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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덕 Mar 22. 2023

2. 너를 좋아하는지 나도 몰랐다

응답하라1997

바람이 불어와도 어떤 색의 바람인지 모르는 나이가 있다.
내가 이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려도 되는지 아니면 바람을 맞고 서서 가려고 했던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나이.

윤제는 어느 날 시원이라는 바람이 불어왔을 때, 그 바람이 부는지조차 모르고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윤제가 유정이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가 되어서야 내게 불어온 바람의 존재를 알았다.
시원이가 생리 터졌을 때도 같이 있었기 때문에, 시원이의 존재는 아침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 당연히 가야 하는 학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 윤제에게 이제 고민거리가 생겼다.
유정이의 고백을 받아줄지 말 지, 유정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 지는 전혀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딱 하나, 내게 불어오는 시원이라는 바람을 계속 맞고 서있어도 되는 것인지. 바로 그것이다.




「유정이한테 고백받았다. 우짜지?」

「들었다. 니는 어떤데?」

「모르겠다. 만나지 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만나지 마까? 만나지 마까?」


윤제는 그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시원이에 대한 마음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어떤 마음인지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친구로 시원이 옆에 있는 것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이 상황을 핑계 삼아 시원이에게 내가 너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유정이 고백을 받아주지 말라고 분명한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저 물어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시원이는 이 상황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윤제가 왜 자기에게 그걸 물어보는지 정말 바보가 아니라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시원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는 반문뿐이다.
만나지 말까?라고 물어보는 윤제에게 만나지 말라고 하는 순간, 시원이는 윤제에게 불었던 그 바람이 된다. 내가 어떤 말을 하는지에 따라 윤제가 흔들릴 것이라는 것을 시원이는 알고 있다.
누군가를 이성으로서 좋아해 본 적도, 다른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1학년 여고생은 그저 눈을 피할 뿐이다.


「윤제가 시원이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소원권을 준다. ”무조건 소원 들어주기”」

「소원이 뭔데?」

「만나지 말라 케라.」


시원이에게 유정이를 만나지 말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왜 그 대답을 듣고 싶은지 나도 모른다.
우리는 둘 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열일곱 일뿐이니까.
평생 친구로 옆에 붙어 지낼 줄 알았던 시원이에게 그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지만, 열일곱 소년에게 내 마음을 스스로 결정하기엔 너무도 서툴고 어렵다.
윤제는 내가 유정이의 고백을 받지 않아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신경 쓰이진 않는지 확인받고 싶었을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이 살랑이는 봄바람인지, 거칠게 나를 흔들 폭풍우인지는 모른 채, 이 바람이 너인지도 모른 채.


윤제에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그런 단정적인 말이 아니라, 스스로 나의 감정을 어떤 한 형태로 규정하고 누군가에게 그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혼란이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 쓰이고, 하루종일 생각나고, 친구들과 다 같이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장난치고 놀리다가도 그 친구와 단둘이 있는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희한한 내 모습이 어색하고 이상할 뿐이다.
찬 바람을 오래 맞으면 어느 순간 갑자기 너무 춥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다 문득 그 친구가 다른 남자친구와 있으면 그게 너무 싫은 것이다.
그래서 만나지 말까 물어보고 소원권을 써서라도 그 사람에게 확인받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니까, 그렇다고 내가 널 좋아하니 다른 사람의 고백을 받지 말라 말해달라고 하기에는 그 불안한 마음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서른두 살의 나에게도 소원권이 있으면 좋겠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좋아해 보고, 마음을 드러내봤어도 그 마음을 확신하는 일은 항상 어렵다.
오히려 한 사람을 싫어하는지는 쉽게 알게 되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어릴 때보다 더 깨닫기 어렵다.
이 사람에게 내 모든 걸 드러내도 되는지, 내가 하고 싶은 이 일을 욕심내서 정말 해도 되는지 정하기에는 여전히 두려운 열일곱 살 일 뿐이다.

만나지 말라고 말해달라는 소원,
나도 부탁해도 될까.


퇴근하면 드라마 보는 여의도 직장인. 두 손에 꼽아도 모자란 인생드라마들을 내 생각으로 채워보려고 합니다. 드라마의 한 장면을 가지고 생각을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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