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셨다. 몇 주 전에 오셨을 때보다 훨씬 안색이 칙칙했다. 어릴 적, 책에서 얼핏 보았던 황달이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간이 제 기능을 못할 때 찾아오는 것이 황달이라고 하셨다. 게다가 복수까지 많이 차셔서 이번 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고, 걱정 어린 말씀을 꺼내셨다.
귀에 날카롭게 꽂히는 말을 들으며 작년 여름에 떠나보낸 고양이를 생각했다. 왜 할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늘 고양이가 떠오를까. 사람과 동물은 시간의 속도가 다를 뿐 모두 똑같이 늙어간다. 노화를 거친 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부터는 크고 작은 병에 짓눌려 기운이 점점 떨어진다. 우리 고양이 역시 떠나기 며칠 전 즈음에는 암에 짓눌려 제대로 먹고 마시는 것조차 못 했다. 그렇게 애교를 떨던 아이가 사람이 와도 눈만 간신히 떴다.
빼빼 말라가는 몸, 벌어진 입, 얕고 가빠진 숨.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지금 내 눈앞에 다시 찾아왔다. 작년 여름이 다시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낮은 길고 밤은 짧은, 후텁지근한 공기를 품은 그 계절이 봄과 겹쳐졌다. 할머니를 위해 마련해 둔 큰방은 내게 두려움과 가늘게 떨리는 슬픔, 그리고 바짝 가까이 다가온 이별의 향기를 맡게 했다. 그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마주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리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참 다양한 이별을 겪었다. 정을 듬뿍 주고받았던 고양이 두 마리가 뜨겁게 타오르던 삶을 마무리하고 떠났다. 죽음으로 갈라진 사이는 아니지만 사귀었던 남자친구와의 이별도 있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머리를 무겁게 누르는 것 같다. 뺨을 뭉갤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관계를 먼 곳에서 보게 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그곳에서 내가 어떤 것을 받고 어떤 것을 주었는지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영원히 그 관계를 입고 있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관계를 벗고 다시 돌아볼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별이라는 개념을 만든 걸까.
많은 이별 중에서도 죽음을 통한 이별은 특히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감정이 틀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의 시간이 다 끝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꺼뜨린 시간을 탓할 수도, 돌아오길 바랄 수도 없다. 남은 사람의 진득한 후회를 끌어올 뿐이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이의 눈을 보면 늘 생각이 많아진다. 너무나도 익숙하게 입고 있던 관계를 벗을 준비를 한다.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안다. 가늘게 떨리는 그 마음을, 거기서 번지는 짙은 슬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