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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터바다 Oct 24. 2021

왜 세상 중요한 ‘부모 되기’ 교과목은 없는가?

모성애 없는 상담사의 공동육아 이야기

당신은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적어도 난 아이를 낳기 전까지 아니 임신하기 전까지 어디에서도 배워 본 적이 없었다. 대학원까지 무려 총 18년의 학창 시절 통틀어 제대로 배워 볼 기회가 없었다는 게 충격적이다. 학교에서 성교육도 받았고 가사 시간도 있었다. 그런데 왜 정작 실전에 아무 소용이 없는가. 그 교육 어디에도 ‘부모’가 되는 교육은 없었던 것 같다. 모든 생명체가 종족보존의 본능에 따라 새끼를 낳고 기르듯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도 절로 알게 되는 건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나 보다.      


왜 신생아가 이유 없이 밤에 울면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 영아 산통 때문임을 배우지 못했던가?

끝내 말 못 하는 아이에게 화를 내고 죄책감에 인터넷 뒤져보고 난 뒤에야 후회하게 한단 말인가.     


왜 모유 수유는 엄마의 젖량뿐만 아니라 아이의 빠는 능력과도 관계가 있다고 배우지 못했던가?

몇 날 며칠을 함몰 유두 탓하며 아이에게 젖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엄마처럼 노심초사했단 말인가.     


왜 아이들이 떼를 쓰며 길바닥에 드러누울 때 그런 상황은 크고 작게 누구에게나 온다고 배우지 못했던가? 

아이와의 실랑이보다 남의 시선을 더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난 한없이 작아져야만 했단 말인가.     






이렇게 왜로 시작하는 ‘현타’는 육아하는 동안에도 끝없이 찾아왔다. 무려 상담사로 이론적으로 발달론을 배우고 아동심리를 배웠음에도 막상 내 아이를 키우니 ‘책으로 연애를 배웠어요’처럼 실전에선 그야말로 초보였다. 오히려 얕은 지식 때문에 자신에 대한 기대치만 높았고 높은 만큼 좌절도 깊었다. 사람 좋아하니 상담 일했을 거고, 어릴 적 꿈이 수의사였을 정도로 동물도 좋아했고 아이들도 좋아했다. 그런 내가 아이를 낳아 육아 때문에 힘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세상에 넘쳐나는 육아서와 교육서를 읽어도 엄마로서의 무능력감은 도대체 살아질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알면 알수록 더 어려웠다.      


그렇다. 학교에 부모 되기 교과목이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교과서로 배워도 결국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것이 양육이다. 그것도 아이와 양육자의 기질마다 다르니 그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래도 둘째는 훨씬 여유가 생긴다. 흔히 셋째는 발로 키운다고 했다. 아이마다 성향은 달라도 육아도 숙달되는 까닭이다. 물론 그것도 육체적 영역에 관한 것이지 정신적 영역에서는 아이마다 고민의 지점이 달라지는 건 마찬가지다.     

그럼 결국 애를 여럿 낳아보란 말인가?






우선 한 가지 전제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양육의 힘듦은 별개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떤 의미에서 너무 사랑하면 더 힘들 수 있는 게 양육이다. 사랑도 결국은 에너지다. 한정된 에너지를 아이에게 너무 많이 쏟으면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결코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들 사랑은 곧 희생이고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는 높이 평가받는다. 유독 양육에 있어서 아버지의 희생보다 어머니의 희생이 강조되는 게 사실 아닌가. 그래서 엄마들은 이중고를 겪는다. 실제적 힘듦은 물론이고 힘들다고 느끼는 것조차 아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양육의 어려움은 사랑만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거다. 책 보다 경험과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이는 전통적으로 함께 키웠다. 마을이 사라지고 점점 핵가족화되면서 양육은 엄마 개인의 몫이 되었다. 게다가 아이가 하나, 아니면 둘이니 양육에서 여유는 더 있을 수 없다. 그야말로 부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특히 엄마의 양육에 대한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아이를 통해 엄마의 삶이 평가된다. 그 부담이 클수록 양육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양육이 힘들다 느낄수록 죄책감 또한 더 커간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만회하고자 아이에게 더 집착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했다. 이 인디언 속담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다. 저성장 시대 아이들이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주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학벌 위주의 피라미드 구조도 멀지 않아 붕괴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극단적인 양극화로 갈 것인지 아니면 대다수가 기본적인 삶을 누리며 개인적인 삶을 사는 시대가 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것이 세계적인 시대가 온다면 역설적이게도 협업과 연대가 더 강조될 것이다. 개인주의는 내 삶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삶도 존중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골방에서 혼자 아이를 키울 것인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서.

여전히 아이의 성공이 내 삶을 평가하는 기준인가? 아니 질문을 바꿔보자.

정말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럼 잘 못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남보란 듯이 키우면 잘 키운 것이고, 그저 내세울 것이 없으면 잘 못 키운 것인가?

결국 그 기준이 남들의 평가라면 잘 키우든 못 키우든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그 평가는 아이들 스스로가 할 것이며 부모인 우리 자신이 해야 한다. 그 평가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아이들을 함께 키울 수 있다. 비로소 내 아이뿐 아니라 남의 아이도 보인다. 부모로서 역할뿐 아니라 사회의 어른으로서 역할도 보인다. 내 아이 아무리 잘 키우면 뭐 하겠는가 그 아이가 살아갈 사회가 암울하다면 말이다. 사회적 격차가 클수록 그 사회적 비용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 아이들 세대의 몫이 될 것이다. 진짜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의 경쟁력보다 아이가 살아가야 할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데 힘써야 한다. 어차피 아이의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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