치유의 힘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진짜 놀이의 요소 ‘즐거움’이다. 

이건 진짜 놀이를 했다면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선물이다. 놀이의 목적이 즐거움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처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얘기에 가깝다. 진짜 놀이를 통해 즐거움을 느껴야 다시 놀고 싶은 거니까. 결국은 진짜 놀이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본 아이라면 특별한 활동과 교구가 필요 없다. 그저 놀 친구와, 놀 시간과, 놀 공간만이 필요할 뿐이다. 


불행히도 요즘 아이들은 유치 시기에도 이 세 가지를 다 누리지 못한다. 제대로만 놀게 해 줘도 아이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잘 자란다. 심지어 부모들이 그토록 원하는 인지능력까지 향상된다. 뇌세포의 양은 유아시기에 이미 다 만들어진다. 그다음은 뇌세포 스냅스의 연결 정도가 결정한다. 그 스냅스를 연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유아시기의 진짜 놀이니까. 그 진짜 놀이를 가장 풍부하게 하는 것이 돌멩이 하나도 정형화되지 않는 자연에서 친구들과 자유롭게 뛰어노는 것이다. 제발 최소한 학령기 전까지만이라도 아이들을 진짜 놀게 하자. 


그리고 공동육아를 하는 모든 부모들이여 우린 그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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