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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터바다 Oct 19. 2021

'심심하다'는 아이의 속마음

모성애 없는 상담사의 공동육아 이야기

“아이가 터전에서 심심하다고 가기 싫어해요.”


'아니 심심하다니. 애들한테 천국이라고 보낸 공동육아어린이집 아니던가. 재밌어 죽겠다고 조합활동을 할까말까인데 심심하다니.' 유독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이 무료해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아마 경쟁사회와 힘든 여건에서 우릴 길러내신 부모세대에게 양육된 우리의 유년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조바심일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재밌으라고 보낸 터전에서 아이가 심심하다는 얘기를 듣고 고민하지 않은 부모은 없을 것이다.


물론 아이가 심심하다고 하는 단어 자체보다 그 뒤에 숨은 마음이 무엇인지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아이마다 ‘심심하다’는 단어는 뜻은 다르기 때문이다. 관계에서의 불편함을 얘기하는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못한다는 뜻인지,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어 무기력하다는 뜻인지, 정말 단어 그대로 심심하다는 뜻인지 살펴볼 일이다.     

오늘은 공동육아를 다니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관계에서 불편함을 얘기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자.     





터전에서의 아이들 관계는 리얼 정글이라고 했다. 누군가 설계한 잘 갖춰진 무대가 아니다. 역할이 따로 없고 규칙도 따로 없다. 그 말인즉, 갈등이 늘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놀이를 하고 싶으면 상대가 필요하고 함께 놀 상대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또래 관계가 어려운 아이들은 기질적인 성향도 있겠지만 그보다 부모가 아이 중심으로 모든 의사결정을 하는 가정의 경우가 많다. 거기에 외둥이라면 더욱 어른의 대화에 익숙하게 된다. 부모는 자신을 태어나면서부터 봐왔다. 서로에게 너무 잘 튜닝되어 있다. 원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또래 관계가 힘들 수 있다.     


양육서는 아이들의 감정을 읽어줘야 한다는 얘기로 넘쳐난다. 행여나 아이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말 한마디에도 부모는 살얼음판을 걷는다. 행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욱 한 날이면 죄책감까지 떠안아야 한다. 아이와의 대화에서 아이의 감정을 먼저 읽어줘야 한다는 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마음을 읽어줘야 한다는 말이 아이 중심으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른을 이해할 수 없으니 어른이 아이를 이해해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이 중심으로 선택하라는 뜻은 아니다. 생활의 중심이 아이가 되면 아이는 어디에서든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것에 익숙해진다. 자신과 조금만 맞지 않아도 뭔가 잘못된 것으로 느끼고 불편하다.     


첫 사회생활과 마찬가지인 어린이집 생활은 모든 아이들에게 긴장일 수밖에 없다. 특히 먹는 것에서 노는 거, 자는 거까지 모든 것이 자기 위주로 생활했던 아이들은 당연히 낯선 환경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 그 불편함은 또래 관계에서 드러나게 되어있다. 환경은 적응해야 하는 거고 남은 것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 하면 대충 ‘어’ 정도로 알아주는 어른이 아니라 처음으로 ‘뭐’하는 또래들을 만나는 것이다. 대략, 난감하다.      


그럼 아이들은 심술이 난다. 이래도 저래도 안 통할 것 같고 그렇다고 힘은 없고, 주인이 되지 못할 바에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관계 때문에 심심하다 하는 아이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놀고 싶은데 내 뜻대로 안 된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특정 대상과의 갈등이면 누구 때문에 가기 싫다 하겠지만 딱히 그렇지 않은 경우는 심심하다 하면서 다른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할 공산이 크다. 심술이 나니 다른 아이들이 재미나게 노는 것도 보기가 싫다.     





자 그럼 이 아이는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 일단 ‘심심하다’에 꽂히지 말자. 아이 중심으로 생활했던 부모의 특성상 그 말 한마디에 전전긍긍할 가능성이 높다. 부모가 또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며 열심히 아이 입장 생각하게 된다. 그럼 그 아이는 점점 더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애쓰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아이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관계의 불편함 때문에 ‘심심하다’ 심술이 난 아이는 어째든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아이다. 원하는 것이 있다는 얘기니 그것을 스스로 얻는 방법을 연습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 방법은 아이 수만큼 다양하겠지만 기본은 간단하다. 그 아이가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는 아이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낸다. 심술은 교사가 해결할 것이고 부모는 아이가 자신들을 어떻게든 끌어드리려 할 때 두 눈 감고 기다려 주시라. 당신의 아이를 믿어 보라.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그 작은 경험이 쌓여 그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 나갈 것이다.    

 

아이가 심심해서 터전이나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하는가? 그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나 관계 때문인가? 그럼 좋은 기회다. 드디어 아이가 처음으로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걸 표현하고 배울 기회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자. 진정한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응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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