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초목이 온통 신록으로 푸르른 오월. 따스한 햇볕 아래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소도 나누고 싱그러운 초록을 만끽하는 평화로운 계절이다.
그런데 80년, 오월은 그러지 못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거리에는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함성 속에 총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여기저기 학생과 시민들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졌다.
이렇게 군인들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구타하고 학살하자, 자발적으로 시민군이 만들어지고 광주시민들은 주먹밥과 헌혈로 그들을 지원했다.
전남도청에서 가까운 광주 적십자병원에는 부상자로 가득 찼다. 당시 근무한 선배의 목격담은 이렇다. “ 부상당한 학생과 시민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있었지. ” “ 말도 말아, 아비규환이었지, 총상환자라 피를 많이 흘렸지, 여기저기서 가족들이 오열하고.” 수술할 피가 부족 하자 수백 명의 시민이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 집 바깥을 나온다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도청 부근에 있는 광주적십자병원 부속 혈액원으로 온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5월 21일과 22일 양일간에 411명이 헌혈에 참여했다. 대한적십자사 본사에서 긴급 파견한 의료진이ㅣ 광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온 상황에서 5월 24일에는 대한적십자사 서영훈 사무총장(전 KBS 사장)이 구호직원 2명과 함께 혈액 200개, 수액제, 항생제 등을 가지고 광주현제에 들어와 병원에 전달했으며, 적십자 소속 의사와 간호사 등 직원들은 열흘 동안 철야 근무를 하면서 부상당한 시민과 군인들을 치료하고 구호했다.
이 얼마나 숭고한 나눔인가? 이와 같은 적십자 직원의 헌신과 시민들의 자발적 헌혈은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적군과 아군의 차별 없이 구호한다는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을 구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혈액으로 생명을 살리는 헌혈이 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마다하지 않는 80년, 오월 정신과도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 광주시가 옛 광주 적십자병원을 5.18 사적지 제11호로 매입하여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려는 계획을 세웠다. 앞으로 건물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내부 보수공사를 통해 교육관, 헌혈의 집, 방문자센터 등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생명을 살린 현장이 보존되고 당시처럼 헌혈할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된다고 하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광주전남혈액원에서도 80년 오월,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헌혈에 참여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5월 31일까지 ‘오월 정신 계승 헌혈캠페인’을 전개한다.
오월의 헌혈은 생명 나눔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나눔은 기부, 봉사, 헌혈을 넘어 서로 돕는 마음의 실천이다. 우리 국민은 코로나19나 각종 재난이 있을 때도 나눔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이러한 나눔이 구성원 간의 연대와 협력으로 이어져 우리 사회 양극화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하며 상생하는 평화의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전히 코로나 여파로 혈액 수급이 불안정하다. 그래서 금년도 오월에는 더 많은 시민이 헌혈의 집과 헌혈 차량에 줄지어 참여하면 좋겠다.
오월 정신이 나눔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 지난해 전남일보 기고문(202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