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없는 상담사의 공동육아 이야기
당신은 차려 놓은 밥상을 좋아하는 가? 차려 먹는 밥상을 좋아하는 가?
난 주저 없이 차려 놓은 밥상이 좋다고 할 것이다. 그게 메뉴가 무엇이든 남이 해준 밥을 받아 들 것이다. 일단 요리에 취미가 없고 먹고 싶은 것에 큰 욕심이 없다. 끼니만 때우는 게 목적이니 비용이 들어도 그렇게 할 것 같다. 하지만 차려 놓은 밥상은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일방적이고 수동적이다. 더욱이 차려주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복불복이지 않은가. 맛은 고사하고 건강도 포기해야 할 수 있다. 즉, 나의 권리를 누군가에게 양도하는 행위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차려주는 밥을 선택할 것인가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누구’를 선택하기 위해 우린 나름의 기준을 세운다. 비용대비 맛에 초점을 둘 수 있고, 요리사로서 경력을 참고할 수 있겠다. 그리고 먹어 본 사람들의 평에 의존한다. 그게 전부다. 그나마도 나에게 맞는지는 먹어 봐야 알 일이다. 물론 처음부터 차려 놓은 밥상은 나에게 맞춤일 수 없으니 그나마도 기대치를 낮출 수밖에.
자 그럼 차려 먹는 밥상은 어떤가?
일단 내가 원하는 기호에 맞출 수 있다. 맛은 좀 떨어져도 식자재에 신경쓰면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 누군가와 같이 먹는 밥상이라면 그 의미는 더 클 것이다. 하지만 시간적,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크다. 경제적으로도 비용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특히 나같이 요리에 관심도 재능도 없다면 더 힘든 게 사실이다. 대신 내가 원하는 재료로 원하는 방식으로 근사치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맛이 기대치에 못 미칠 수 있겠으나 요리책을 보던, 포털 검색하던 레시피를 참고하면 극복 못 할 일도 아니다. 요리도 하다 보면 실력이 는다고 하지 않던가. 경험치가 쌓여가는 것도 부수적인 덤이다. 어디까지나 차려 먹어 본 사람에게만 쌓이는 게 경험치니까.
그럼 질문을 바꿔보겠다. 매일 먹는 밥상. 그 많은 날 삼시 세끼 중 하나일 밥상은 가끔 차려 먹기도 하고 누가 차려진 것도 먹고 할 수 있다. 그럼 양육은 어떤가?
남에게 맡길 것인가? 아님, 내가 직접 할 것인가? 물론 전적으로 맡기는 것도 그렇다고 모두 내가 하는 것도 아닌 게 양육일 수 있다. 지금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발성과 참여도를 얘기하는 것이다. 소비자가 될 것인가? 주체자가 될 것인가?
소비자는 이미 만들어진 것을 선택하고 댓가를 지불하는 수동적 참여자이다. 요즘 유행하는 DIY는 완성품이 아닌 구성품으로 자신만의 작업을 하는 보완적 참여자라 할 수 있다. 주체적 참여자는 그 모든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전문 요리사가 아니다. 당연히 업으로 삼은 사람들보다 잘할 순 없다. 다만 전문 요리사가 내 밥상을 전적으로 책임져 줄 수 없듯이 양육을 아무리 전문가를 잘 선별한다 해도 책임은 결국 부모 몫이다.
자기주도 학습이 왜 중요해지고 있는가? 자기 자신 말고 아무도 책임져 줄 수 없는 예측불허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양육자인 부모도 자녀의 삶을 대신 책임져 줄 수 없다. 그래도 부모세대는 대략 가이드할 만한 모델들이 있었다. 어느 길을 가면 어떤 곳에 도달하겠구나 하는 루트가 선명했다. 굳이 대로를 놓아두고 샛길을 힘들게 개척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대로가 없는 시대지 않은가. 아니 무수히 많은 샛길이 생겼다. 도착지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일명 ‘성공’이든 ‘행복’이든 원하는 걸 얻는 방법이 무수히 많아진 것이다. 거창하게 4차산업혁명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대량생산보다 소량맞춤 생산시대가 된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근데 왜 유독 양육과 교육의 영역에서만 소비자에서 못 벗어날까? 지금도 부모들은 수많은 정보 속에서 가장 자기주도 학습을 잘 가르칠 학원이나 교육기관을 찾아 헤맨다. 쉽게 말해 차려 먹어야 하는 밥상을 밥상 차려주는 식당에 가서 찾는 격이다. 물론 요리는 배울 수 있겠다. 실력도 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어떤 재료로 만들 것인가? 내가 어떤 밥상을 원하는 가를 배울 순 없을 것이다. 그건 내가 직접 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으니까. 그러면서 자꾸 왜 내가 원하는 메뉴는 안 알려주냐고, 왜 내 입맛에 맞지 않냐고 항변하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하면서도 같은 경우를 많이 봤다. 공동육아 1년 차가 지나면 어느새 환상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는다. 아이는 자연에서 뛰어노니 즐거운 것 같은데, 기대와 다른 상황들이 불편해지고 슬슬 공동육아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소하게는 왜 교사가 아침 등원할 때 나와서 아이를 맞이 해 주지 않느냐부터 크게는 왜 사교육을 하면 안 되냐까지 다양하다. 아무리 들어오기 전에 들었던 얘기고 심지어 동의했던 사안일지라도 실제 내 아이를 보내고 나면 달라진다. 아니 현실적인 화두로 떠 오른다는 게 더 맞겠다. 머리로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한 까닭이다. 일반 어린이집이었으면 사실 고민할 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 어린이집을 선택한 이상 고민도 고려의 대상도 아니니까. 차려진 밥상 아니던가.
근데 공동육아는 다르다. 차려 먹는 밥상이다.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다. 단적으로 모두가 ‘우리 터전은 오늘부터 사교육 합시다’ 결정하면 할 수 있다. 단, 모두가 함께 차리는 밥상이니 그 메뉴에 동의해야 한다. 차려 먹는 것도 힘든 데 협의까지 해야 하다니. 산 넘어 산이다. 그러니 다들 공동육아 힘들다고 하지. 맞다. 그래서 힘들다.
공동육아는 차려 먹는 밥상에서 나아가 무려 함께 차려 먹는 밥상이다. 나도 뭘 원하는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과 뭘 먹을지까지 상의해야 한다니 정말 미칠 노릇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내가 뭘 원하는지 알려면 나와 다른 대상이 필요하다. 주구장창 혼자 골방에서 내가 뭘 좋아하지 뭘 원하지 고민해보라. 불가능할뿐더러 설령 그걸 혼자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만이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다.
공동육아 하면서 힘들다는 부모들이 많다. 그렇다면 제대로 하고 있는 거다. 그거 하려고 모였으니까. 여기서 질문을 잘 던져야 한다. 힘들기 때문에 내가 공동육아를 잘 못 선택한 것일까? 당신이 힘든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가? 내가 알기론 관계다. 어떤 거창한 교육적 가치관이나 신념 때문이라면 그건 힘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면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할 문제다. 왜? 우리 아이에게도 좋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충분히 논의해 볼 수 있고 반영할 수도 있다. 정말 그 과정이 힘든 걸까?
사교육을 예를 들어보자. 현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사교육을 하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교육을 돈으로 살 수 없고 유치 시기엔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대가 바뀠고 아이의 재능을 부모가 모두 따라갈 수 없는 상황이라 7세에게 조건적 사교육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충분히 얘기 해볼만 하다. 그 필요를 느끼는 부모가 모두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 과정이 힘들다. 정말 힘들다. 겪어 본 사람들만이 안다.
그런데 그거 하자고 모였다. 차려 먹는 곳에서 그 수고가 힘들다고 하면 차려 놓은 밥상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근데 꼭 밥상 차려 놓으라는 조합원이 있다. 당신이 원하는 메뉴가 있다면 당신이 시작해야 한다. 아무도 대신 차려주지 않는다. 관계가 어려운 것도 이때부터다. 아이들에게도 공동육아가 리얼 정글이듯이 부모에게도 공동육아는 관계에 있어서 리얼 정글이다. ‘아’ 하면 ‘아’하고 알아 들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 말하면 입 아프다. 같은 자식을 둔 부부끼리도 그게 안 되는데 하물며 다른 아이 둔 부모들과 그게 되겠는가.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 밥상 차리는 노하우는 다음에 더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힘듦의 가치에 대해서 얘기하고 마무리 할까 한다.
내가 공동육아 시작할 당시 나름 사람 대하는 직업을 10년이나 했고 상담공부까지 하고 있었으니 다른 부모들보다는 밥상 차리는 게 남들보다는 쉬울 줄 알았다. 웬걸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란 걸 3년 만에 깨달았다. 그냥 나도 누구 엄마일 뿐이다. 누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경험이 있고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나의 그런 태도가 상대편의 마음을 닫히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단언컨대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현존하는 어떤 조직보다 평등하다. 아무리 영향력 있는 사람도 자신이 누구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좌절을 맛볼 것이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 하더라도. 너무 비효율적이며 비논리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결국 그 속에서도 균형을 찾아 간다.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너무 애 달아하지 말길. 그 방향이 옳았다면 결국은 그 길로 가더라. 다만 방향 선회를 위한 임계치를 넘기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대부분 너무 헌신적으로 애쓰던 사람들이 끝까지 함께 못하고 탈퇴하는 경우다. 개인적으로 제일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 애씀과 좌절이 누구의 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당신의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에 있었는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에 있었는가?
공동체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힘들지만 자기만이 옳다는 사람도 못지않게 힘들다. 둘 다 여지가 없다. 공동체는 나를 증명하는 곳이 아니다. 나와 다른 너를 함께 수용하는 곳이다. 지나고 보면 남는 것은 한결 편안해진 관계이니까.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도 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