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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ug 30. 2024

도망

 비가 내리는 날 도망치듯 밖으로 나선 적이 있었다.

4년 전이었을까? 꽤 오래전이라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열일곱 살을 지나는 가을에 맞았던 차가운 비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새겨져 있다.

전날 이유 모를 불안에 떨며 한참을 울다 잠들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금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 손발이 어딘가에 묶인 것처럼 갑갑하고 집안의 공기가 텁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던지고 현관문을 열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 해야 하는 일도 나를 기다리고 있던 모든 것도 무시하고서.


 우산을 갖고 나가는 것도 잊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무작정 달렸다. 움츠러든 채로 조심스럽게 걷던 집 앞의 인도를 그렇게 질주해 본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날은 다행히도 거리에 사람이 없어서, 나는 오래간만에 속도를 내어 달릴 수 있었다. 항상 사람이 무서워서 제대로 앞을 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날만큼은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좋았다. 비냄새가 섞인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더 가라며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정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세차게 흔들리는 시야와 갈수록 거칠어지는 숨소리만이 남았을 뿐이다. 두 귀가 달아올랐다.


 숨이 차 슬슬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즈음부터는 숨을 고르기 위해 그냥 걸었다.

참, 깨닫고 보니 무릎에 핏방울이 맺혀 있다. 경사진 길을 정신없이 내려가다 엎어진 모양이었다. 알아본 순간부터 쓰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겁이 많았던 나는 숨이 차게 달리던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고,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또 오랜만에 작은 웃음을 지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부쩍 늘어난 인파 사이를 비집고 얌전히 걸었다. 어른이며 아이며 전부 색색의 우산을 쓰고 있었다.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또 얌전히 바닥만 보았다.

그렇게 주춤주춤 걸어가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려 들고 조금은 힘이 들어간 걸음걸이로 걸었다. 불안도 걱정도 비에 씻겨 내려갔는지 마음이 전보다 더 맑아진 듯했다.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나로부터 도망치던 4년 전의 그날은,

그렇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가장 멋진 순간으로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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