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김동수의 나눔톡톡 제 25화
“내가 이렇게 된 건 당신 책임도 있다.” 이 대사는 과거 학교폭력 가해자를 살해한 피의자가 당시 폭력 현장을 보고 방관했던 변호사에게 내뱉은 말이다. 이는 동시에 피해자가 우리 사회 전체에 던지는 분노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학교폭력 드라마는 피해자의 트라우마나 개인의 복수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달랐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방관이 낳은 결과다.”라는 변론을 통해, 목격자들의 무심함을 문제 삼으며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이러한 방관의 문제는 학교를 넘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다. 최근 모 정당에서 불거진 성 비위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해자에게 “그렇게 죽고 살 일인가?”라고 말하는 어느 정치인의 2차 가해성 발언은 더 큰 논란을 증폭시켰다.
이 성차별적 발언은 남성 가해자의 관점에서 피해를 평가하며,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는 편향된 사고를 드러낸 것이다. 결국 성인지감수성의 결핍은 피해자의 고통을 배가시키며, 피해자 보호나 회복 조치가 적시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사이 2차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얼마 전 필자가 수강한 성폭력 예방 교육에서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를 돕는 가장 큰 힘은 주변인의 증언이다. 침묵과 방관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관자 효과’는 다수가 있는 상황일수록 오히려 누구도 개입하지 않는 현상이다. 1964년 뉴욕의 ‘키티 제노비스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많은 주민이 한 여성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끝내 나서지 않았다. 책임이 분산된 탓에 개인의 행동이 마비된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위험한 곳인 이유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악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말은 학교폭력, 직장 내 갑질, 성희롱과 같은 악행 자체보다, 이를 묵인하고 외면하는 태도가 사회 파괴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방관이 깊어질수록 피해자의 상처는 깊어지고, 결국 공동체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번져 우리 모두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종종 벌어지는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이나 드라마 속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폭력의 서사는 바로 이런 불신의 잔혹한 응징을 보여준다.
방관은 인간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동물 학대, 환경 파괴 등에도 똑같이 작동한다.
최근 폭우로 인한 도심 침수의 원인 중 하나로 빗물받이를 막은 담배꽁초가 지적됐다. 이에 대응하여서 한 커뮤니티가 시작한 ‘담배꽁초 하루 한 컵 줍기 운동’은 아주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방관하지 않는 태도로 문제 해결에 관한 관심을 보여주는 좋은 시도다.
결국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방관하지 않기 위해서다.
관심은 사회적 책임의 출발점이고, 책임 의식은 도덕적 연대로 이어져 도움을 주는 행동을 낳는다.
실례로, 노인이나 임산부를 보고 “누군가 양보하겠지” 하며 외면하지 않고 직접 자리를 양보하는 작은 친절을 실천한다면, 그 작은 관심과 배려가 방관을 넘어서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방관하지 않고 관심에서 비롯된 이타적 행동이 많아질수록, 우리 공동체는 더욱 따뜻하고 평화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