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없는 상담사의 공동육아 이야기 #4
“왜 공동육아하려고 하세요?”
“어릴 때 실컷 놀게 해 주고 싶어서요”
“놀게 한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 그냥 뭐든 아이가 재미있으면 노는 거 아닌가요?”
“재미없으면요? 만약 힘들면 노는 게 아닐까요?”
“...”
대부분 공동육아를 하겠다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어릴 때 맘껏 놀게 해주고 싶어 선택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사회성이다. 요즘은 사회성에 대한 비중이 더 늘어나는 것 같다. 아이를 하나만 낳는 가정이 늘어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기존 어린이집에서 적응에 실패하거나 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던 아이들이 많아지는 것도 이유다. 사실 놀이와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거라 둘은 한 몸이다. 놀이는 관계없이 이뤄지지 않으니까. 특히 자유 놀이가 주된 활동인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그야말로 관계에 ‘특화’된 곳이다.
그런데 부모들의 공동육아에 대한 오해는 여기서 생긴다. 놀이란 재밌는 것이고 재밌게 놀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라 기대한다. 사실 잘 노는 아이들이 관계가 좋긴 하다. 다만 잘 논다는 게 꼭 재미있고 사이좋다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누구나 어릴 때 놀아본 기억만 생각해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정말 아이들은 놀다가 싸우고 싸우다 논다. 더욱이 취학 전 아이들이라면 말하면 입 아프다. 하지만 부모가 되면 그 기억을 다 잊어버리나 보다. 내 아이가 누군가와 싸운다는 것, 특히 누군가를 때리거나 맞았다는 그 자체만으로 충격을 받는다. 마치 어른들이 치고받고 싸운 양 심각하다.
아마 ‘난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부모님 계시겠지만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남의 아이가 아닌 내 아이가 싸우다 맞았다. 무슨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가?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면... 아마 참기 힘들 것이다. 우선 때리고 맞았다는 그 사실에 집중한다. 어떤 이유에서도 폭력은 안 되니까. 그렇다 ‘폭력’이다. 그것이 아무리 대 여섯 살짜리 아이들의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건 반드시 척결해야 할 악이다. 가르치고 교정해야 할 대상이다.
맞다. 당연히 가르쳐야 한다. 몸이 아닌 말로 화를 표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더욱이 그게 습관적이라면 물러설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어른들이 생각하는 ‘폭력’은 아이들 사이에서 있을 수 없다. 쉽게 말해 어른들처럼 일방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단 얘기다. 다시 한번 노파심에 확인한다. 결코 아이들 사이에서도 물리적인 행동이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어른들의 시각으로 아이들의 행동을 바라볼 때 생기는 부작용을 이야기하고 싶다.
공동육아는 그런 점에서 초식과 육식을 잘 나눠 울타리 치고 관리하는 동물원보다 초식과 육식이 함께 공존하는 정글이다. 아이들을 동물에 비유해서 불편하신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아직 문명화되지 않았으니 동물에 더 가깝지 않은가.
공동육아는 연령 별로 반을 나눠서 담임교사가 있지만, 대부분의 활동을 통합으로 운영한다. 그 이유도 참 중요한데 이는 다음에 풀어보겠다. 여하튼 아이들은 동생도 있고 형도 있는 상황에서 논다. 그것도 잘 짜인 활동이 아니라 그야말로 야외에서 하고 싶은 대로 논다.
일명 ‘나들이’다.
사실 내가 두 아이를 공동육아 어린이집 보내고 가장 만족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특별한 일 없이는 나가서 논다. 마당에서 노느냐 나들이터에서 노느냐의 차이뿐. 어쨌든 밖에 나가 논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교사가 아이들 놀이를 지켜본다. 그러나 먼저 이거 하자 저거 하자 간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거 하자고 교사 손을 끌면 멤버로 영입될 수 있다. 4~5세까지는 놀아도 각자 논다. 땅 파는 아이, 풀 뜯는 아이, 마냥 뛰어다니는 아이, 등 그야말로 무아지경이다.
주로 문제는 6~7세에서 일어난다. 한창 자기가 생기는 시기. 내가 여자니 남자니 눈을 뜨는 시기. 바야흐로 아이들 세계의 춘추전국 시대다. 대체로 7세가 놀이를 주도하지만 7세 끼리 경쟁이 치열하면 놀이에 참여하는 6세들이 실권을 쥐기도 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누가 나보다 힘이 센지. 물론 여자아이들은 또 다른 기준이 있지만 역시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선 별반 다르지 않다. 자연스럽게 편이 나뉘고 서로 대결하고 부딪힌다. 놀이로 풀어내면 가장 좋겠지만 뒤끝이 생활에서도 이어진다.
누가 봐도 힘이 센 아이는 놀이 현장에서 결판을 볼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렇게 못 한 아이는 다른 경로를 찾기 마련이다. 다른 누군가와의 이간질이 될 수도 있고 싫어하는 것으로 계속 건드릴 수도 있다. 노련한 교사가 있는 방이라면 그 아이를 따로 불러 사정을 들어 볼 만한 행동들일 것이다. 여하튼 정당한 방법이 아닌 경우다. 그럼 어느 순간 작은 불씨로 불이 붙게 된다. 싸움이다.
때린 아이도 억울하고 맞은 아이도 유쾌하지 않다. 어른들이 보기엔 더욱 아름답지 않다. 애써 잘잘못을 가릴수록 어긋난다. 그게 반복되면 아이들의 불편함이 어른들의 불편함이 되어 급기야 탈퇴하는 가정까지 생긴다. 설마 그런 일로 탈퇴한다고? 어떻게 시작했는데? 물론 그것만으로 탈퇴까지 하는 가정은 없다. 다만 불신의 씨앗이 되어 탈퇴에 이르게 하기엔 충분하다.
유아들이라고 해서 놀이를 너무 낭만적으로 보지 않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두 아들을 터전에 보내며 무려 상담사이면서 아이들 관계로 울고불고 했던 경험이 있었다 고백해야겠다. 그게 자식인가 보다. 그리고 그런 갈등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이 ‘리얼 정글’ 공동육아 되시겠다.
뭐야 공동육아가 애들한테 좋다며, 천국이라며 앞뒤가 안 맞잖아. 혼란스러운 분 계실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천국 맞다. 어떤 곳이 매일 나들이 가며 맘껏 놀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숲유치원, 놀이학교도 산책 나들이 하루에 30분도 채 어렵다. 아니 온종일 한다 해도 아이들 통제하고 관리하기 바쁘다. 단언할 수 있다. 왜? 어디에도 아이들 대 여섯 명에 교사 한 명씩 배정할 수 있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원아 수 대비 교사 수가 제일 높은 곳이 공동육아다. 철저히 나들이 다니려 만든 비율이니까.
그럼 아이들 싸움도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다. 맞다. 관리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 가능한 아이들끼리 해결하도록 잘 지켜본다. 절대 방관 아니다. 물리적 행사가 있었는데도 그렇다. 아이들 행동은 순식간이니까. 심지어 교사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있을 수 있다. 놀라지 말길... 터전에는 CCTV도 없다.
대체로 교사들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다. 아이들 사이에 미묘한 갈등까지. 다만 그 갈등이 무르익고 아이들 수준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인지 지켜보고 있다. 그거 아는가. 알고도 지켜보는 게 제일 어렵다는 것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알지만 기다리는 거. 그래서 공동육아 교사는 그 어떤 역할을 했던 그 연차만큼 특별하다. 그건 또 담에 나누겠다.
이젠 정리를 해 봐야겠다. 왜? 사회성 키워주고 싶다 하지 않았던가. 맘껏 놀게 해주고 싶다 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지금 맘껏 놀면서 사회성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나는 가끔 아이들 사이의 갈등으로 고민하는 후배 조합원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아이들은 지금 관계 ‘예방접종’ 맞는 중이야"
만약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아이라면 더욱 교사도 엄마도 함께 지켜볼 수 있는 이곳에서 겪어야 한다고. 사회생활 조금이라도 해 본 어른들이라면 알 것이다. 관계가 제일 어렵다는걸. 그리고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는걸. 아이들 세계라고 다를 것은 없다. 물론 순수하기에 오늘 싸워도 내일 놀 수 있다. 그래서 관계를 배울 수 있다. 또 같이 놀려면 싫어도 맞춰야 한다. 싸워서 못 놀면 자기만 손해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너무 저자세로 비위를 맞춰가며 노는 것을 보고 부모는 애간장이 탄다. 그 아이가 비굴한가? 아니다 너무나 사회성이 뛰어난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아이다. 언젠가 그 아이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원하는 것을 성취할 거라 난 믿는다. 내 아이도 그랬으니까.
제대로 놀아 본 아이는 결코 좌절함이 없다.
“놀이의 즐거움을 아는 아이는, 어려서 마음껏 놀았던 아이는 어려움이 닥쳐도 결코 자신을 스스로 버리지 않는다. ... 험한 길을 헤쳐나가는 데 꼭 필요한 생기와, 놀면서 만나는 재미와 우정이 있어야 아이들은 살 수 있다(놀이가 밥이다 p41.)”
관계는 책으로 결코 배울 수 없다. 직접 겪어야 한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가장 강력한 백신은 관계다. 관계는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 전수되었다. 그래서 진짜 놀이는 낭만적일 수 없다. 놀면서 수많은 갈등을 겪어 보며 몸이 터득하며 항체를 생성하는 것이다. 예방접종의 진가는 실제 어려움이 닥쳤을 때 발휘될 것이다. 결정적일 때 우리 아이들을 든든하게 지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